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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Feb 05. 2024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

「괴물 (2023)」, ★★★★★

괴물이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나토와 요리

「괴물(怪物)」, 2023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하나타 주연


오해를 경유해서 이해에 이르는 경험 끝에 관객은 그 햇살 아래서 증인이 된다
- 이동진 -


  괴말 정같 물은 영화. 처음 했람관을 당시엔 내가 무을엇 보는았도지 모를 정였다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입니다.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결국 극장 관람을 놓치나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되어 정말 휘몰아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일본 영화 특유의 절제된 감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잠시나마 건방을 내려놓고 넋을 놓게 된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어느 가족」 에도 등장했던 '안도 사쿠라'와 작품에 잘 녹아드는 두 아역배우 '쿠로카와 소야'와 '히이라키 하나타', 그리고 호리 선생 역으로 등장한 '나가야마 아야타' 등 괴물 같은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


  그들의 감정을 유려하게 표현하는 故 류이치 사카모토의 심미적인 OST와 고레에다의 엄청난 연출은 긴 러닝타임조차 망각시키고 괴물이 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합니다.


  관람할 계획이 있으시다면, 가능한 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관람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시놉시스

싱글맘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의 행동에서 이상 기운을 감지한다. 용기를 내 찾아간 학교에서 상담을 진행한 날 이후 선생님과 학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기 시작하고.

한편 사오리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미나토의 친구 요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이 아는 아들의 모습과 사람들이 아는 아들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데…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아무도 몰랐던 진실이 드러난다.





I

줄거리



화재 현장

  작품은 불길에 휩싸인 빌딩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많은 인물들 중 베란다에 서있는 모자母子 사오리와 미나토가 있는데요. 미나토는 엄마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합니다.


돼지의 뇌가 이식된 인간은 인간일까, 아닐까?_미나토
인간이 아니지._사오리


  사오리는 요즘 이상행동을 하는 미나토를 걱정하고, 급기야 담임인 호리 선생이 아들을 학대했다는 정황을 알게 되자 학교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만나게 된 호리 선생과 교장은 어딘가 이상하죠.


  호리는 사오리의 항의를 '싱글맘의 과잉보호'라고 표현하거나 사과의 뉘앙스가 단순한 오해인 것처럼 말하는데요.


  심지어 교장을 포함한 선생들은 정확한 설명 대신 말없이 고개만 숙이며 급기야는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고까지 합니다.


학교에 찾아와 항의하는 사오리

  그 뒤로도 미나토의 증언 상 멈추지 않는 학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오리는 학교로 다시 한번 찾아가지만 오히려 호리 선생에게 '아드님이 요리라는 다른 아이를 괴롭힌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오리는 헛소리라고 받아치며 막연하게 들은 소문인 '호리 선생이 걸스바에 다닌다'는 말로 비난하죠. 아들의 가방에서 토치가 발견되고 수통에 진흙이 들어있는 등 분명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호리 선생은 아이들과 요리의 증언으로 폭력 선생이란 오명에 올라섭니다. 수많은 학부모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하는 호리.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오리와 수군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 권선징악인 듯 보입니다.


행복한 두 소년

  한 편 도시에는 강한 태풍이 찾아오게 되고 사오리는 다 괜찮아졌다며 미나토를 격려하지만,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태풍과 함께 모든 것의 밑에서 썩어가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영화의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입니다. 불타는 빌딩에서 태풍이 오던 날까지의 똑같은 사건 흐름을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인물들의 다른 관점으로 하나씩 보여주는 구성이죠.


  영화는 크게 사오리, 호리, 그리고 미나토의 관점으로 서사를 진행시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과 진실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II

돼지



  작품은 '돼지'라는 동물을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자신의 머리에 돼지 뇌가 들어있다는 요리, 그리고 요리에게 그러한 생각을 주입시킨 요리의 아버지.


  이는 주제와 관련된 단어인 '괴물'과 비슷한 빈도로 등장하는데요. 작품은 괴물이라는 단어와 돼지라는 동물을 교차적으로 언급하며 그저 괴물을 찾기 위해 급급한 관객들의 주관을 파고들려고 합니다.


  돼지는 돼지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문제가 없으나 돼지의 뇌가 들어있는 인간은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요?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지만 돼지의 생각을 갖고 있는 무언가는 어떤 존재일까요.


태풍이 오던 날의 미나토

  돼지는 1차원적인 동물입니다. 게으름뱅이이고 미식가죠. 내가 눕고 싶다면 진흙탕이든 드러눕고, 쓰레기통을 뒤지더라도 맛있는 것만을 골라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이행하고 그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동물입니다. 다만 온몸에 진흙을 묻히고, 쓰레기가 가득한 곳을 돌아다니는 돼지는 인간의 시선에선 더럽고, 말 그대로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요.


  잘 살고 있는 돼지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들. 어떻게 보면 가장 반사회적인 이들을 향해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이름을 붙이며 억압합니다. 괴물이라고요.


나는 누구인가

  작품 내에서 괴물이라고 칭해지는 존재들은 여럿 있습니다.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요리, 교권을 추락시키는 우악스러운 부모들, 이상행동을 하는 미나토, 아이를 학대했다는 호리 선생 등.


  당신들이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는 진실이자 진리. 그건 뭐가 됐든 아무 상관없고,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규명하곤 합니다.


  현실 속에선 퀴어나 빈부격차, 환경 혹은 인종과 성별, 그것도 아니라면 주관의 차이로 갈리는 운명이죠.


요리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거부하지 못하던 미나토는 분명 요리에게 우정 이상의 끌림을 느낍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습니다.

요리는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자신의 뇌는 돼지의 뇌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따뜻하던 호리 선생은 스스로의 결백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입을 닫아야 하는 이유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이라서가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어딘가로부터, 언젠가로부터 그냥 안 되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난 누군가의 자식, 연인이고 사회화를 돕는 초등학교란 조직의 구성원이며 미래에는 사회에 종속되어 살아나가야 하니까요. 사회란 괴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틀린 게 아닌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에는 교장의 대사가 대신 답변을 합니다.

"진실이 어쨌든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남자다운"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호리 선생

  스크린 밖 현실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대답하죠. "사는 게 그래."


  입 밖으로 내뱉고 싶습니다. 네가 좋다고, 뭔지는 모르지만 네가 좋다고 말하고 싶다고. 나는 잘못 없고다. 나는 하백결고 짓거말을 하지 았않다고.


  나는 고받통고 고있다. 나는 아숨쉬살는 인이간고 고복하행 싶다고. 그러나 돼지의 울음소리에 집중하는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고.





III

괴물

미나토와 교장



  작품에서 제시하는 괴물은 누구가 아닙니다. 언제죠. 우리는 사이를 가르고 편을 만들기 위해 괴물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괴물」 은 삶 속에서 개인이 개인을, 집단이 개인을 집단이 집단을 괴물로 규정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학교를 위한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따뜻했던 호리 선생을 폭력 교사로 만들고, '남자다움'을 강조하며 어린아이들에게 멋모르고 상처를 줍니다.


  대게는 이익으로, 혹은 주관으로 움직이는 이 현상은 괴물이란 형상을 만들어 선악을 나누고, 나는 안전하다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도록 하는데요.


요리와 미나토가 함께 놀던 폐전차

  장난스러운 예시로는 과거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이 있겠습니다. 무겁게 생각하면 우리가 삶 속에서 지나치는 수많은 괴물이 되겠죠.


  호리가 미나토를 학대했다고 믿는 사오리도,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고 믿는 호리도, 손녀를 친 범인으로 남편을 내세운 것이 최선이었다 믿는 교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쥐고 있는 무언가(인생, 가족, 지위 등)를 지키기 위해, 끝내는 자신의 주관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괴물로 만듭니다. 


  사실 관객들도 살다 보면 그러한 방식이 당연함을 깨닫는 시점이 있고, 곧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모두가 납득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연함 속에서 그들 모두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채워나가기보단, 풀 수 없는 문제기에 페이지를 넘겨버리는 셈이죠.


  미나토와 교장. 두 인물은 작품 내에서 명확한 대척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혼란을 해결하려 몸부림치는 미나토는 교장과 분명 다르죠. 


죽은 눈을 하고 있는 교장

  사오리의 항의에 대응하기 위해 죽은 손녀의 사진을 일부러 잘 보이게 두거나 교육자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실수로 손녀를 친 범인으로 남편을 내세우는 등 비인간적으로나마 공허하게 쌓아 올린 자신의 것들을 지키는, 어떻게 보면 가장 사회에 찌든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시선은 역설합니다. 번뇌와 혼란에 휩싸여 이상 행동을 하는 미나토를 가장 인간적이게, 그리고 높은 사회적 지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멘탈을 가진 교장을 소시오패스, 비인간적인 괴물처럼 묘사하죠.


  가장 양극단에 있는 두 인물이 마주하는 장면, 트럼본과 호른을 함께 부는 씬을 기억하시나요. 자신은 원래 음악선생이었다며 미나토에게 트럼본을 쥐어주는 교장은 굉장히 따뜻해 보입니다. 영화 내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던 교장의 인간성이 처음으로 보이는 부분이죠. 


  마침내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하던 두 인물이 한 장면에 나오면서 작품은 그간 '아무렴 상관없던' 진실을 보여줍니다. 서로를 혐오하게 된 오늘날의 세상 속 참모습.


한 때는 자애로운 음악선생님이었을 텐데

두 사람의 대사를 보면,

미나토 :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요. 그렇지만 행복할 수 없는 걸 알아서 말할 수 없어요.

교장 :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 아니야. 모두가 가질 수 있어야 행복이지. 행복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면 후, 불어버리렴.


  두 사람은 행복하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 내뱉을 수 없었던 각자의 감정을 떠올리며 악기를 힘껏 붑니다. 살다 보니 죽은 눈이 되어버린 교장과 어린 나이에 행복의 부조리를 깨달은 미나토. 음계도, 박자도 없이 그저 불어대는 굉음.


  그 시각 학교에 있던 사오리와 호리, 교장과 미나토 모두를 휘감은 괴물의 울음소리입니다. 용인되지 않는 행복을 위해 외치는 신음은 그렇게 들려야 한다는 것처럼요.





IV

다시 태어나다

엔딩에 관해



  중간에 요리는 '빅 크런치'에 대해 언급합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도 없는 먼 옛날부터 팽창하던 우주는 언젠가 이해 못 할 이유로 다시 수축할 것이라고요.


  우리는 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나요? 죽음이란 방점을 찍기 위해 탄생에 달고 나온 물음표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나요.


  미나토는 내연녀와 온천을 갔다가 사고로 죽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는 새로 태어났을까? 어떤 걸로 다시 태어났을까. 미나토와 요리는 태어났지만 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지만 각자 학대와 혼란을 겪고 있는 두 소년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정해져 있는 불행 역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우주가 수축을 시작한다면 만물에 통용되던 물리 법칙을 시작으로 모든 게 격변하게 될 것처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온 세상을 휩쓸며 부수고 물에 수장시키는 태풍이 찾아오자 미나토와 요리는 자신들이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던 곳, 함께 놀던 폐전차에 들어갑니다.


  태풍이 쓸고 지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자신들은 행복해도 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뒤집히고 나면

  개인적으로 두 소년은 엔딩 장면 시점에선 이미 목숨을 잃은 듯 보입니다. 강한 태풍이었음에도 그렇게 화창하게 되기까지 폐전차에 있었던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중반부에 분명 철창이 막고 있어 들어갈 수 없던 기차선로가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인데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막아놓은 두 소년은 돼지처럼 온몸에 진흙이 묻어있지만 행복하게, 자신의 길을 따라 달립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에선 공통적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 같지는 않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아버지와, 아이들과, 가족과, 세상. 너무나 다양하고 변수가 많기에 오히려 거스를 수 없는 것들을 그려내는데요.


  특히나 「괴물」 에서 보여주는 사회의 이치는 언뜻 너무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를 이루는 우리도, 이 영화에서 누가 괴물인지에 대해 고심하던 어리석음도 그러합니다. 


  오늘날이 혐오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또 그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함께 바위를 밀어내야 하는데 먼저 바위가 누구 것인지 다투는 모습 같다고나 할까요.


  혹은 함께 밀어보기도 전에 옆 사람은 바위를 밀 자격이 없다며 자리를 이탈하는 모습일까요. 


  작품 속 인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은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괴물로 만듭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인간도, 지구도 우주도 끝날 운명임에도.


  그 짧은 생애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고 물어 뜯어낸 살점들을 다시 나누며 살점들로 살 찌운 자신의 모습을 '생존'에 빗댑니다. 


  우주의 입장에선 나비의 날갯짓만도 못한 바람에도 인간은 창문에 신문지를 붙이고 자신의 동굴에 박혀 나오지 않습니다. 되게 우습고 치졸해 보이지만,


  그게 너 나 우리의 이야기. 죽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인 이유와 행복할 수 없었던 괴물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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