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와 철학과 창조
앞서 영화로 보는 A.I - 上편에서는 빌런, 혹은 연인이 되어버린 인공지능들의 이야기를 하며 작품 「아이, 로봇」과 「그녀」를 소개했습니다.
이번에 이야기할 두 영화는 앞의 두 작품과 조금 결이 다른데요. 과연 내가 AI가 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AI가 된 기분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내가 AI가 되었다면. 기계 회로와 전선으로 이루어진 비인간.
인간이 창조를 시도한 이래로 꾸준히 우리를 닮아가는 인공지능을 보며, 많은 작품들은 AI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AI의 지능이 아니라 창조 욕구라고 했던가요. 차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인물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 단순히 수학 공식에 의해 산출된 답일 뿐이라며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이내 관객으로 하여금 반대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또 나는 어떻기에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1987년, 사이보그 경찰이라는 소재로 그 명성을 떨친 걸작. 폴 버호벤 감독의 「로보캅」입니다.
후속편들이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이 당연할 정도의 깔끔한 기승전결, 악랄한 범죄 도시 디트로이트를 표현하는 어두움과 고어함. 그리고 무엇보다 재치 있는 풍자와 주인공인 로보캅 그 자체로 보여주는 주제의식이 세련된 작품이죠.
「로보캅」의 줄거리는 디트로이트에 새로 전근 온 경찰 '알렉스 머피'가 갱단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사이보그 경찰인 로보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인데요.
어딘가 유치해 보이는 시놉시스지만 작품은 이 로보캅의 탄생에 얽힌 인간의 욕망,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기억을 잃고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행동하던 머피가 인간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건' 경찰이 아니야. 제품이지.
단순히 도시를 구할 천하무적 영웅이 아닌, OCP라는 기업으로부터 탄생한 로보캅은 말 그대로 알렉스 머피라는 희생양으로 제작된 상업 제품입니다.
작 중 그는 분명 범죄를 통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지만 OCP의 간부들은 로보캅을 그저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제품쯤으로 치부하며 정작 본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범죄를 저지릅니다.
인간을 점차 닮아가는 AI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오늘날, 마치 현재의 AI 기술들이 로보캅 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상상을 하게 되는데요.
점점 살아 숨 쉬는 인간과 닮도록 끝없이 발전시키고 설계하면서도, 결국 그 모든 탐구를 움직이는 이유 중에는 자본이라는 요소가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작 중 로보캅이자 머피 역시 지워진 기억을 되찾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사리분별을 해가며 인간성을 되찾아갑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살해한 갱단에게 복수하고, 또 자신을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OCP의 간부를 체포하려고 하죠.
만약 먼 훗날에 AI 로봇이 스스로를 인간, 혹은 그 무언가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똑같이 '기계'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 「로보캅」은 고어한 SF 액션과 그 뒤편에 심오한 주제의식을 심어둔 작품입니다. 알렉스 머피라는 인물은 비록 사이보그가 되어 다시 예전의 삶을 살 수는 없지만, "Robocop"이 아닌 "Officer Murphy"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번엔 조금 더 존재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 봅시다.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또는 나는 저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기준에 대해 고뇌하곤 했습니다. '테세우스의 배', 혹은 '모래 한 줌'의 역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얼마나 덜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얼마나 덜어내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될까요. 뇌를 제외한 모든 것이 기계로 바뀐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가요? 혹은 나의 기억과 정신, 성격을 안드로이드 로봇에 이식한다면, 나는 인간이 아닐까요?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1999년작 「바이센테니얼 맨」은 가정부 로봇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 NDS-114이자 '앤드류'가 마틴 일가에 들어오면서 점차 인간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앤드류는 처음 가동되던 시기부터 다른 로봇들과는 무언가 달랐는데요.
리처드 마틴 - 인간의 특성이 그(He)에게도 있습니다.
그(His)의 창의성, 호기심 등 말입니다.
로봇 회사 관계자 - 그(He) 요? 지금 로봇을 그렇게 지칭하신 건가요?
앤드류는 분명 조각을 즐기며 창작을 할 수 있었고, 다른 로봇들과는 달리 생각과 행동의 반경이 넓었습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여전히 그는 단단한 기계의 몸과 단순한 신경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란 '의지'였는데요.
생각을 하면 행동을 합니다. 무언가를 하던,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던 인간은 생각을 함으로써 의지를 갖고 행합니다.
「바이센테니얼 맨」의 앤드류도 로봇의 껍데기를 벗어나 인간이 되어 사랑을 하고 가정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만든 조각품으로 번 어마어마한 돈을 리처드에게 주며 "자유를 사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죠.
또 포샤라는 인간 여성과 사랑에 빠지며 점점 장기를 인간의 것과 비슷하게 바꾸고 신경 구조를 이식하고 감정을 느껴가며 인간과 흡사해지지만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는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포샤_왜 굳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해요?
앤드류_로봇 시절의 습관이죠. 인간에게 말을 듣는 게 좋아요.
마침내 기계로서의 불사의 운명을 버리고 인간처럼 죽음까지 자신의 몸에 이식한 앤드류. 그는 두 차례나 법원에 청원을 올리며 인간으로서 인정받기를 요청했지만 끝내 판결이 떨어지기 직전 미처 듣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영화 내내 앤드류의 여정과 희로애락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데요. 포샤는 눈을 감은 자신의 사랑, 앤드류를 보며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수고했다는 듯 그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괜찮아.
당신은 (자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거야.
자신이 복종해야만 했던 존재인 인간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인정은 못 받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이 필요 없어진 앤드류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 셈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인정이 필요 없어졌으며 내가 나일뿐(I am what I am)인 존재가치를 확립했다는 뜻이죠. 내가 인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불어넣어 주는 개념(로봇 시절의 습관)을 버리고 존재하기 위해 생각을 한 것. 작품이 주는 소중한 메시지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지능'은 단순히 지식수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것이, 당신이, 우리가, 그들이, 내가 무엇인지 아는 것.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나왔듯 인간은 기계의 발전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일자리를 뺏을까 봐, 혹은 세상을 지배할까 봐 등의 이유로 말이죠. 또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발전하는 AI 기술을 보며 경외심 내지는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아마 그것들이 거울처럼 우리를 비추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닐까요?
고도의 발전 끝에는 우리 스스로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기대와 공포. 인간의 그림자조차 닮아있다면 인간의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다음 질문은 기계들에게,
첫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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