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1997
쉴 틈 없이 터져대는 플래시와 쌓이는 꽃다발! 나를 닮고 싶어 하는 수많은 팬들과 노후를 책임 질 정산금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미남미녀들의 황금빛 연예계 생활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비록 정신을 무너뜨리는 모욕과 우울감, 도파민 과다와 부족의 반복을 견뎌내는 그들의 삶이지만서도, 카메라 속의 연예인들은 그 존재만으로 큰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1997년 세상에 등장한 곤 사토시 감독의 장편 데뷔작 「퍼펙트 블루」입니다. 미소녀 아이돌 '참'의 멤버였던 주인공 '미마'가 배우로 커리어 전환을 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작품인데요.
강물의 흐르는 방향을 바꾸기는 너무 어려운 것처럼, 미마가 순수한 아이돌이길 바라는 스토커와 배우로서의 그녀를 가로막는 끔찍한 '업계의 사정'들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혹독한 시련을 주게 됩니다.
과연 우리의 미마는 세기의 여배우가 되어 성공해 낼 수 있을까요?
* 본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와 불쾌함을 유발하는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마는 아이돌 그룹 '참'의 멤버입니다. 아름다운 미모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미지. 인기 멤버이기까지 한 그녀였지만 소속사는 점점 시들해지는 반응을 이유로 미마를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 재데뷔시키려 하는데요.
때문에 미마는 반강제로 아이돌을 은퇴함과 동시에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오랜 매니저였던 루미도 이를 반대했지만 어른의 사정 앞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달리 없었죠.
한 편 미마의 은퇴를 반대하는 이는 또 있었는데요. 이름은 우치다 마모루, 속칭 '미마니아 (MIMAnia)'라고 불리게 되는 중증의 정신병자 스토커였습니다.
미마는 미마니아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으로 모자라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고, 심지어는 그에게 목숨의 위협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폭탄 테러)까지 받는 등 정신없는 나날을 이어갑니다.
동시에 그녀를 배우로서 성공시켜 수익을 기대했던 소속사의 사장, 타도코로의 계략으로 미마는 배우가 되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어야만 했는데요.
정신이 나날로 마모되어 가던 미마는 급기야 자신이 촬영하던 드라마와 현실을 혼동하기 시작하고, 미마니아가 운영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미마의 방' 사이트를 접한 뒤로는 아이돌 시절의 스스로를 환영으로 보기까지 합니다.
급기야 상황은 유혈사태가 벌어지며 극한으로 치닫는데요. 미마의 누드사진집을 촬영했던 사진기사, 노출 수위가 높은 장면을 연출했던 각본가가 차례로 살해당하며 미마는 결국 미마니아의 타깃이 자신이 될 것임을 짐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마니아는 아이돌로서의 미마를 지키기 위해 여배우 미마를 찾아내 죽이려 드는데요. 혼란과 고통이 교차하던 일촉즉발의 순간, 미마는 가까스로 상황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아리송할 뿐.
빛나지만 길을 밝혀주는 건 없는 도시. 미마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매니저 루미의 차에 탄 채 아직 넋이 나간 채로 서글픈 표정을 짓습니다.
미마의 방으로 갈게.
- 루미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으리라 믿었던 미마는 여태껏 몰랐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되는데.
작품은 의도적으로 거울, 텔레비전, 포스터, 액자 등 사각형의 오브젝트를 등장시키고, 또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각의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를 유도합니다. 이는 작품 내・외적인 부분 두 가지로 해석될 수가 있는데요.
작품 내에서 미마는 스타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은밀한 사각지대 속에 갇힌 인물이죠. 누구나 미마를 알고 있지만 그녀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텔레비전, 잡지, 카메라 앵글 속일 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의 사각지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습관, 사랑, 심지어는 은밀한 사생활까지 탐닉하고 싶어 하는데요.
나는 혼자 있을 때 진짜 내 모습이 나온다
라고 말하던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사실 우리라고 크게 다른가요? 우리는 타인과의 여집합 속에 '나'를 숨겨두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잖아요.
작품이 주는 공포감, 허를 찌르는 불쾌감은 이 부분에서 출발합니다. 미마의 사각지대를 향한 침입을, 또 다른 사각형의 스크린으로 방관하기만 해야 하는 상황. 미마가 '나'를 숨겨둔 여집합이 찢어지고 왜곡될 때마저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미마를 인형처럼 사용하며 사각지대를 침투하는 다른 인물들의 시선, 욕망 때문에 그녀는 정신착란을 겪으며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이는 호접지몽을 연상케 하는 곤 사토시 감독의 천재적인 연출을 통해 결과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죠.
이는 「퍼펙트 블루」의 작품성을 크게 끌어올린 요소이기도 합니다. 스크린 속을 눈으로 헤집던 우리는 덩달아 미마의 불쾌한 정신착란에 이입하며 대체 뭐가 뭔지, 뭐가 맞고 틀린 지 헷갈리는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작품의 외적으로는 시대를 막론하는 엔터 업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당시 성인, 미성년자 할 것 없이 만연해있던 누드 사진집이라던지, 오늘날까지도 마치 봉제인형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사람들.
특히 일본은 80년대를 거쳐 폭발적으로 증가한 미성년자 성인물이 무려 90년대까지 지속되는 등 그 음지가 오래도록 자리를 잡았었는데요.
따라서 우리는 그 시대를 경험했든, 경험하지 못했든 「퍼펙트 블루」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괴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 부정적인 여론에 시달려 깊은 우울감에 빠지거나 엔터테이너로서의 커리어가 '나'의 삶을 망치는 등 가깝지만 익숙지 않은 얘기들이 가득합니다.
「퍼펙트 블루」는 히치콕의 「사이코」 만큼이나 훌륭한 사이코 스릴러 명작입니다. 붉은색을 활용한 메타포라던지,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관객을 휘감는 편집과 기이한 OST 등 취향에만 맞는다면 작품이 주는 불쾌함의 긍정적인 여운에 젖을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데요.
특히 작품 내내 미마, 관객 모두를 압박하다 마지막에 주는 거대한 반전은 충격적인 엔딩 시퀀스와 맞물려 정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작품에 전반적으로 깔린 사건들은 곧이어 현실에 가까워지는 듯합니다. 삶에 사각지대를 하나씩 만들어두는 모든 사람들. 그 속에서는 남지 않는 증거와 희미해지는 죄의식을 근거로 '나'가 진정으로 활동하곤 하는데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양극화, 작은 휴대폰 화면 속 SNS 너머로 보이는 크디큰 열등감.
앞서 언급했듯 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들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화면 너머에서 웃고 있는 그들이 광대로 느껴지든, 우상처럼 느껴지든 화면의 안과 밖에서 '나'를 지키려는 발버둥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연예'의 '연'은 '연기하다'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셨나요?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 평생 연예생활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얼굴을 비추는 화면과 활동 중단 위기에 놓인 '나'.
수많은 구설수와 내 빛나던 과거를 강요하는 스스로를 이끌다 보면 우린 벌써 다 왔습니다. 다음 스케줄에 가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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