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2024
*먼저 들어가기 앞서 본 글은 최근 화제작 「파묘」에 대한 필자 개인적인 아쉬움을 다룬 글이며, 또 오로지 영상미디어적인 측면에서만 이야기할 뿐 어떠한 정치・역사적 견해는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사바하」, 「검은 사제들」 이후 다시 오컬트 장르로 돌아온 장재현 감독의 「파묘」 입니다. 이번에도 매니악한 소재를 유니크한 매력으로 살려 장르 특유의 기이함, 스산함을 잘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주・조연 가릴 것 없이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준 출연진분들과 특히 미술팀의 활약 역시 돋보였으며 기세를 잘 유지한 끝에 최근에는 천만영화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서사 / 캐릭터 빌딩 부분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흥행가도를 달리는 작품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습니다만, 보잘것없는 제 의견이라도 자양분이 되어 한국 영화계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미국 LA, 거액의 의뢰를 받은 무당 화림과 봉길.
두 사람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의 장손을 만난다.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챈 화림은 이장을 권하고,
돈 냄새를 맡은 최고의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합류한다.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에 자리한 기이한 묘.
상덕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제안을 거절하지만,
화림의 설득으로 결국 파묘가 시작되고… 나와서는 안될 것이 나왔다.
*아래 내용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할 때 관객의 집중력을 책임지는 요소 중에는 핍진성과 개연성이 있습니다. 대게 핍진성은 서사의 현실성, 개연성은 인물의 합리성에서 나오는 성적표와도 같은데요.
쉽게 말하자면 [핍진성 = 그럴 듯 하다 / 개연성 = 그럴 법 하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SF나 판타지 장르는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이기에 핍진성이 떨어지는 대신 개연성을 촘촘히 확보해 내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유도합니다.
좀비 사태로 일어난 디스토피아 장르 속, 인간이라면 가진 생존 본능에 의해 살인이나 약탈을 하는 것. 현실에 일어날 듯하진 않지만 내가 작품의 주인공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파묘」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오컬트 장르는 단순한 호러 장르를 넘어 퇴마, 의식의 수준으로 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겐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떨어지는 핍진성을 개연성으로 잡아내는 것이 조금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요.
예를 들어 풍수사라는 독특한 직업을 설정, 동시에 결혼을 앞둔 딸의 아버지라는 공감대가 높은 배경을 차용해 만들어낸 상덕은 정확한 목적, 또는 목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상덕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소중한 딸의 결혼 자금 보태기? 정령을 퇴마 하기? 이런 짓을 몸을 던져가며 하는 이유가 사실 클라이맥스 직전 영근과의 대화에서 완전히 설득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품의 속도감을 위해 편집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초반부 베테랑 풍수사이면서도 돈을 좋아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뚜렷한 변화의 계기 없이 '후손들이 밟아갈 땅이기에'라는 설명은 개연성을 무너뜨리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사명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나라도 그러겠다"라는 이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봅니다.
차라리 이제 결혼하고 아버지 세대로부터 독립해 스스로를 딛고 살아갈 자신의 딸과 이 땅의 후손이라는 이미지를 맞추었다면 어땠을까요.
더욱 아버지로서, 후손을 위한 전 세대로서의 사명이 돋보일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상덕은 은근 딸바보 캐릭터의 면모가 드러나지만, 초반부와 엔딩을 제외하면 마치 자신에게 딸이 있었음을 잊어버린 남자처럼 보입니다.
굳이 딸을 등장시켜 작품 내내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그의 동선에서 상덕을 내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더라면 인물의 입체성이 더욱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또한 화림, 봉길, 상덕, 영근이 이 작업에 꼭 필수적이어야 한다는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케이퍼(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과업을 달성) 무비로 취급되는 영화 「도둑들」의 경우,
"태양의 눈물"을 훔치기 위한 계획에 투입되는 인물들은 무작위로 모인 것이 아닌 작 중 마카오 박의 빅 픽쳐에 꼭 필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얽히고설킴이 납득이 되는 모습이죠.
그러나 「파묘」는 작품의 매력적인 세계관 속 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걸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떨어지는 서사의 현실성(핍진성)을 인물의 합리성(개연성)으로 커버하지 못해 중반부 장르가 전환됨과 동시에 집중력이 깨져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요소로 남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작품은 중반부 반전처럼 등장하는 "첩장"의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나쁜 것 그 아래 험한 것. 개인적으로 관이 수직으로 묻혀 있는 모습이 꽤나 기이한 매력을 담아내어 기억에 남는데요.
전반부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가족을 위협하던 존재는 사라지지만, 후반부 파묘를 도왔던 일꾼 한 명에 의해 그 밑에 있던 일본 귀신이자 혼이 막강해 물리적인 형체를 띄는 정령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전반부의 기이함, 형언할 수 없는 불경함의 실체를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다만 개인적으론 정령의 모습이 그다지 창의적으로 디자인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귀신은 그냥 다 죽인다. 가까이만 가도 다 죽인다.
위 같은 설명을 통해 인물들에게 닥쳐오는 무력감과 공포심을 깔아 둔 것은 좋았으나, 정령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무력감과 공포심이 사그라드는 느낌입니다.
인간 같지만, 인간 같지 않은 부분을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배우가 연기하는 느낌이 강했다랄까요. 이펙트의 효과가 티 나는 정령의 목소리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후반부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의 소재를 보고 있자면 이 정령의 맥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깔아 두는 반복적인 복선은 적다 못해 희미하고, 대사는 다소 직관적이지 않으며 잘 안 들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쇠침 이야기"를 영화의 매력과 융합해내지 못해 오히려 진실이 드러나는 클라이맥스에서 맥이 빠져버리는 느낌이죠.
외로 작품의 방향성을 흐리는 요소로는 보이스오버가 있습니다.
특히나 작중 상덕의 보이스오버는 마치 관객에게 말하는 듯한, 제4의 벽을 깨고 건네는 설명이라고 봐도 무방한데요.
영화 작품에서 보이스오버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 어떤 연출, 대사보다 명분이 완벽해야 합니다. 시각적인 미디어에서는 굉장히 도전적인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데드풀」 을 볼까요.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대놓고 말을 거는 주인공, 데드풀이자 웨이드 윌슨은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영화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불사의 몸을 가지게 된 그는 절대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 생각과 행동범위를 자랑하죠.
덕분에 데드풀은 대놓고 관객에게 농담을 하거나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끌고 오는 등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마구 합니다만, 작 중 데드풀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그가 그냥 "미친놈"이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보이스오버는 누가, 누구에게, 왜 말하는지가 완벽하게 납득이 되어야 합니다.
데드풀은 자신의 속마음이 관객에게 들리는 것을 알고 있고, 다른 인물들은 그가 왜 혼자 허공을 보고(그에게만 보이는 관객을 향해) 떠드는 지를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데드풀이 하는 말들 역시 시각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할 법한 농담, 보충 설명 등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반면 상덕의 보이스오버는 명분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과연 상덕이 지금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건지, 상덕은 자신의 목소리가 관객에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다면 왜 관객에게 설명하는 건지에 대해 이유가 부족하죠.
동시에 시각을 대체하려는 설명으로 가득해 모 평론가의 말처럼 "시각을 대체하는 편의적인 보이스오버"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솔직히 "아 딸내미 결혼식"은 웃었지만요.
결과적으로 시각의 극대화, 인물의 개연성이 작품의 가장 큰 중심축이자 닿지 않는 듯한 이야기 조각들을 연결시키는 열쇠였지만,
집중력을 유지시키지 못하고 감정 이입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해 영화관에서의 관람 자체로 완성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파묘」 는 분명 재미없는 영화가 아닙니다. 최근 위기설까지 나돌았던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와준 감사한 작품이기도 하고, 매니악한 오컬트 장르로 천만영화를 달성했음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부분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아쉬움일 뿐이고, 역시 한국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좋았던 만큼 아쉬움 역시 컸지만,
앞으로는 영화관에 걸려 있는 한국 작품들도 "한 번 볼까" 싶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