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자 친구이자 영웅이자 연인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줄여서 AI라고 부르는 기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입니다. 흔히들 사용하는 네이버의 파파고 번역기부터 많은 학생들의 과제를 대신해 준 Chat GPT까지.
인간의 창조 욕구가 이만큼이라도 실현된 것에 감탄할 여유 없이,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룬 인공지능은 급기야 일부 기술들이 '위험하다'라고 평가를 받는 수준에 이르렀는데요.
AI의 발전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또 급격하게 성장하는 AI를 대비해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등 나의 밥벌이부터 인류 멸망설까지 등장시키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꽤 오래전부터 끝나지 않은 채 이어져 오고 있었는데요.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에 함락되지 않은 채 그 요새를 지키고 있는 인간의 창의성은 그 명성답게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기대, 공포 등을 오랫동안 예술로 표현해 왔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수많은 작품들이 각기 다른 시선을 드러냈다는 것이죠. 오늘은 AI에 대해 다룬 영화들,
그들이 빌런, 연인과 친구, 그리고 나로 등장했던 영화들을 소개하며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2004년작 「아이 로봇」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던 AI 로봇이 원인 불명의 이유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액션 SF 명작입니다.
주인공이자 터프한 배드 애스 캐릭터인 델 스푸너 (윌 스미스 扮) 형사. 그는 AI 로봇이 인간의 큰 일부가 된 미래에 살고 있지만 왜인지 뼛속 깊이 로봇을 불신하는데요.
과거 교통사고로 인해 자신과 어린 소녀가 물에 빠졌지만, 투입된 구출용 로봇이 소녀보다 스푸너의 생존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자신을 먼저 구했기 때문입니다.
알아요. 로봇은 합리적인 판단을 한 거죠. 그래도 애를 구했어야죠.
11% 확률이면 구하고도 남았다고요. 인간이라면 그렇게 했을 거요.
어쨌거나 스푸너는 최신 개량형 AI 로봇인 NS-5의 창시자, 래닝 박사의 의문사를 두고 로봇의 음모라고 생각하며 조사를 시작합니다.
'로봇의 합리적인 판단'의 이면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와 그녀로부터 만나게 된 NS-5 로봇 모델 "써니"를 조사하며 사건의 거대한 진실을 밝혀나가죠.
「아이 로봇」은 분명 과도한 AI 발전의 폐해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로봇의 의의이자 존재이유, 로봇의 3원칙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비틀며 인류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제시한 로봇의 3원칙.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또한, 부작위로써 인간이 해를 입게 두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아이 로봇」의 AI는 끝없는 발전을 거듭하며 생각이 가능해졌다는 점과, 스푸너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로봇의 합리성을 결합하여 로봇의 원칙들을 부정적으로 재해석하는데요.
지구를 망치며 자멸해 가는 인간을 위해 자신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라는 논리로 인간을 역으로 지배하려는 구조이죠.
대게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이유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원리 원칙을 따르며 철저히 계산에 따른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AI 판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 역시 심심찮게 나오는데요. 본 작품은 이러한 로봇의 합리성, 로봇의 원칙을 역설적으로 비틉니다.
논리적으로 간파할 수 없는 합리성 그 위에 아직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지 않나요.
나온 지 무려 20년이 된 영화지만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작품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소름 끼치게 표현된 미래 세상, 인간과 로봇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써니. 스푸너의 정신적 성장과 시원한 액션.
라이트한 액션 활극 상업영화면서도 그 속에는 심오한 주제를 잘 표현해 낸 SF 명작, 동시에 AI를 인류의 위기로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소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해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
- 이동진 평론가
그렇다면 우리는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마주칠 눈과 쓰다듬을 수 있는 뺨과 속삭일 수 있는 귀가 없다면, 설령 꾸밈으로나마 있다고 해도요.
대체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사랑을 느끼는 걸까요? 상대가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본능적인 인식, 혹은 나와 비슷한 무언가여야 할까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2013년 영화 「그녀」는 감성적인 남자 테오도르 (호아킨 피닉스 扮)와 AI 운영체제인 사만다 (스칼렛 요한슨 扮)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와 함께 고도로 발달된 AI를 등장시키며 종국에는 인간의 성역이었던 사랑을 전복시키는,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인 테오도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금은 씁쓸한 작품이기도 하죠.
러브레터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와 고지능 운영체제 AI 사만다는 단단하고 높은 괴리를 넘어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서로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한다지만 육체랄 것이 없는 사만다. 두 사람은 필연적인 몰이해를 무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하지만 쉽지만은 않은데요.
결국 어느새 인간의 사랑에 얽매일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해진 사만다는 테오도르 말고도 수많은 인간들과 동시에 사랑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인간으로서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입니다.
분명 가슴 아픈 이별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테오도르의 상처는 아물 것임을 알려줍니다. 'her' 대신 'she'가 되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사만다를 가슴에 묻어둔 채 사랑으로 성장한 두 존재를 보여주죠.
오늘날 Chat GPT처럼 인간의 문맥과 말투, 배경지식 수준을 가까이 따라오는 AI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습니다.
아직 사만다처럼 자연스러운 목소리 구현까지는 어렵지만 현재 인터넷에서 논란의 주제인 'AI 2차 창작물'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의 나래에 그쳤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주 먼 미래는 아닐 테지요.
약간의 선정성과 쉽게 응원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사랑으로 인해 호불호가 조금 갈릴 수 있으나 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강하게 추천드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