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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Oct 22. 2022

소설 <다음세기의사랑>

딱 좋을 때 끝내는거,  그게 관건이다 요즘은

 


  소연은 자기눈을 의심했다. 자기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커플 중 남자가 분명  기석, 한기석이었기 때문이다.

 “놀랬어?”

  그가 틀림없다. 소연은 자기도 모르게 휘청한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라며 기석 옆의 앳된 여자가 운을 떼온다.

  “ 나 장가간다”

 하고 기석은 씩 웃는다.

 소연은 왜 하필 나, 라는말이 나올 뻔 하는걸 억지로 참는다.

“너 웨딩 플래너 한다는 얘길 들어서 SNS뒤졌어”하고  기석은 옆의 여자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주고받는다.

  부담되냐는 기석의 말에, 부담은 무슨, 하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소연. 그옆의 여자는 자신을 나래라고 소개한다. 강나래. 이름만큼이나 여리고 고생없이 자라온 티가 확 나는 그런 타입의 여자였다. 얼추, 이제 갓 20대 중반을 넘어선걸로 봐서 기석과는거의 10여년의 차이가 나보인다.

  “너 시집은 갔구?”

 하고 기석이 자기앞의 차을 마시며 농처럼 흘린다. 소연은 대답 대신 살짝 보조개를 파며 웃어보인다. 소연은 아침에 지하철에서 읽은 무료 오늘의 운세가 생각났다. 오래전 인연과 재회하지만 실속은 없다, 어쩜 이렇게 딱 맞을까....

  “젤 중요한거 스드메라고 하던데..” 하며 나래가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우리 스몰웨딩좀 해주라” 하고 기석이 보란 듯이 나래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둘의 애정을 과시라도 하듯이. 그러자 나래가 살짝 기석의 어깨에 머릴 기댄다. 누가 앞에 있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스몰웨딩이라고 딱히 더 싼것도 없다고 하자 기석은 정말? 하고 놀라는 눈치다. 뭐든 니즈가 늘어나면 다 비싸진다는걸 정말 이들은 몰랐을까, 싶다.  잠시 자료를 가져오겠다며 소연은 그자릴 뜬다. 그리고는 스몰 웨딩에 적합한 호텔이며 야외식장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이며, 왜 하필 나를 골랐을까, 하는 의구심에 빠진다.          

  5년전, 소연이 대학 4핚년 1학기때, 인턴으로 6개월 근무한 식품회사 J의 마케팅부에서 기석을 만났다. 기석은 이미 대리직급을 달고 있었고 어리버리한 인턴들에게 꽤나 까탈을 부리는 그런 선배였다. 마케팅 부서인 만큼 현장 실습이나 자료조사가 필수였고 심지어는 자사 마트에서 판매일도 해야 했다. 오전 오후조로 나뉘어서 번갈아 마트 일을 하며 소연은 내가 이런일이나 하러 식품회사를 지원했든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마트일이란게 막노동이나 다름없었다. 매대정리, 진열, 청소, 기타...그러고 나서 회사에 복귀하면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엑셀창이 떠있는 모니터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럴수록 기석은 자료보고서를 빨리 제출하라고 몰아댔고 , 내 이놈의 회사, 정직원 발령이 나도 안다닌다 저인간땜에, 하며 소연은 누구보다도 기석을 미워했다. 이제 갓 서른 남짓해보이는데 저런 꼰대짓이나 하고 ,하며, 근무가 끝난뒤 인턴끼리 모이는 술자리에선 제일 많이 기석의 뒷담화를 해댄게 소연이었다. 그때 누군가 한말. 그러다 정든다...

  정말 정이 든걸까. 인턴기간이 다 끝나갈 즈음, 기석은 단체 회식이 끝난 뒤 같은 방향이라며 택시를 합승하자고 소연을 끌었다.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이었기에 소연은  그 밤에 들를 데가 있다며 뿌리쳤지만, 기석이 그 어리숙한 거짓말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불콰하게 술이 오른 둘은 합정동으로 가는 택시에 동승했고, 그 날 처음으로 기석은 조심스레 소연의 손을 잡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며 소연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동안 나 땜에 많이 섭섭했죠? 하며 깎듯이 경어를 쓰는 그에게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이후로 기석은 남의 눈 따윈 아랑곳없이 회사내에서도 소연을 챙겼고 둘은 공공연한 연인 사이가 됐다. 하지만 일처리에 있어선 이전과 다름없이 냉철한 기석을 겪으며, 소연은  이 사람의 진짜 얼굴은 뭘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열명의 인턴중 단 하나만이 사원으로 채용됐고, 소연은 그 하나가 되지 못해 학교로 돌아가게 됐다. 그 마지막 근무날, 기석은  서운하기라도 한 듯 소연에게 자기가 직접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며  자기 오피스텔로 소연을 데려갔고  파스타를 대접했다. 그리고는 와인, 덴마크의 록그룹 MLTR의 노래를 틀어주었다. 마이클 런스 투 록, 이게 이름이예요? 잼있네, 하고 소연이 와인잔을 비우자 기석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10평 공간에서 그들은 첫밤을 보냈고 다음날 소연은 잠결에 들은 것 같다. 널 사랑해,소연아. 하는 기석의 속삭임을.

  그리곤 소연이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기석은 퇴근하면 곧잘 소연이 있는 도서관 3층으로 찾아오곤 했다. 예전에 친구가 다닌 대학이라며 이곳저곳을 잘도 알던 기석. 그런 그와 학교앞 호프집에서 배부르게 맥주를 마시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교 뒷산에서 진한 입맞춤을 하던 시절....

  하지만 어느날 부턴가 기석이 소연을 찾는 횟수가 줄기 시작하고 그럴수록 소연은 초조해서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럼 기석은 예의 깍듯하고 애정어린 음색으로, 신제품 출시로 바빠서 틈을 못냈다,며 내일은 간다, 며 위로하곤 했다. 하지만 다음날이 돼도 기석의 모습은 소연의 눈엔 안들어왔고 다음주도 그 다음주도 , 그렇게 시간은 허망하게 흘러갔다. 몇 번을 그의 회사앞으로 갔던 소연이지만 차마  전화를 하지 못했고 그저, 한순간의 연심이었나보다, 하고 마음을 접어야했다. 그길밖에 없다고. 지금은 더 이상 연애 따위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고. 곧 졸업이고 어디든 취직을 해야했다. 재래시장 한귀퉁이에서 과일이며 채소를 파는 노모 때문만도 아니었다. 왠지, 자신이 세상에 농락당했다는 느낌, 그 비슷한 무엇이었다. 어떻게든 되갚아 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곤 기석의 아이를 지웠다. 기석도 모르는 그의 아이. 태어났음 완.이라 이름 붙여졌을 그 아이를..     


   기석과 나래는 비용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아무리 조언해도 끝내 스몰웨딩을 고집했고 소연은 그에 맞는 야외식장을 컨택해 줬다. 그리곤 그날밤, 집에 돌아와 쓰러지듯 노모옆에 누웠다. 내가 뭘하는 걸까....노모는 초점없는 눈을 껌뻑거리며, 밥을 달라고 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노모의 밥타령은 계속 됐고, 아까 먹었잖아 엄마, 하고 되풀이 대꾸를 해도 노모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처음 노모가 치매 증세를 보인건, 숫자에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되지않아 임시로 학원강사를 할 때, 퇴근하고 들어와  보면, 노모는 어디선가 싸구려 옷들을 잔뜩 사다놓고 했다. 또? 하고 소연이 짜증을 내면 노모는, 다 해서 300원이다, 하곤 웃어보였다. 왜 그때 몰랐을까...3000원을 300원이라 인식한 그 노모의 두뇌가 병들어가고 있음을...노모는 그렇다고 집나가 길을 잃거나 하진 않았다. 

  대소변도 정확히 가렸고 다만 숫자에서 혼돈을 겪는 정도였다. 그래선가, 병원을 찾을 생각을 소연은 하지 못했다. 노모는 그렇게 1년여를 견뎠고 어느날부터, 밥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명절이라고 집에 온 언니 지연이 그걸 보곤, 의사한테 데려가라고 했든가. 그렇게 한참 늦게 간 정신과에서 노모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그리곤 그날, 사전에 그 어떤 언질도 없이 소연은 강사 일에서 잘렸다. 아이들이 지루해 한다는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남은 수고비”는 이틀뒤에 입금하겠노라고 원장은 악수까지 청했다. 잘살라고. 하지만 약속한 이틀이 지나도 체불된 월급은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한달치를 떼인채 소연은 백수로 돌아가야겠다. 

  노모의 증세는 더더욱 심해져갔고 소연이 하루종일 면접이며 일자릴 찾아 헤매고 돌아온 날, 노모는 방에 없었다. 그야말로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 소연은 미친년처럼 노모를 부르며 비탈길을 샅샅이 찾아 헤맸고 날은 빠르게 어두워져 갔다. 겨울 초입이라 바람은 제법 낮고 강하게 불어댔다. 그런데도 소연은 춥다는 생각도, 자신의 몰골이 지금 엉망이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엄마, 만을 되풀이하며 산동네를 이잡듯 뒤졌다. 그러나 노모는 보이지 않았고..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경찰서라고.... 노모는 거기서 당직 경찰과 함께 자장면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가 길을 잃으셨네요.     

  어딨드라...하며 소연은 언젠가 기석과 강원도에 당일치기 여행을 가서 사온 목각 인형을 찾았다. 버리지 않았는데 어디 뒀더라....하며. 클림트의 “키스”를 연상시키는 두남녀의 진한 키스를 형상화한 조금은 조악한 세로 30이 조금 넘는 아담한 조각상이었다. 기석은 여기까지 와서 왜 싸구려를 고르냐고, 비싼걸 사주마, 했지만 소연은 왠지 그 조각에 눈이 갔고 꼭 가져야만 할거 같았다. 기석은, 정말 개취네, 하며 그걸 2만원에 사줬다.

  그는 갔지만, 조각은 버리지 않았어, 하며 소연은 방안을 샅샅이 뒤졌다. 밥 타령을 하던 노모는 어느새 쓰러져 잠이 들고 소연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렇게 소연은 조각을 찾으며 밤을 다 보냈고 동이 틀 때야 겨우겨우, 옷장 깊숙이 묻어둔 걸  발견했다. 이걸 왜 여기다 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자연스레 시선이 자는 노모에게로 향했다. 엄마가? 아님, 내가 언제 넣어두고 까먹은걸까...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소연은 조각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늦은 잠을 청했다. 밖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이렇게는 잠이 오진 않을거라는 걸 소연은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아이를 지웠던 날도 이랬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무허가 산부인과에서 긴가민가하는 낙태를 하고 휘청이며 올라오던 언덕길, 그리고 쓰러져 누운 이 방.     

  얼마전부터 드디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노모의 기저귀를 갈아 쓰레기통에 버리던 소연은 그곳에 버린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각, 싶은 마음에 소연은 쓰레기통 속에 손을 넣는다.      

  “제가 사겠습니다”

  요즘은 여자들도 “ㅂ니다”,를 많이 쓴다. 하지만 닉네임으로 봐선 남자같다. 닉네임이 ’야옹‘ 이었다. 아마 반려묘와 사는 남잔가보다 ...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픽업해도 되겠냐며 선입금을 원하면 해주겠노라고 야용은 챗을 한다.

 “아뇨, 선입금 안받아요. 어차피 안 하심 돌려드려야 되는데..”

 “ 모르시는군요. 개인간의 거래도 법적 효력이 있어 안돌려 줘도 되는데”

 누군가에겐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의 충동적으로 중고장터 “살림”에 내놓은 게 한시간도 안돼 ’픽‘이 된 것이다. 막상 타인의 손에 이게 넘어간다는 생각을 하자 소연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괜한 짓을 했구나. 그냥 버릴걸...아무 쓸모도 없는걸....     

  마침 다음날은  주말이어서 소연도 시간이 널널했다. 야용은 약속한 시간 정확히 소연의 집앞에 나타났다. 좁은 언덕을 오르게 하는게 미안해서 소연은 아랫동네서 만나자고 했지만 그런 수고를 끼칠 순 없다며 그는 굳이 차를 세워두고 비탈을 걸어 올라왔다. 얼핏봐도 키 180은 넘는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 비록 마스크를 썼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정한 미남형이라는 걸 소연은 알수 있었다. 

  “죄송해요 올라오시게 해서”

  “아뇨”

  하고 그가 웃는다. 아마 웃었을거다 마스크 뒤에서. 소연은 조각상이 들린 작은 쇼핑백을 그에게 건넨다. 야옹은 “감사합니다” 하곤 대뜸 만원짜리 석장을 내민다. 이게 뭐라고 3만원이나...피식, 소연은 웃음이 나오는걸 겨우 참는다. 설마 나가랴, 하고 세게 책정한걸 한푼 깎지도 않고 그가 산다. “잘 쓰겠습니다” 하고 상대가 꾸벅 인사를 한다. 대체 뭐에 저걸 쓴다는 건지....그렇게 1.2분의 시간이 흐르고 둘은 헤어졌다. 빠른 걸음으로 그가 사라지는걸 지켜보다 소연은 돌아서 원룸 계단을 오른다..뭘까 이느낌은.


  그리곤 그날밤, 휴대전화 문자 메신저  친구 화면에 야용의 얼굴이 떠있다. 처음엔 누구지? 하던 소연은 그 얼굴을 클릭한다. 분명 아까 그 남자다. 메신저 속의 남자는  소연이 상상한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하면서도 의지가 굳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큰 눈망울에 도톰한 입술, 웃는게 민망했는지 조금은 애매한 표정. 

  패밀리 레스토랑 정도로 보이는 배경에, 셀프카메라가 아닌 걸 보면 애인이 찍어준 것일 수도 있다. 내 짐작이 맞았어. 이런 사람이었구나...빨려들 듯 소연은 그 사진을 쳐다본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남자는 얼굴만 띄워놓고 아무 말도 없다. 아마, 어젯밤,  거래전에 상대방 얼굴이라도 확인하려고 들어온 것이리라. 

   그러고보니, 중고챗 말미에 소연이 자기 전화번호를 준 게 떠올랐다. 집 찾기가 쉽지 않을수 있으니 그땐 전화를 달라는 뜻이었으리라. 그 번호를 남자는 자기 휴대전화에 저장했을테고 그래서 자동으로 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단 들어오면 상대의 프로필이며 메신저 스토리를 볼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 망할놈의 디지털시대. 소연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친구등록을 마치고 그의 프로필 사진들과 스톨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이 웃기고 조금은 못나고 그리고 어쩌면 슬프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그렇게 너랑 헤어지고 나도 방황했어 ”

  기석은 어느날, 나래 없이 혼자 소연을 찾아 가까운 까페에 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자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어쩌다 웨딩 플래너가 됐냐는 시덥잖은 질문을 그가 해댄다. 뭐가 어때서, 라고 발끈하는 자신을 추스르며 소연은 말없이 커피를 홀짝인다.

  “너 하나도 안변했어”

  하고 기석은 나래와 함께 있을때는 볼 수 없는  은밀한 시선을 보낸다.

   “결혼 다 돼가는데 이렇게 나 만나두 되는거야?”

   소연은 끝까지 아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벌써 몇 년전인가. 어쩜 그렇게 죽은 아이 때문에 자기 인생이 안 풀린다는 생각을 여러번 하기도 했다. 너 때와는 느낌이 달라, 기석은 말을 이어간다. 그냥, 아는 선배 소개로 소개받고 밥 두어번 먹고 그다음에 자고, 그리고 청혼과정도 없이 결혼하게 된거야,

   마치 꼭 변명을 해야 하는  매맞는 아이같은 얼굴로 기석은 나래와의 결혼 과정을 드문드문 이야기했다. 당신 아이가 있었어. 이 뱃속에...그러나 아이는 발화되지 않는다.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다. 소연은 죽을때까지,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다 다짐한다.

  “누구, 좋은 사람은 있구? ”

  기석이 슬쩍 운을 뗀다. 왜, 없음 소개시켜주려구? 하고 소연이 맞받아친다. 그럴수도 있지. 소개시켜줘? 기석이 자기 휴대전화를 뒤적인다.  마땅한 사람을 찾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됐네요. 있어 나도. 하고 소연은 있지도 않은 가상의 연인을 들이댄다. 그럼 그렇지, 하고 기석이 전화에서 손을 뗀다. 그의 손, 소연을 더듬고 애무하고 자신의 음경을 소연 안으로 힘껏 집어넣던 그 손이다. 소연은 그 손이 너무 희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유산자의 손. 

  “결혼할거야? 해야지 너두”

  그말에 소연은,야옹의 얼굴을 떠올린다. 크고 선한 눈매, 도톰한 입술, 오똑한 코...건장하고 다부진 체구. 그 정도면 기석에게 꿀리지 않으리라 자신한다. 

  “좋은 사람이야. 인물도 좋구. 무엇보다, 신의가 있는”

  그말에 기석이 고개를 떨군다. 신의. 그게 없었다는 책망일까, 기석은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른다. 

 “일어나자 그만. 나 나래씨한테 오해받고 싶지 않아. 그리고 회사규정도 있고”

 하고 소연은 자릴 박차고 먼저 까페를 나오려는데 기석이 그녀의 한팔을 잡는다. 이럼 안되잖아,라는 눈빛으로 소연이 기석을 돌아보자, 그가 망설이다 내뱉는다.

  “나도 좀 찾아봤는데. 거기가 좀 비싼거 같아서”

  소연은 기가 차다. 스몰웨딩을 고집해서 컨택해 준 야외식장이 비싸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옛애인앞에서..

   “좀 디스카운트 안될까? 장소는 좋은데...”

  그말 하려고 보자고 한거야? 하고 내지르려다 소연은 자기를 추스린다. 더는 안돼. 그래도 당신이라서...

  “당신?” 하고 기석이 히죽 웃는다. 

 아, 내가 왜 이런 남자를 상대하는 걸까, 하며 소연은 그대로 까페를 뛰쳐 나온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소연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신호등 바뀌는 소리에 무작정 사람들을 따라 건넌다. 그게 회사 반대 방향이란 것도 모른채.          

  그는 여전히 메신저창에 떠있다. 기석처럼 자길 버리고 어딘가로 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소연은 고맙다. 말을 걸고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두자 썼다 지우고를 반복한다. 비롯 마스크를 썼어도 상대가 한참 연하라는 정도는 첫 느낌에 알수 있었다. 내가 지금 뭘하는 거지, 하고 소연은 메신저창을 닫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노모가 다시 발작을 한다. 바깥에 ‘그놈들’이 왔다고. 문을 꼭 잠그라고 채근한다.  복불복으로 오는게 치매라지만 소연의 생각은 달랐다. 평생 외도를 일삼다 못해 꺼떡하면 조강지처에게 폭력을 휘두른 그남자,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 남자를 평생 남편이라 여기고 헤어지지 못한채 자식들에게 깊은 상흔을 안긴 건 어쩜 아버지가 아닌 엄마였을지 모른다고 소연은 생각한다.

  그런 남편이 70을 넘기자마자 중풍을 맞고 그제서야  그는 조강지처에게 돌아왔다.  그런 남편을 노모는 정성으로 돌봤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선 늘 같은 소리가 되풀이됐다. 너하곤 안산다. 넌 계집도 아냐.  

  그러던 남편이 세상을 뜨고 자식들은 하나같이 노모에게 말했다. 이젠 편하게 사시라고.  괴롭히던 존재도 갔으니 부디 편하시라고. 그러나 그때부터 노모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망령에서 벗어난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한 악령에 씌운 사람같았다. 무섭게 돈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날로 포악해지고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거친 언사를 내뱉곤 했다. 

  그때마다 소연은 그런 노모를 이해하려 했지만 노모는 자식 따윈 상관도 하지 않는 듯 혼자만의 척박한 황야를 걸어가는 형상이었다. 험준한 노년의 고개를 노모는 그렇게 혼자서 넘고 있었다.

 노모와 자신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소연은 생각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해본다.          

  “오빠가 먼저 권했어요.언니한테 부탁하자고” 

   하고 나래가 입을 연다. 드레스를 정하고 나오면서 그녀가 내뱉은 말. 오빤 아직도 소연언니  좋아해요. 여자 육감, 맞잖아요.

   이 둘은 대체 뭔가, 라는 생각이 소연을 피곤하게 한다. 헤어진, 아니 지가 버린 여자에게 일거릴 주자고 했다는 얘기다. 소연이 학원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다 우연히 웨딩 플래너를 하는 대학 선배를 만난 게 계기가 돼, 그곳에서 2년 정도 일한 뒤, 선배가 살림만 하겠다며 회사를 접자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것이다. 

  그러다 펜데믹이 시작됐고 결혼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거의 폐업 지경에 이르러서야 위드코로나로 규제가 완화되면서 연기되고 취소됐던 결혼식이 다시 계약이 잡히고 전직을 꿈꾸던 플래너들은 다시 한번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 소연도 휩쓸려온 것이다. 

  “좀 불편해요. 다 지나간 일인데”

   소연이 대꾸하자 나래는 물끄러미 소연을 바라본다. 자기가 더 좋아한다고. 도대체 이 둘의 끝은 어딘가,라는 생각이 든다. 피곤하다 이 둘. 왜 나여야 했어요? 소연은 묻고 싶지만 포기한다. 싸구려 드라마같은 이 상황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래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 H호텔앞에 그녀를 떨구고 소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엑셀을 밟아댔다. 집에 가자....   

       




   야옹은 그새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10대 후반, 아님 20대 초반, 석양 무렵 들판에 누워 찍은 것이다. 누가 찍어줬을까, 생각하며 소연은 피식 웃는다. 오늘은 노모도 어쩐지 조용하다. 밥 달라는 얘기도 안하고 기저귀가 젖었을텐데 불평도 안한다. ‘그놈들’ 타령도 오늘은 않는다. 소연이 출근해 있는 동안 요양보호사를 쓰기로 해서  생활도 어느정도 안정세에 접어든 느낌이다.      

  20대 초반의 그는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고 석양에 눈이 부신 표정을 짓고 있다. 요즘 소연의 낙이라면 틈틈이 메신저 창에 들어가 야옹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는 삼,사일에 한번씩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상태 메시지도 바꿨다. 마치 소연을 의식한 듯. 

   그러다 소연은 그가 내놓은 중고물품들이 궁금해진다. 해서 “살림”에 오랜만에 들어가서 그의 닉네임을 클릭한다. 그는 이것저것 세간살이를 내놨다. 침대, 2인소파, 레인코트. 그리곤 유명 커피 체인점의 머그잔도 여러개 나와  있는게 보인다. 그가 받은 거래 후기까지 꼼꼼이 읽는다.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맙다, 인상이 좋다, 이쁘게 입어라 등등. 인상이 좋다,라는 구절에서 소연은 질투를 느낀다. 내 남자가 내 허락도 없이 이여자 저여잘 만나고 다닌 느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연은 “살림”창을 닫는다. 내가 뭘 하는거야.          

   “뭐 어떠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혜란이 웃는다.  펜데믹 이후로 얼굴 보기가 어려워진 혜란을 거의 1년만에 만난 소연은 망설이다 야옹의 이야기를 하며, 다 좋은데, 좀 어리다,고 투덜댔다. 혜란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치과의사와 결혼해 지금은 아이 둘을 둔 어엿한 전업주부다. 남편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아보였고 무엇보다 혜란 자체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거 같아서 그게 보기 좋았다. 

   내친김에 소연은 야옹의 캡처한 사진을 혜란에게 보여준다. 혜란은 탄성을 지른다. 어머, 넘 잘 생겼다...홀릴만 하다. 근데 예, 얼굴값 하면 어쩔라구. 하며 소연에게 눈을 흘긴다. 무엇보다 니가 다시 밝아진 거 같아 좋다고 혜란은 스스럼없이 말한다. 근데 아직 이름은 모르구? 혜란이 묻는다. 그러게...그냥 야용이란거 외엔...     

  그날밤, 소연은 자기 전 세수를 마치고 얼른 메시저 창을 띄운다. 그런데 그가 사라졌다. 아니 여전히 떠있는데 프로필에 아무것도 떠있지 않다. 무슨 뜻일까, 소연은 의아하다. 나와의 관계를 그만 정리하자는 얘길까, 하며 소연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느낀다. 보통 이런 기본 프로필이 뜨며, 상대방 친구목록에서 자신이 삭제됐을 때라고 검색창엔 똑같은 말들이 떠돈다.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소연은 그날밤 잠 한숨 이루지 못한다...     

  기석과 나래는 소연따윈 아랑곳않는다는 듯이 그녀앞에서 온갖 애정행각을 해댄다. 그런 기석을 보며, 저런 남자의 애를 지우고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어 한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소연은 쓴웃음을 짓는다. 

  나래의 바람대로 신혼여행은 발리로 정해지고 둘은 패키지는 싫다고 우겨 현지 가이드를 채용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현재 여행사와 컨택까지 해주는 걸로 소연은 일을 갈무리하기로 한다. 흔히들 말하는 ‘스드메’도 다 정해지고 신혼여행까지 다 챙겨주고 더 이상 자기가 할 일이 없다는 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언제 우리 밥 한번 먹어요 셋이. 아니, 실은 하나 더 있는데.  하면서 나래는 자기 배를 쓰다듬는다. 소연은 더 들을 필요도 없어 서둘러 자릴 뜬다.그리곤 자기차에 올라 시동을 걸다 문득 그가 생각나 메신저창을 띄운다. 사흘동안 자길 보여주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그의 사진이 다시 떠있다. 마스크를 쓰고 핼쓱해진 모습으로. 그리고 상태 메시지는 “ 겨우 살아남”이었다. 아, 아팠나보다. 소연은 당장이라도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어디가 얼마나 아팠냐며 묻고 싶은걸 간신히 억누르고  차 시동을 건다.          

  몇 번을 문장을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다 소연은 용기내서 전송 버튼을 누른다. 이제 그가 보는 일만 남아있다. 칭얼대며 ‘그놈들’타령을 하던 노모도 잠이 들었는지 자는 소리가 들린다. 메시지는 한참을 안읽음 상태로 떠있다. 무슨일일까...혹시 날 차단한걸까....소연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잠시후,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뜬다. 소연은 호흡이 가빠지고 그가 보내올 답장을 생각한다. 뭐라고 답할까...하지만 그에게선 아무 답이 없다...그리고 프로필은 다시 기본화면으로 돌아간다. 소연은 온통 버려진 느낌에 울다 지쳐 잠이 든다. 그리곤 새벽에 그를 메신저창에서 삭제한다.  

  그리곤 다시 누워 한시간 남짓 가수면 상태에서 허우적대다 무언가 쾨쾨한 냄새에 잠을 깬 소연은, 주방이 불에 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옆에서 노모가 정신을 놓은채, ‘그놈들’을 잡기라도 할 기세로 허공에 헛손질을 해대며 욕을 하고 있다. 아, 이래서 집에선 안된다는 거구나, 소연은 새삼 깨닫는다.  그도 떠나고  노모도 떠나 보내야 한다,고 소연은 생각한다.     

 그리고 이틀후 소연은 월차를 내고 노모를  외곽 작은 요양원으로 옮긴다. 노모는 계속 중국여행 가는거냐고 물어댔고 그럴때마다 소연은 열밤 자면 간다고 대답했다. 노모는 요양사가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는 내내 빵이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다. 

  엄마, 내일 또 올게. 하고 소연은 울며 요양원을 빠져나온다. 어떻게 집까지 운전했는지 , 사고를 안내고 온게 신기할 정도였다. 방에 들어서자 온통 노모의 흔적이다. 노모가 입던 속옷, 양말, 볕이 강할땐 늘 쓰고 다니던 챙이 넓은 모자까지...마치 노모가 죽은 것처럼 소연은 그것들을 부통켜 안고 통곡을 해댔다. 노모가 다시 이 집에 들어오는 일은 없으리라, 떠나간 그가, 다시 올일 도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소연은 끝도없는 잠에 빠져든다.      

  메신저 알람에 잠이 깬 건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오래전 노모와 함께 한 제주 여행꿈을 꾸고 있을 때였다. 그리곤 메신저 창을 열고는 화들짝 놀란다. 분명 자기가 삭제한 그의 프로필이 다시 떠있다. 그리곤  그가 답장을 해왔다. 만나고 싶다고.     

  그는 속이 안 좋다며 커피대신 과일 쥬스를 주문한다. 소연은 자기도 같은 걸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마주앉은 둘은 딱히 할말이 없어보인다.

  “어디, 아프셨어요?” 하며 소연이 먼저 입을 연다

  “네 조금요..제가 기저질환이 있어 백신을 안맞아서요 ”하고 그가 쿡쿡 웃는다. 그의 치열이 고르다. 누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치열에 그의 살아온 내력이 보인다고.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말끔하다며 다시 쥬스잔을 입에 가져가다, 아참, 하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한다. 소연은 그게 뭘까, 궁금해진다. 그순간 그녀앞에 예의 그 조각상이 건네진다. 이걸 왜...소연은 할말을 잃는다.

  “실은 동거하던 여친이 중고장터에서 이걸 보고 픽 한거였어요”

  그말에 소연은 어지럼증을느낀다. 일이 꼬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헤어졌거든요. 우리 호텔에 투숙하던...얘기하자면 길어요. 제가 프론트 담당인데

  어느날 자살소동이...암튼, 그렇게 만났고 같이 살았는데....어느날, 간다고 하드라구.”

  하면서 그가 쓸쓸하게 웃는다. 그녀가 떠났으니 조각상도 돌려주겠다는 말이다. 이런법이 어딨냐고 소연은 소리치고 싶다. 이런 법이 어딨냐고...

  “그래서 같이 쓰던 세간도 다 내놓고..”

  “봤어요”

  “네?”

  하지만 소연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줌도 남지 않은 자신의 존재나마 부여잡고 싶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 말에 상대는 의아해한다. 당신이 내 척박한 삶에 위안이 됐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말이 길어지고 여태 자신이 해온 엿보기가 탄로날게 뻔했다.

  그러면서 소연은 그 조각상을  자기 가방 깊숙이 찔러넣는다. 그러자 상대가 말한다. 저도 고마웠습니다. 뭐야. 이 남자, 뭐가 고맙다는건지...소연은 서둘러 까페를 나온다.     

  신호를 받고 사거리에 멈춰선 차 안에서 그는 생각한다. 잘한거라고. 그녀가 떠난 자릴 당신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고. 하지만 접촉은 위험한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딱 좋을 때 끝내는거,  그게 관건이다 요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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