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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예술 Mar 31. 2024

[리뉴얼] 음악으로 만든 스릴러

「위플래쉬」, 2014

Intro


5, 6, 7, 8!


채찍을 휘두른다.
몸을 휘감는 소리는 어렴풋이 재질을 알려 준다.

얇고 기다란 타격의 움직임은 나를 쓰다듬고,
날카로운 끝이 부딪히는 곳마다 다른 소리가 난다.

사운드가 우리를 달리게 하고 통울림이 엉덩이를 걷어찬다.
달리는 놈은 따로 있는데 나아가는 것 역시 따로 정해져 있다.

오선지 같은 도로를 달리며
경고 표지판에 따라
애꿎은 길을 되돌아가는가 하면
원치 않게 누군가를 앞지르기도 한다.

다음 발자국이 노트가 된다.
때때로 잠시 쉬어도 된다지만
침묵은 채찍을 더 약 오르게 한다.

이완 같지는 않다.
더 고요한 긴장이다.


  문득 드럼을 치는 것은 말을 타고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자리에 편하게 앉아 손에 쥔 스틱을 마구 휘두르며 악보 위를 올곧게 나아가는 모습.


  심벌에 긁혀 가시가 털처럼 삐죽삐죽 돋아난 스틱은 실수처럼 손에 스쳐도 쓰라리고, 악보의 끝에 다다를 때면 체력과 함께 집중력이 바닥나기 시작하곤 합니다.


  어딜 치느냐에 따라 소리도 다르고, 두 마디 전 때린 스네어와 지금의 소리가 다르지도 않지만, 같은 소리의 집합이 여백과 강세를 만나 전진성을 만드는 매력이 있으므로.


  합주라도 하게 된다면 나의 '삐끗'은 더욱 큰 파장을 불러옵니다. 열심히 달리고 있으니 악보만 너무 뚫어져라 쳐다봐도 안됩니다. 전방 주시는 필수니까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언제나 일정량의 공포를 동반합니다. 채찍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나지만, 결국 침묵을 두려워하며 멈추지 못하는 나도 달리는 말과 똑같습니다.






  

「위플래쉬 (WHIPLASH)」, 2014

데미언 셔젤 감독 / 마일스 텔러, J.K. 시몬스 주연


  아아, 스승의 은혜. 머리가 벗겨질 만큼 제자 생각뿐인 예술가와 역시 그를 닮아 예술가로 거듭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 「위플래쉬」입니다.


  데미언 셔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단편영화에서 시작해 저예산 장편영화로 확장되어 흥행은 물론이요 평단의 찬사까지 챙긴 작품인데요.


  겉보기엔 음악, 재즈 그리고 드럼 연주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스릴러를 담고 있는 작품이죠.


  사방에서 거칠게 쏟아지는 욕설만큼이나 재즈와 스릴러는 쫄깃한 압박감을 장르의 추진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너는 채찍을 든 사람이냐, 채찍을 맞는 사람이냐.



시놉시스

"박자가 안 맞잖아, 다시!"

뉴욕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서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게 된 신입생 '앤드류'.
최고의 지휘자이지만 동시에 최악의 폭군인 '플레쳐' 교수는
폭언과 학대로 '앤드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인다.

드럼 주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 빠르게 달리는 선율 뒤로 아득해지는 의식.
그 순간, 드럼에 대한 앤드류의 집착과 광기가 폭발한다.
최고의 연주를 위한 완벽한 스윙이 시작된다!





I

앤드류의 꿈

줄거리


영화의 첫 장면, 홀로 연습 중인 앤드류

  명문 음대, 셰이퍼에 입학한 앤드류는 열정 있는 꿈나무입니다. 낡은 포스터와 CD가 동기부여의 전부이며 버디 리치의 팬이기도 한.


  평범한 나소 밴드의 보조 드러머. 그저 그런 대학생활을 보내나 싶었던 앤드류는 얼떨결에 소문이 자자한 최고의 지휘자 플렛쳐의 눈에 띄어 그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는데요.


  교내 최상위 밴드, 최고 지휘자가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는 팀에 스카웃된 앤드류. 그를 포함해 차후 사회로 나가 음악사를 책임질 밴드 부원들은 금지옥엽 귀한 대접을 받게 되겠죠?


배수의 진

  그럴 리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예술가에겐 전부인 명예를 건 것은 맞지만, 플렛쳐의 제자 육성 방식은 궤를 달리했는데요.


  심적으로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여서 한계를 이끌어내는 것. 인격모독과 높은 수위의 욕설, 비아냥이 기본값인 플렛쳐는 자신의 교육법이 당당하고, 심지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에너지(?)에 못 이겨 밴드를 뛰쳐나가거나 심하면 다시는 악기를 잡지 못하게 되었지만, 플렛쳐에게 그건 알 바가 아닙니다. 그의 눈에는 결국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 나약한 자들이었으니까요.


  주인공 앤드류도 아무리 드럼을 사랑한다지만 이제 대학에 들어온 병아리입니다.


  플렛쳐가 자신의 가정사를 들먹이며 고함을 지르고 압박하자 금세 눈물까지 뚝뚝 흘려버리죠. 하지만 앤드류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습니다. 마음 깊이 자리한 자신만의 야망이 확고했는데요.


  앤드류의 야망은 이렇습니다.


서른네 살에 마약에 찌들고 궁핍하게 죽어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삶이 낫죠.
아흔 살까지 심심하게 살다가 모두에게 잊히는 것보다는.


  꽤나 확실한 스탠스를 갖고 있습니다. '예술'에 대해 다루는 수많은 작품에서 주인공은 보통 '나의 예술'에 대해 고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예술이 맞는지, 내가 예술을 잘하고 있기는 한 건지 고통스러워하면서요.

피가 나도록

  하지만 앤드류는 그딴 게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게 예술이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려면 정상에 올라서야 합니다. 자신의 삶보다 그 삶의 수식어가 될 이름 석 자의 무게가 중요했던 인물이죠.


  여러 번의 유혈사태와 욕설, 격렬히 뒤엉키는 몸싸움을 거쳐 엔딩 시퀀스에 다다라 앤드류는 플렛쳐가 쳐 놓은 덫을 걷어차고 그동안 영혼을 갈아 연마했던 곡 「Caravan」을 연주합니다.


  대사도 다른 악기의 소리도 없이 드럼 솔로로만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정말 숨통을 조여오는데요.


  작품은 드럼의 속도감을 카메라의 구도 변화로 유지하며 지지부진한 설명 없이 앤드류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동시에 관객들의 표정과 닮아있는 앤드류의 아버지를 보여주죠.


경외를 넘어선 압도

  어머니도, 친구도 없던 앤드류에게 있던 기존의 것. 가족들과 '이만하면 수고했어'라고 말해줄 수 있던 따뜻한 환경. 그리고 소중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모든 걸 내려놓고 살아갈 암담한 그의 앞날.


  절차와 말 몇 마디들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정말 목숨을 바친 사람의 위압감입니다. 단지 앤드류가 드럼을 접신한 듯이 치는 장면뿐이지만 관객들의 머릿속엔 한 장면이 지나가지 않나요.


서른네 살에 마약에 찌들고 궁핍하게 죽어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삶


  뻔히 보이는 그의 앞날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셈입니다.





II

플렛쳐의 꿈

예술'가'에 정답은 없나?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은 예술의 산물을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입니다만 확실히 예술에는 정답과 오답의 구분이 희미하죠.


  하지만 예술'가'가 되는 것에는 정답이 있을까요? 어떤 식으로든 나의 영혼을 담아낼 수만 있다면 그르지 않은 걸까요?


  플렛쳐의 교육은 극단적으로 결과론적인 방식입니다. 오로지 결과를 위한 과정에는 군더더기가 없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갖고 있는데요. 버텨내느냐, 아니냐의 차이지만 '버텨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묵살합니다.


정녕 소중한 제자를 보는 스승의 눈빛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당시 '어둠의 오은영 박사님' 같은 농담이 될 정도로 「위플래쉬」의 스승, 플렛쳐는 꽤 큰 파장을 갖고 왔습니다. 카리스마, 욕설, 스파르타식 육성 루트, 이를 모두 한 인간의 일관성으로 보이게 만들 만한 신념.


난 내 제자들이 한계를 보길 원해.
나약하게 군다면 전설이고 뭐고 없어.



  다만 안타깝게도 플렛쳐 역시 한 명의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해 옛 제자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했고, 명예에 목숨 거는 양반이 오로지 앤드류를 창피 주겠다는 복수심으로 앤드류를 업계에서 매장시키려고 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렇기에 플렛쳐를 묘하게 닮아가는 앤드류는 성장한다기보단 함몰되어 가는데요.


  앤드류는 분명 자신이 도달해보지 못했던 음악적 경지에 발을 딛고 전설이 되길 꿈꿉니다. 새로운 땅에 몸을 던짐과 동시에 그의 신체는 색다른 호흡을 내뿜습니다.


서서히 가라앉다

  그러나 앤드류는 거듭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문을 걸어 잠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죠.


  점점 플렛쳐를 닮아가며 자신에게 욕설을 하고 몰아붙이며 '위대해지기 위해' 애꿎은 여자친구를 차버리는 등 삶의 저울 속 어느 한쪽을 과하게 덜어내는 모습입니다.


  무엇을 위해? 상관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플렛쳐의 방식이 스며든 앤드류는 최고가 되고자 하는데요. 최고가 되려면 내 위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므로 그는 드럼세트가 놓인 아래만을 바라보며 달립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망가지는 와중에도 말입니다.





III

굿 잡

엔딩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내일부터 하자. 혹은 중간은 했으니까.


  작 중에는 플렛쳐의 신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름 억울하게 학교에서 제명당한 앤드류의 고발 때문에 교직에서 내려온 플렛쳐.


  그는 한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와중 그곳으로 들어온 앤드류와 마주치게 됩니다.


나도 나름 이유가 있었어

  나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듯, 허심탄회하게. 학교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털털한 옛 스승처럼 말하는 플렛쳐.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말이 뭔 줄 알아? "그 정도면 잘했다(Good Job)"야.


  다시 한번 그의 결과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 정도"라고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의 위치.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어떤 분야든 전설로 남기 위해선 상위 1%, 아니 0.01% 안에는 들어야 하니까요.




  다시 엔딩 시퀀스로 돌아와서, 앤드류의 신들린 스네어 연타가 이어지고, 번갈아 클로즈업되는 플렛쳐와 앤드류의 얼굴.



  이때 의도적으로 프레임에 가려진 플렛쳐의 입. 그리고 앤드류를 향해 "굿 잡"이라는 듯한 입모양, 주변 근육의 움직임이 천천히 드러납니다.


  정말 인상 깊은 장면입니다. 실제로 그가 한 말은 감독만 알겠지만 그렇기에 더 '플렛쳐'답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조차 쉽게 허락되는 말은 아니라고 하는 듯합니다.

  조금 전의 광기를 보았다면, 정말 끝장을 본 사람의 필사즉생을 보았다면 알겠지. 당신들도 이렇게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신들 힐링이나 해주자고 이런 대사를 칠 줄 알았나.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애인을 만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겠죠. 채찍을 피해 다니는 게 아니라 채찍을 내려놓으며.


  그걸 들고 있던 사람이 자신인지도 몰랐던 우리는 이 영화의 엔딩에 두려워하고, 서글퍼합니다. 그러나 전율을 끌고 오는 압도가 다시 채찍을 쥐게 하고.


 채찍을 휘두른다. 몸을 휘감는 소리가 재질마저 알려주는 듯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너는 채찍을 든 사람이냐, 채찍을 맞는 사람이냐. 타격과 공백의 반복을 체감하다 결국 그 잠깐의 침묵 속에 그들은 함께 있습니다. 살짝씩 미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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