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의 하드보일드
우리는 물질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유시장경제, 더 하는 만큼 더 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에 완벽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인간의 본성에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죠.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원하는 당연한 심리. 때문에 가끔은 돈과 인생의 인과가 반전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하드보일드 (Hard - Boiled) 장르의 영화들을 좋아합니다. 하드보일드란 '완숙'이라는 번역대로 굉장히 드라이하고 퍽퍽하게 연출된 영화를 말합니다. 특히 비극이나 범죄 사건을 건조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인데요.
목적성이 없는 돈. 넓은 관점에서 보면 물질을 위해 엉키고 할퀴며 도망치고 추격하는 이야기. 많은 작품들은 물질 중에서도 돈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주제의식을 전달하곤 합니다.
오늘은 하드보일드, 그중에서도 코엔 형제의 돈가방을 갖고 튀는 작품 두 개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반인륜과 가족, 눈과 피, 멀어도 가야만 하는 인간 - ★★★★☆
코엔 형제의 1996년작 「파고」는 그 시놉시스부터 굉장히 파격적입니다.
빚쟁이가 된 남자가 아내를 유괴해 장인어른에게서 몸값을 받아내려고 한다
제리는 평범한 샐러리맨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월급으론 턱도 없는 빚을 지게 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요.
처자식이 있던 그는 다름 아닌 아내를 유괴해 부유한 장인어른, 웨이드에게서 몸값을 받아내려 합니다. 제리는 아내를 유괴하기 위해 범죄자 두 명을 고용하고, 계획이 실행되자 웨이드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자식들이 경찰을 부르면 진(아내)을 죽인다고 했어요.
그리고 몸값은 저 혼자, 오로지 저 혼자만이 갖고 와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제리의 음모는 절대 순조롭게 풀려서는 안 되죠. 제리의 단순한 유괴 자작극은 자신이 고용한 두 범죄자, 칼과 게어가 자신들을 검문하던 경찰과 목격자를 살해하게 되면서 급격히 상황이 악화됩니다.
결국 연쇄 살인 사건이 되어버린 제리의 자작극은 만삭의 경찰관, 마지의 수사를 받기 시작합니다.
작품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였지만 단순히 사건을 수사하는 마지의 어드벤처가 전부가 아닙니다. 다정한 마지의 화가 남편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마지를 찾아온 옛 동창 등 영화의 서사와는 관련 없지만 우리의 삶에 짙게 내려앉은 크고 작은 비극들을 보여주는데요.
또 그러한 비극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비극이 없을 수 없는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심심한 조언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연출에 있는데요.
순수, 결백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하얀 눈밭 위를 피를 흘린 채 거니는 칼의 모습. 곧 태어날 생명을 뱃속에 두고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건 현장을 담담하게 조사하는 마지 등,
특히 눈과 피를 자주 함께 등장시키며 하얀 눈 위이기에 더 잘 보이고 두드러지는 붉은 피를 강조합니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소시지로 나열되어 있지만 이를 다루는 작품의 시선은 차가우리만치 건조합니다. 실제 노스 다코다 주의 지역이기도 한 '파고'는 축축한 눈으로 뒤덮여있지만 칼날 같은 바람에 갈라지는 피부를 긁게 합니다.
마지막 게어를 체포한 뒤 그에게 말하는 마지의 대사들도 무척이나 당연하지만, 앞서 보여준 드라이한 연출 때문에 더욱 그 메시지가 두드러지고요.
고작 그깟 돈 때문에?
(이런 비극과 혼란이.)
지혜는 떠드는 게 아닌 다물며 그 본질을 깨닫는다 - ★★★★☆
코엔 형제의 또 다른 하드보일드 명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사실 그 명성과 달리 줄거리는 꽤나 단순한데요.
우연히 갱단의 싸움 현장에서 돈가방을 입수한 퇴역 군인, 르웰린 모스가 살인청부업자인 안톤 쉬거와 추격전을 벌이게 되고 베테랑 보안관인 에드가 그 발자취를 쫓는 내용이죠.
그러나 하드보일드 장르답게 작품은 이 모든 추격과 죽음, 살인과 긴장을 건조하게 연출합니다. 앞서 말했듯 그러한 건조함은 장면 속 관객의 시야 반경을 넓혀 반대로 더 꽉 찬 미장센을 구현해 내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요.
일례로 안톤 쉬거가 휴게소에 들른 장면이 백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나 유혈 묘사가 없고 영화의 서사와도 크게 관련 없으나 작품의 모든 메시지, 즉 세상의 부조리함을 완벽히 표현한 장면이죠.
안톤이 방금 처음 만난 휴게소 주인을 살해하겠다고, 심지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의 죽음을 동전 던지기로 정하는 부분. 부조리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그 질문의 답이 없을 때 우리를 괴롭힙니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왜?를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게 세상이니까.
노인은 지혜롭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모 광고에도 나왔던 캐치프레이즈가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아니, 경험이 많다고 하지.
더 많은 삶을 살아오며 자연스레 축적된 더 많은 경험. 또 당연하게도 더 많이 습득하게 된 배움은 분명 사람을 지혜롭게, 슬기롭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 돈가방 하나에 목숨을 걸고 혈전을 벌이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몰이해처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퇴역하긴 했으나 여전한 실력으로 무시무시한 살인마 안톤과 호각을 이루던 모스는 안톤의 총이 아닌 갱단에 의해 허무하게 죽었고,
'재앙'의 의인화로 알려진 안톤조차 교통사고를 예측하지 못해 크게 다칩니다. 이에 그답게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죠.
어딘가 노련해 보이던 늙은 보안관, 에드 역시 모스, 안톤, 심지어 돈가방의 행적조차 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은퇴를 생각하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 그대로 우리의 세상은 몰이해를 필수로 동반하는 혼돈으로 가득 찼으니, 그들의 지혜는 무력감이 되어가고 경험은 혼돈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한 기억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또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돈가방처럼, 모든 사건의 중심이자 해결책이 될 무언가는 사용처가 정해지지 않은 돈뭉치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 혼돈 속의 논리를 찾아내려다 우리는 폭삭 늙어버리고 말겠죠.
지금까지 코엔 형제의 하드보일드 명작들, 「파고」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코엔 형제의 작품들은 분명 엄청난 매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블랙 미러 기법을 건조한 육포처럼 씹어댈 수 있도록 표현해 내는 게 강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드보일드는 자칫 지루하다거나 작품의 난해함이 배가되는 경우가 있지만, 숨 막히는 고요함과 섬찟함, 또 그 속에서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퍽퍽한 것들이 의미를 갖추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돈가방을 품에 안은 듯한 여운과 그 속의 것에 대한 탐구심을 손에 쥐게 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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