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부르는 이별노래

by 박순영

경혜는 오랜만에 <호랑이손님>을 ott로 다시 보고 싶어진다.. 예전에 영화관에서 보았을대 꽤 깊은 인상을 남긴터라 이번 영화리뷰는 이 작품으로 가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최대한 편한자세로 예전에 본것을 복기해가면서 찬찬히 다시 감상한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벨소리가 조금은 짜증스럽다..

액정을 본 그녀는 발신자를 보고는 헉, 하고 숨이 멎는다.

3년전 자신을 무참히 배반하고 떠났던 동욱이 전화를 걸어온것이다. 그녀는 이걸 어쩌나,하고 망설이기만 한다. 수신거부를 누르기에는 그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았고 통화버튼을 누르자니 무엇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그녀가 그렇게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는 사이, 전화벨은 끊어진다.



동욱은 "너라면 끔찍해. 다신 나타나지마!"라고 소리치고 그녀를 버린 남자였다. 경혜의 10평 오피스텔 킹 침대에서 같이 뒹굴던 그 동욱이 아니었다. 지방 강연도중 만난 이제 갓 여대생티를 벗은 '그녀'에게 빠져버린 동욱은 그야말로 '헌신짝처럼' 오랜 연인인 경혜를 버린것이다. 경혜는 마치 자신이 3류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자기보다 나은 여자'에게 빼앗겼으면 그토록 마음을 다치지 않았을텐데,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문학 소녀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집안 배경이 짱짱하다거나 대단한 형제들이 있거나 한것도 아닌 홀홀 단신,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동욱의 '포스트모던 소설에서 해체의 문제'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고는 동욱의 예전 소설책에 저자 사인을 받으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동욱의 외도, 그녀의 임신, 그리고 동욱과 경혜의 파경.

"한번만 더 더생각해봐"라며 울며 붙잡는 경혜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고 그렇게 동욱은 그녀의 오피스텔을 떠나갔다. 그리고는 3년.



곧 다시 울릴거 같던 그녀의 전화기는 고집센 초로의 여인처럼 완강하게 침묵하고 있다. 무슨 일일까... 하다가 경혜는 고개를 저어버린다. 술먹고 한번쯤 생각났겠지...하면서 그녀는 아예 폰 전원을 꺼버리고 <호랑이손님>을 이어서 시청한다.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 둘다 작가지망생, 그러나 그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여자쪽의 계획적 만남으로 드러나고...그래, 이랬지...아, 호랑이...라면서 경혜는 절반이상의 분량을 보고는 리뷰가 가능하다 판단돼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마침 마감도 임박한터라 끝까지 다 보고 썼다가는 편집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뷰는 한두줄 쓰고나면 막히고 커저로 블록을 만들어 날린 뒤 다시 쓰고를 반복했지만 결국 써지지 않았다. 그러는데 그녀의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진다. 하필....그러면서 그녀는 욕실로 달려간다. 생리가 시작되었다.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앞당겨 찾아온 그야말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생리를 할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여자로 태어난게 말할수 없이 짜증이 나고 때로는 열등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패드를 아래에 대고 시뻘건 변깃물을 내리고나니 약하게 현기증이 몰려온다. 이런다니까 꼭...하면서 그녀는 욕실에서 나와 동욱과 함께 뒹굴고 섹스하고 꼭 껴안고 자던 그 널따란 침대에 털썩 몸을 내던진다. 아...이번 리뷰는 안되겟다고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번씩이나 본 영화의 리뷰조차 쓰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이 한탄스럽기만 하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녀는 다시 노트북과 마주하고 문서창 텅빈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동욱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선다.

"내 수건 아직 있나?"하며 그는 윗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욕실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경혜는, 3년만에 나타난 동욱이 마치 자기집처럼 오피스텔을 휘젓고 다니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해서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경찰에 신고를 하려하는데 그순간 동욱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폰을 뺏어 던져버린다.

"쓸데 없는짓 하지 마라"라는 경고를 던진뒤 동욱은 욕실로 들어간다. 곧이어 그의 오줌누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그리고 샤워물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경혜는 야릇한 평화와 안정감을 느낀다. 생리로 인한 아랫배의 통증도 잠잠해지는 느낌이다.

녀는 노트북 액정에 글자를 쳐나가기 시작한다. 제목은 <호랑이 손님> 부제는 <겨울에 부르는 이별노래>라고 친다. 그리고는 프랑스 작가 a의 소설속 한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첫문장을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이별하기 위해 잠시 함께 한다.."

그렇게 그녀가 신들린듯 리뷰의 반 정도를 썼을때 동욱이 욕실에서 나온다. 그는 완전히 알몸인채로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고 있다

"욕실에 드라이기 어디갔어?"

그말에 경혜는 자동인형처럼 화장대서랍에 넣어둔 헤어드라이어를 건네준다. 그러자 그는 무표정하게 그걸 받아 전원을 꽂고 머리를 말린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경혜는 남은 리뷰를 마저 쓰기 시작한다.

"애가 컸겠네 이젠?"라는 경혜의 질문에

"유산됐어. 나올때 다 돼서"라고 그가 대답한다.

그말에 경혜는 동욱의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난생처음 타인에게 느껴보는 연민같은 것이었다. 동욱으로하여금 자신을 무참히 버리게 한 '그녀'였음에도 이번만은 밉지가 않았다.

"둘이 그래서 헤어진거야?"라며 그녀가 담배를 한개비 물며 물어본다.

"몰라...말 안해"라고 동욱이 말한다. 그리고는 헤어드라이어 전원줄을 난폭하게 잡아빼더니 드라이기를 침대에 던져버린다.

"나 배고프다"라는 그의 말에 경혜는 그가 늦은시각에 먹는 '가락국수'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해줄까 우동?"

"좋을대로.."라며 그는 졸린듯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자고 있는 동욱의 곁에서 경혜가 끓인 가락국수가 식고 있다. 자는 그를 살짝 흔들어 봤지만 그는 귀찮은듯 등을 보이고 모로 돌아눕는다. 해서 경혜는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는 리뷰의 마지막 문단을 써내려간다. 마법이라도 걸린것처럼 글은 술술 써진다. 그리고는 마침표를 힘주어 찍고 그녀는 빠르게 오탈자와 어색한 문장을 집어 낸 뒤 편집장의 이메일주소로 송고를 마친다.


원고가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이 이처럼 홀가분하게 와닿은 적도 없다. 그리곤 자고 있는 동욱의 옆에서 다 식어버린 가락국수를 집어 전자레인지로 가져가 잠시 덥힌뒤 경혜는 허기진듯 먹어치운다. 그러다 힐끔 쳐다본 창밖으로 오랜만에 눈이 내린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로 눈을 돌린다. 예전 동욱과 함께 뒹굴던 그 침대가 지금은 텅 비어있다. 그래도 그녀는 마치 그가 있는것처럼 시트를 가지런히 하고 베개를 탈탈 털어 두개를 나란히 붙여놓는다. 그리고는 "자?"하고 독백처럼 중얼거린뒤 널따란 침대의 한켠을 차지하고 누워서 마치 동욱이 옆에 있기라도 한듯 그의 베개를 어루만지다 그속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는다.그리고는 죽음같은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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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이 떠올라서 써보았습니다. 조만간 리뷰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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