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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Oct 22. 2022

소설 <미러인더미러>

그의 여자,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이 지원의 머릿속을 가득 ..

  벌써 일주일째 경진에게선 연락이없다. 매대를 정리하다 말고 지원은 불안에 휩싸인다. 이번엔 우크라이나를 거칠거 같아...경진은 그런말을 했다. 하필 전운이 감도는 그 나라를 왜... 경진은 늘 그렇듯이 ‘답답해’를 연발하며 훌쩍 체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경진과는 예전 잡지사 <길잡이>에서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로 만났다. 주로 여행 코스를 소개하는 콘텐츠였는데 어느날 데스크로부터 둘이 지리산을 다녀오라는 얘기가 나왔다. 지원은 신입인 경진과 동행한다는 게 내키지가 않았다. 한두번 말을 섞어본  결과 경진은 지도한 염세주의에 여자를 우습게 알았다. 저런 남자와 연애라도 하면 분명 상처받을거다....지원은 그런 생각까지 했다.

  그런 경진과 지원이 눈이 맞은건 바로 그 지리산 특집을 갔던 때다. 지원의 체력이 그 지루하고 험준한 산을 타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지원은 경진의 등에 업혀 하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아온 민박집에서 밤새 고열에 시달리는 지원을 경진은 물수건을 갈아대며 간호했고 새벽 무렵, 둘은 한몸이 되었다. 어쩜 지원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날을 기점으로 둘은 연애라는걸 시작했고 그 사실은 금방 사내에 퍼졌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경진은 곧잘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고 손버릇도 나빴다. 한번은 프린터 토너를 가는 후배기자의 엉덩일 만지다 시말서를 쓰기까지 했다. 그럴때마다 지원은 헤어지자고 했지만 경진은 ‘사소한 것’으로 헤어지면 억울하지 않냐며 항변했다. 그에겐 그럼 뭐가 ‘덜 사소한 것’이란 말인가, 지원은 늘 답답했다.

  하지만 “답답해”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지원이 아닌 경진이었다. 이 연애가 너무 피곤하다고 지원은 생각했지만 막상 그와 헤어지고 이전의 공허한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쳇바퀴 도는 그 삶, 들어서면 허전한 2평 남짓한 그녀의 방 속으로 혼자 돌아갈 자신이 없어 지지부진 그와의 관계를 끌어왔다.

  그러다 잡지가 폐업하면서 둘은 실직했고 경진은 용케도 인터넷 신문사에 들어갔지만 지원은 실업자가 되었다. 업계 인맥을 통해 몇군데 이력서를 내보았지만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딱 한군데 조경을 다루는 잡지사에서 사무 보조를 하라는 것이었다. 복사를 하고 팩스를 보내고 심지어 청소까지. 전직 취재기자라는 이력도 나이 서른을 훌쩍 넘은 그녀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원은 아쉬운대로 차부터 팔아 생활을 했다.

  그러다 지원은 동네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편의점 유리창에 붙은 ‘아르바이트구함’이란 광고를 보게 되었고 결국 그 일을 하게 되었다. 펜대를 굴리던 손으로 매대를 정리하고 바코드를 찍고  유통기한이 다 된 물건을 골라내고...이런 일들이 죄다 낯설었지만 살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끔 경진은 퇴근하면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릴 사곤 했다. 둘이 <길잡이>를 퇴사하면서 만남이 부쩍 줄고 둘 사이의 거리감이 생긴건 확실했다. 그러나 둘은 형식적으로 아직은 연인사이였다. 그러기에 지원의 편의점 근무가 끝나면 둘이 함께 근처 모텔로 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진은 섹스를 하고나서도 툭하면 “답답해”를 내뱉었다. 뭐가 그리 답답할까...상대가 나여서 답답하다는 걸까, 지원은 가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경진이 얼마전 갑자기 신문사를 그만두고 동유럽으로 날아간 것이다. 딱히 코스라는것도 없었다. 일단 체코 프라하에 가는 비행기를 타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 며칠 전 경진은 떠밀리듯 지원에게 청혼을 했다. 실반지 하나를 끼워주면서 결혼하자고. 해놓곤 답도 듣지 않고 그렇게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야, 프라하 죽인다. 너도 봐야 하는데”라는게 그의 동유럽 첫 메시지였다. 이후로 하루 걸러 한번씩은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 일주일 전부터 연락이 끊긴 것이다. 불안해진 지원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설이 임박해올수록 지원의 가슴은 타들어갔다.          

  “나 태연이”

  그날도 경진의 메시지만 기다리며 밤늦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지원에게 예전에 같이 라디오 구성일을 했던 태연에게서 근 3년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자냐?”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태연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고 경진은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지방권으로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인데 지부가 서울에 있고 그곳에서 일해볼 의향이 없냐고. 태연이 일한적이  있는 곳인데 무엇보다 급여가 괜찮다고 했다.

   태연에게 들어온 제안인데 자기는 지금 인천에서 어느정도 자릴 잡아가고 있어 다시 서울 복귀가 여의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원은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곧바로, 하겠다고, 답했고 담당 PD전화번호를 문자로 받았다. 그때 까페 새글 알림 문자가 들어왔다.  이시간에? 하고 지원은 자기가 개설한 까페 <로맹가리>로 들어갔다.     

  일곱 번짼지 여덟 번짼지 하는 파도가 밀려올 때 죽어야 했다는 그녀....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대학원시절 후배로부터 듣고 곧바로 작가 이름으로 개설했던 그 까페가 이젠 회원 100명을 돌고 있었다. 문학신간, 간단한 서평, 기타 잡다한 예술과 일상이야기를 올리는 공간이었다. 맨 위 새글을 보는 순간 지원은 아, 하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성재” 세글자가 똑똑히 눈에 들어와 박힌다. 두 기 선배였던 그사람. 학과생들 사이에서 ‘운짱 선배’로 통했던 그 사람. 모임이나 이동이 있을땐 늘 운전을 도맡아 했던 사람이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결혼을 일찍해  애가 셋인 유부남. 그래선지 몸이 좀 나있고 볼살이 통통했던. 그가 근 10년만에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대학원이란  데가 야간이었고 당시 지원은 TV교양프로 구성을 하면서 나름 수입이 좀 있을때였다. 나중을 도모하자는 생각에 그곳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기성 문인들을 많이 접할수 있었다. 책과는 반대인 인성들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지원은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대학원 신문을 편집하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안그래도 책이나 신문 편집에 관심이 있던 지원으로선 장학금까지 나오는 학생회 일을 별 망설임 없이 받아 들였고 그렇게 신문일을 하게 되었다. 평소 대하긴 어렵던 교수들 인터뷰를 따고 나오는 날이면 왠지 다른 누구도 할수 없는 일을 한거 같아 뿌듯했고 각과를 돌며 설문조사나 원고청탁을 할땐 그 나름의 자부심도 느끼곤 했다. 그러다 성재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물론 동기 문인들에게 한번씩 전화를 돌리고 퇴짜를 맞은 뒤였다.

  “선배 짧은 소설 한편만”

  하자 성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지원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선배, 부탁요”

  “끊어!”

  하고 성재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꼴랑 장학금 하나에 넘어가 해 본적도 없는 신문일을 한다고 한게 잘못이라고 지원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그래도 근성을 발휘해보자, 이번엔 성재의 메일을 찾아 읍소하다시피 원고청탁을 하였다. 성재는 역시 답이 없었다. 글렀구나, 땜빵으로 남미문학 특집이나 싣자, 하고 있던 이틀후 누군가 수업을 기다리는 지원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성재였다. 성재는 USB하나를 내밀며 “원고료 있냐?”며 퉁명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선배 고맙...”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재는 지원을 지나쳐 늘 앉던 앞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 뒤통수에 대고 지원은 절이라도 했던거 같다. 그렇게 신문 2회를 간행하고 지원은 그 학교를 자퇴했다.


  며칠전 문학 신간으로 기성재의 새책이 눈에 띄어 그걸 까페에 올린게 화근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성재가 그걸 보곤 들어와서,“ 넌 누구냐”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내가 대학원 신문 편집할 때 소설 원고 써준 사람”이라는 알뜰한 코멘트까지 써놨으니... “너 강지원이냐?”라고까지....지원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까페 누구도 그녀의 본명을 모르는 터에 온천하에 강지원 이름 석자가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성재는 계속 따옴표를 그려가며 “누구냐”를 연발했다. 그날밤, 지원은 라디오 pd에게 보낼 데모원고를 쓰면서도 계속 “누구냐”를 삭제해야했다. 왜 그랬을까....왜 성재를 피하고 있는걸까, 지원은 스스로도 이상했다.          

  그해 연말,   과 동기 순정과 성재의 일산 오피스텔에 간적이 있다. 성탄을 갓넘긴? 아님 그 즈음? 순정은 신춘문예에 응모해놓고 결과를 앞두고 초조해 있었다. 그러다 지원에게 제안한게 “ 성재선배 오피스텔”이었다. 거길 왜? 그냥....그 선배 신춘문예 출신이잖아....되도않는 논리를 내세우며 순정은 차를 일산으로 몰았다.

  그리곤 호프집에 자릴 잡고 앉아 다짜고짜 성재를 불러낸 것이다. 설마, 하던 성재는 진짜로 나왔고 후배 둘에게 거나하게 맥주를 샀다. 술이 오르자 순정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오늘 나 집에 안가. 선배 오피스텔로 가요”

  그말에 성재는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정을 쳐다보다 지원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게 무슨 말이냐? 순정이가 신춘문예...근데, 그거랑 내 오피스텔이 뭐...지원은  술이 올라 안그래도 벌개져있는 얼굴이 더욱더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날밤 신은 순정의 손을 들어주고 결국 걸어서 20여분 거리의 성재 오피스텔로 셋은 향했다.          

  그 방.

  열평이 채 안되는  복층 구조의 그 방을 지원은 지금도 기억한다. 넓은 창가를 따라 단출한 침대가 놓여있고 벽면에 붙인 일자형 책상위엔  노트북이  켜진채 놓여있었다. 바탕화면엔 얼마전 찍었다는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다. 늦둥이를 낳은 성재가 아이를 안고 있었고 대여섯살 돼보이는 남매옆엔 원피스 차림의 성재 아내가 다소곳이 있었다.  누가봐도 화목한 가족사진이었다.

   아내가 약사라고 했든가...여자는 사진속에서 치아를 살짝 드러낸 채 살포시 웃고 있었다. 누가봐도 미인이다. 살결이 뽀얗고 보조개가 깊게 파이는 , 성재가 밤마다 안을 여자, 라고 생각하니  지원은 살짝 질투까지 났다. 그만큼 네식구는 세상  최고의 행복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정은 자정을 넘기면서 결국 침대에 고꾸라져 잠이 들고 그 옆에 오도카니 앉아 지원은 밤을 지샜다.      

  “너도 눈좀 붙여”라고 성재가 원고 작업을 하며 힐끔댔지만 왠지 그럼 안될거 같다는 생각에 지원은 자꾸 내려오는 눈꺼풀을 애써 쳐들며 버텼다. 그 방...     

  순정은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고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로 계속 글을 써 내노라하는  문예지로 이듬해 여름  등단을 했다. 그리고 얼마후 지원은 인터넷에 교수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의 글을 올려 자퇴를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치기에 어린 짓이라 생각되지만 그시절엔 제법 명분있는 일이었다. 거의 출석도 않는 기성 문인에게 최고의 학점을 주는 교수들이 미웠다. 그건 어쩜 대의가 아닌 지원이 받지 못한 그 최고점에 대한 회한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곤 그 학교를 나와 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를 취득했다. 일종의 보험인 셈이었다. 글쓰는 일이 틀어지면 강의를 한다는.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대안 따윈 하등 쓸모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길잡이>같은 잡지사까지 흘러들어가 경진을 만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답답한” 그 남자를...


 지원은 아쉬운대로 성재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메일을 열어보라고. 그러자, 그에게 방금 전 보낸 메일이 금방 “읽음”으로 바뀐다.

  “나,강지원 맞고 제발 까페에서 나가주세요” 읍소하다시피...

그러자 성재는 낄낄대는 이모티콘을 날린다.

  “아는 사람있음 불편해요. 제발좀 나가주세요” 하자 성재는 까페 탈퇴를 하는 대신  자기의 전화번호를 남긴다. 언제든 연락해라. 밥 사주꾸마....라고.     

  성재의 보조개가 이쁜 아내는 지원이 자퇴 직전 세상을 떴다. 흉흉하게 돌던 소문으로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약물중독으로. 성재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 독한 에고이스트라는 것, 심지어는 도박을 한다는 소문까지...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증명되지 않은 설이었을뿐이다. 

 어쨌든 이른 나이에 성재는 애 셋 딸린 홀아비가 되었다. 성재는 학과생중 지원에게만 알렸고 지원은 순정의 차를 타고 밤에 일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초췌한 상주인 성재는 “왔어?”라고 겨우 웃어보였다. 지원은 뭐라 할말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러자 성재는 “이럴땐 ‘삼가 유감을 표합니다’라고 하는거야”라며 알려주기까지 하였다. 영정 속의  그 여잔 왜, 어떻게 간걸까...지원은 아직도 모른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지현식입니다” 라며 초면의 PD가 자기를 밝힌다. 방송국은  모 공단 건물 내부에 있었다. 이런곳에 방송국이 있다는건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었다. 현식이 커피를 뽑아주며 지원이 가져온 데모원고를 찬찬이 읽는다. 지원은 긴장한 탓에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입만 갖다댄다. 다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현식은  “같이 하는걸로 하죠”하고 흔쾌히 그녀를 받아들인다.  

  “근데 MC가 조금 까다로워요. 괜찮겠어요? ”

  지원은 MC가 누구냐고 묻는다. 가수 최양희, 라고 한다. 지금 70 이 다 돼가는 그녀는 처음 데뷔 무렵 고학력 연예인으로 인기몰이를 했던 장본인이다. 방송에서 그녀의 모습은 털털하고 박식하며 그러면서도 약자의 편에 서는 소박하고 강직한, 그러면서 한없이 편안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게 아닌가보다, 지원은 내심 의문이 든다. 

  그런 의문을 가진채 원고를 써내려가던 지원은 문득, 하루종일 경진 생각을 안했다는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한번 문자를 보내려다 만다.

  그리고 다음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뉴스에 뜬다. 경진, 그는 어디있는가...살아있는걸까...     

   러시아의 표면적 침공 이유는 ‘친 러시아군반군 점령지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하지만  그와는 실상은 달랐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해 주요도시 곳곳에 러시아는 미사일을 퍼부었다. 전세계가 격노했지만 푸틴은 아랑곳않고 점점  더 공세의 수위를 높여갔다. 경진, 그가 만약 저 안에 있다면....지원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최양희는 pd현식의 말대로 거만하기 이를데 없었다. 첫대면에서 부터 지원의 원고를 타박하며 자기 캐릭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적이면서도 소탈하고 친근하고 귀족적인 그런 원고를 요구했다. 지원과 현식은 눈을 마주치며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양희는 지원의 원고를 거의 무시하고 애드립으로 방송을 진행했다. “저러다 꼬이지”하고 현식이 투덜댔다. 저럴바엔 아예 원고를 직접 써오든가 할 일이지 저게 뭐야, 하며 다른 작가들까지 가세해 양희를 비꼬았다. 지원이 하는일이라곤 읽히지 않는 원고를 밤새 쓰는 것, 그리고 방송도중 희망곡신청자들의 전화를 받아 연결하는게 다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돈만 받자,라는 생각으로 지원은 꾹꾹 눌러참았다.      

  그러는 사이,우크라이나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곳곳에서 약탈과 무자비한 강간이 일어났다. 전쟁,이 이런것임을 다시한번 일깨우고 있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건 금방 무너져벌릴것 같던 우크라이나의 항전의지가 강했고 되레 러시아가 밀리는 모습도 곳곳에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한들, 매일 수백 수천의 사상자가 나오고 자식들 앞에서 윤간당하는 여자들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도 전쟁이 난다면, 하고 지원은 상상해본다. 마침 선거철이라 여기저기서 전쟁, 선제공격, 핵무장 따위의 슬로건이 나돌아 뒤숭숭했다.          

  양희와의 기싸움에 지쳐 한동안 잊고 있던 성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한번보자고. 지원의 집에서 가까운 대학로에서. 그러면서 그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동안 희곡을 쓰고 연극연출을 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러나 지원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그리고 왠지 경진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단순한 학교 선배 하나 만나는게 무에 그리 죄가 될까 싶으면서도 어쩜 성재가 단순한 지인 이상일수 있다고 지원의 무의식은 말했을지 모른다. 해서 지원은 그 메일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지원은 인터넷에서 성재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했다. 얼마전 지원의 까페에 올린 소설은 미군 기지촌의 아직까지 계속되는 열악한 실태를 파헤친 일종의 르포 소설이었다. 그안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의 고달픔과 동맹이라는 이름하에 저질러지는 갖가지 만행을 고발하는 식이었다. 이 소설을 자기 까페에 올릴까 말까 하다, 어떠랴 싶어 올린게 결국 성재와의 재회로 이어졌던 것이다.

  돈도 안되는 이런 소설을 쓰다니...하며 지원은 혀를 찼다. 누가 읽기나 할까, 하며 메일을 씹는 대신 그의 다른 작품들을 몇 개 더 올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왜 나는 그를 피할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정말 어떻게 간 걸까? 정말 자살일까? 왜? 아님 터무니없는 낭설에 불과할까? 하다 지원은 자기에게 지금 라디오 일을 안겨준 태연에게 한밤중 전화를 건다. 

  “그건 부부 당사자만 아는 일이지. 니가 좋음, 니가 끌림 답장해서 만나”

   태연의 대답에 지원은 허를 찔린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런가....과거사 따위 어떻든 내가 끌림....하지만 내겐 생사조차 모르는 경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서로 밀고 밀리는 형상을 되풀이하고 정전협정 얘기가 나왔다가는 다음날 번복되고 세계 정상들이 한데 모여 어떻게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도 눈에 띄었다.     

  MC양희가 어느날 독감이라며 생방송을 펑크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현식은 대부분 음악으로 갈테니 지원에게 대신 일일 MC를 하라고 했다. 지원은 말도 안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은 설득당해 부스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처음으로 지원은 자기 원고를 그대로 읽어나갔다. 밖에선 현식이 OK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지원은 자기에게 또다른 재능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두시간 생방송을 별탈없이 마치고 부스를 나오는데 현식을 비롯한 일동의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지원은 꿈인가 싶었다...

  그리곤 꺼두었던 휴대전화를 키자, 부재중 전화가 한통 표시돼있다.          

  “어떻게 된거야. 죽었는지 알았잖아”

  방송국 근처 까페에서 만난 경진을 보고 지원이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죽긴 왜 죽어...하긴, 죽을뻔 했지” 

  하고 경진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우크라이나엔 안 간거지?”

  “왜..갔다가 나오자마자 전쟁이 발발했어...나, 귀한 목숨인가봐”

  “한번만 더 그래봐...” 

   지원이 눈을 흘기자, 그는 할말이있다며 정색을 했다.  지원은 왠지 불안해졌다. 딱히 앾속을 한건 아니었지만 이번 여행이 끝나면 둘은 결혼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우리 결혼...”

  하자 경진은  그녀의 말을 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결혼 뭐?”

   “누굴 만났어 실은...그래서 너한테 연락,”

   여자,구나 싶었다 지원은. 누군가를 그 동유럽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전운이 감도는 우크라이나에서 누군가를 이 남자가 만나 함께 움직엿다는 뜻일까? 지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너한테 말은 해야 할거 같아서”

  “그럼 우리, 끝난거네?”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여겨져 지원은 자릴 박차고 나왔다. 까페문을 나서는 순간 하마터면 코너를 돌던 배달 오토바이에 치일뻔했다. 다행히 바로 코앞에서 오토바이는 멈췄고 그바람에  뒷좌석 음식물이 바닥에 내동댕이 처졌다.

  “죄송해요”하며 지원이 음식들을 쓸어담자 라이더는 “놔둬요”하곤 제 손으로 정리를 했다.“제가 보상이라도”하고 지원이 운을 떼자, 날 무시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이곤 다시 오토바이를 몰고 저만치 사라져갔다. 그때 뒤에서 지원의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경진이었다. 아직 자기 마음을 정한게 아니라고. 너한테 너무 미안하고, 그녀와는 어쩜 지나가는 감정일지 모른다고. 그러자 ,내가 보험이니? 쏴붙이고 지원은 그 자릴 떴다.     

  그날밤 성재로부터 다시 이메일이 왔다. 뭐야 짜식, 전화도 안해, 메일도 씹어. 이게 후배가 선배한테 할짓이냐....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에 지원은 메일에 답을 했다. 그동안 방송일로 정신이 없었다고. 주말에 대학로에서 한번 보자고. 전화하겠다고. 그러고는 ‘보내기’를 누르고 나자, 더 이상 경진과의 끈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느껴졌다.     

 그리고는 그주말, 지원은 대학로 한 레스토랑에서 성재를 만났다. 성재는 다짜고짜 신간을 내밀었다. 지원은 그걸 집어들고 자기가 까페에 올린 책 중 하나라는 걸 알아챘다. 지원이 말없이 책장을 넘기자 성재는 “서평좀 써라”하고 말했다.서평? 가끔 간단한 독서 에세이 정도는 써봤지만 본격적인 서평은 써본적이 없는터라 지원은 은근 주눅이 들었다. 이러려고 날 보자고 한건가.

  “귀찮음 말고”

  하고 성재는 남아있는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어떻게 지냈어?”하고 그가 손깎지를 끼며 지원에게 묻는다.

   지원은 학교를 옮긴뒤 타 대학에서 역시 이래저래 부대끼며 힘들게 석사를 딴 것, 그뒤 생계를 위한 고달팠던 시간들을 털어놓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시절, 가깝다면 가까웠던 사람이지만 무언가 목적을 갖고 만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리곤 그의 과거..그 아내의 의문의 죽음.....태연은 끌리면 마음이 하는대로 하라고 했지만 , 아직 끌리는지 여부조차 알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경진과 헤어진게 며칠 되지도 않은터라 지원은 이 시점에서 성재와 만남을 갖는다는 자체가 껄끄럽고 자기가 헤프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선배는 왜 돈 안되는 책만 써요?”

  “짜식...여전히 겁은 많아서...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하냐?  어떻게 지냈냐니까 그말은 안하고. 전번찍어” 하며 자기 휴대전화를 지원에게 내민다. 지원은 할 수없이 자기 전화번호를 찍는다.

  이 남자는 묻지도 않는다. 대학원 시절부터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 , 결혼여부조차 묻지 않는다. 묻지마식으로 남의 삶에 끼어드는 타입인가, 지원은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성재에게 그런 질문을 할순 없었다. 행여나 아직 혼자라면 예전 상처를 건드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임마, 너 많이 늙었다” 하고 성재가 지원의 머릴 헝큰다.

  이 남자, 몇 년만에 만나서 다짜고짜....지원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런 성재의 행동이 싫진 않았다. 둘은 그렇게 오랜만의 재회를 하고 별 얘기도 없이 밥 한끼를 먹고 후식으로 지원이 산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시간 나면 써 ” 하고 성재는 마지막에 다시한번 서평을 언급했다. 역시 그거였어. 이게 목적이었어. 하곤   지원은 집에 오자마자 성재의 책을 책장 구석에 처박았다. 그리곤 그를 잊었다. 최소한 현식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기까진.     

   그날은 비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내리는 날이었다. 우산을 받쳐도 지나가는 차들이 튕겨내는 구정물은 막을 수 없었다.  그바람에 지원의 청바지가 흠뻑 물에 젖은 날이었다. 그날치 원고를 현식의 책상에 내려놓는 순간, 현식이 대뜸 , 수고가 많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네? 하고 지원이 되묻자, 양희가 자기 아는 작가를 붙이지 않으면 더 이상 방송을 안하겠다고 한것이다. 지원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어차피 지원이 쓴 원고를 무시하고 애드립으로 개판을 만들어온 여자가 새삼 자기작가 타령을 하다니...하고   되묻는 시선을 현식에게 보내자, 난 힘이없어요, 할 뿐이었다. 하곤 밍기적거리다 덧붙였다. 그날, 지원씨가 대신 방송한 날 청취자 반응이 좋았다, 그게 문제가 된거 같다,라는 것이었다. 지원은 어이가 없었다. 덜덜 떨며 갑자기 부스안으로 밀어넣은게 누군데, 이건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지금 최양희씨 어딨어요?” 하며 지원이 흥분하자 현식은 이미 다 끝난일이라며 이번주 원고까지만 써달라고 못을 박았다. 이메일로 보내면 된다고.          

  그렇게 어이없이 해고 통보를 받은 날, 지원은 태연에게 전화를 해 하소연했다. 그러자 태연은 안그래도 MC가 최양희란게 맘에 걸렸었다고 그제서야 털어놓는다. 그 여자 유명하거든. 작가 원고 씹는걸로. 근데 인맥이 빵빵해. 거기 본부장하고 호형호제 하지 않든? 하고 태연은 위로 대신 양희의 욕을 한바가지 퍼부었다...언제 술한번 먹자, 하며 지원은 전화를 끊었다.     또다시 실업자...지원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식도 원고를 맘에 들어했고 들리는 말로는 이번에야 진짜 작가를 만났다고 했단다 그가. 그리고 양희 대신 생방송 펑크까지 막은 자신이 아니었든가. 그게 되레 화가 돼서 돌아온 것이다...어이가 없었다.

  그때, 메일알람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고 메일을 여는 순간 “잘자”라는 성재의 짧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귀찮음 안해도 된다고 했다. 안 써도 된다고..하긴, 학교 선배 신간 홍보 정도가 무에 그리 대수겠냐, 싶었다. 어차피 일도 잘리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지원은 구석에 처박았던 성재의 신간을 끄집어 냈다.      

  “밤새 비가 왔다”로 시작되는 르포소설이었다. 지원은 밤새워 그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고 뒤의 작가의 말, 평자의 말까지 싸그리 읽었다. 그리곤 성재가 알려준 인터넷 채널에 서평을 썼다. 좀 길다 싶을 정도로 나름 정성들여.

  그러자, 그걸 봤는지 다음날 오후 성재로부터 다시 메일이 날아왔다.

  “짜식, 해줄거면서...잘 쓰는데? 땡큐” 하고 그는 만족한 티를 냈다.

   하지만 이번이 끝이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더 이상 그 누군가에게도 휘둘리거나 타당한 이유없이 배려나 베풂 따윈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변덕이 심한 경진을 어르고 달래며 보듬었던 자신에게 돌아온 건 배반뿐이었다. 뿐인가, 생방송 펑크를 막아준 자긴 그게 이유가 돼서 작가에서 잘리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지원은 올케  미영이 하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찾았다. 유복자인 조카 명.을 혼자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는 올케가 살붙이처럼 여겨졌다. 

  ‘아가씨, 요즘 방송일 한다드니...“

 다시 쉬게 되었다고 짧게 대답하자 올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빠 지석과는 대학 3학년때 캠퍼스 커플로 만나 오빠가 군에 다녀올 때까지 내내 기다리다 올린 결혼식. 그리고 명.을 임신했다고 둘이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던 늦가을 새벽,  지석이 부산 출장을 간다고 집을 나선 게 두사람의 영이별이 되고 말았다. 졸음운전을 하던 맞은편 트럭과 부딪쳐 지석의 승용차는 형체도 알아볼수 없을만큼 산산조각이 나고 지석은 억,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렇게 임신 7개월만에 미망인이 된 여자 미영이었다.  

  ”오늘 장사도 안되고 일찍 문닫고 우리 술 먹어요 “하며 미영은 서둘러 셔터를 내렸다. 그날밤, 지원은 미영에게 경진의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미영은 지원을 다독이며 ”연이 아닌거예요“하고 짤막하게 위로를 건냈다. 그럼 오빠도 언니와 연이 안돼서 그렇게 간거네, 하고 지원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성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망설이는 그녀의 안색을 알아챈 미영이 소주잔을 비운다. 누군데? 하고 먼저 운을 뗀다. 그렇게 해서 지원은 성재의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 그 아내의 죽음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그러자 미영은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그게 뭐 중요해요?  아가씨 맘이 원하는대로 해야지. 하고 땅콩을 집어든다. 그럴까,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뭘 원할까? 그날밤 조카 명을 사이제 두고 미영과 나란히 누운 지원은 자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 메일함을 열어보지만 성재로부턴 아무 연락이없다. 역시 그거였어 서평. 그게 필요했던거야. 그럴바엔 처음부터 돈되는 책을 썼어야지...하고 그에게로 향하던, 향할뻔 했던 일말의 감정을 모두 차단했다.     




 그리고는 일주일후  PD 현식으로부터 다시 일하겠냐고 전화가 왔다. 양희가 ’자기작가‘라고 데려온 작가의 글마저 씹는다며 이젠 지원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원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호의도 뭣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권력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반나치‘를 그 이유로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원이 검색해본 결과, 구소련 치하에서 우크라이나의 실정은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소련이 식량을 주지않아 심지어는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생겨났다. 그런 상황에서 나치가 등장해 우크라이나를 독일에 부역해 소련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독일마처 우크라이나를 버렸다. 이래저래 버려지고 이용만 당하는 내가 우크라이나구나, 싶었다 지원은.          

   올케 미영은 낮시간 동안 문구점 아르바이트를 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엔 정신없이 바쁘다는게 이유였지만 조금이라도 시누인 지원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원은 매일 미영의 문구점으로 출근을 했고 하교시간엔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그덕에 잊고지낸 성재로부터 메일이 다시 온건 그로부터 10여일이 지나서였다. 한번 보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원은 답하지 않았다. 

  ”사는거 답답하지 않니?“ 라고 성재는 다시 메일을 보내왔다. 만약 여자로서 지원이 좋다면 메일 말고도 방법은 많았다. 전화나 문자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메일만을 고집하는 성재가 진정성이 없어보였다.

 ”선배는 사는거 답답해요? “ 하며 지원은 툴툴대며 짤막한 답장을 했다.

 ”너 여수로 놀러오지 않을래?“하는 답장이 왔다. 여수? 난데없는 그의 제안에 지원은 왠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 경진과 충무답사 기사를 쓰러 가던 도중 잠깐 들러 1박을 했던 곳이 여수였다. .그때가 밤이어서 어둠속에 잠깐 스친게 다였지만 어딘가 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긴 곳이었다. 하지만 여수의 밤불빛은 충무의 미려한 경관에 곧 잊혀지고 그런 이유로 얼마후 경진과 두 번이나 충무를 찾았다. 그때 번갈아 운전하는 걸 피곤해하던 경진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지원은 씁쓸해진다. 그런 여수로, 성재가 오라고 한다. 

  그제서야 지원은 다시한번 성재의 이력을 살펴본다. 아, 여수 출신이구나. 여수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었다. 남도의 사람이었구나,하며 진귀한 발명이라도 해낸것처럼 신기해한다.  그러자 여수로 놀러오라는 그의 메일에서 텁텁한 바다 내음이 나는거 같다.          

 지원은 이미 여수 바다 앞까지 가있다. 동해와는 또다른 잔잔한 물결이 햇살속에 반짝인다. 그리고 부표. 지원같은 서울 토박이한테 여수 충무 목포 한려수도, 이런 지명들은 그 이름만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가고싶다,라고 지원은 생각한다. 상상속의 그녀는 성재가 마중나와 있을 여수역을 향해 달리는 고속열차에 타고 있다. 

 ”장마 오기전에 가서 한 일주일, 취재도 하고 쉬고 오려고“

 하고 성재가 추가 메일을 보내왔다. 가고싶다, 가고싶다....지원은 그를 향해, 여수를 향해 치닫는 자기의 마음을 추스릴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스스로가 되물어온다. 무엇으로? 어떤 명분으로? 그의 무엇으로 거기 간단 말인가?

  썼다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지원은 결심을 한다.

  ”제가 고속열차를 못타요. 다음기회에..“라고 답장을 한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당신의 무엇,으로 거기에 가는거냐,고 차마 물을수 없어 둘러댄 변명이었다. 그러자 곧 답장 메일이 왔다.

  ”너랑 꼭 같이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한강하곤 다르거든“ 하는.     

  그리고는 그가 여수로 떠났으려니 싶을 무렵, 지원은 왜 자기가 성재를 피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 방황했다. 경진도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언젠가 소설을 쓸 생각이 있는 지원으로선 성재와 굳이 남녀관계로 가지 않아도 친해두면 좋을 인연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필사적으로 성재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내? 그게 여태 걸리는 걸까? 그 의뭉스런 죽음과 그걸 둘러싼 소문들...배우자가 얼마나 지독한 에고이스트면 와이프가 그리갔겠냐, 고 수군대던 그 입들...그런 성재에게 간다면 자기 역시 엄청난 상처를 받을 거라고  지원은 생각한다.      

  처음엔 어떻게든 우크라이나사태를 매듭지으려던 서구 열강들은 이제 군수물자 팔기에 혈안되어 그 누구도 종전을 희망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러시아는 계속 돈바스 내 친 러 주민 대학살을  물고 늘어지고 우크이나 대통령은 전쟁을 발판 삼아 세계 무대 등판만을 노리는 양상으로 번져갔다  그와중에 죽어나는건 무고한 국민뿐이지만 그런건 더 이상 뉴스거리고 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권력놀이, 세상은 온통 미쳐있다.          

  지원은 성재를 단념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미 그에게 잡혀있는 자기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는 여태 혼자인가? 혹시 누가 있는게 아닐까? 하며 지원은 처음으로 제 3자를 상정해본다. 그럴 리가 없다. 만약 누가 있다면 자신에게 여수로 오라고했을까? 난봉꾼이 아닌 바에야...여수로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이미 뒤늦은 후회에 지원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곤 며칠후 문자가 왔다 성재로부터. 그에게서 문자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여수에 내려가있는동안 예전에 출판 여부가 불분명하던 책 한권이 드디어 출판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서평을 부탁해왔다. 이번엔 쓴다고 게재되는 그런 인터넷 채널이 아닌 심사를 통해 올려지는 대신, 된다면 돈이 들어온다는 말까지 해왔다.그러면서 자기가 쓴 초고를 파일첨부했다.     

   이 남자는 뭔가 도대체...하며 지원은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그가 언급한 채널에 들어가 글의 성격을 잡아내고 글의 분위기 등을 살핀다. 내놓고 광고하는 글들이 아니다. 조금은 서툴지만 읽는이가 쉽게 공감하는 글을 선호한다고 그녀 나름대로 결론짓는다. 그리곤, 지석에게 ”해볼게요“라며 문자 답장을 한다.     

  그렇게 지원은 그의 신간을 주문해 이틀을 꼬박 읽고 서평 작업에 들어간다. 그가 보낸 초고를 바탕으로 지원은 열심히 살을 붙이고 축약하고 여타 비평들을 참조해가면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원고를 작성해 동틀 무렵 ’작가신청‘을 매듭지었다. 이게 안되면 그와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그리고 다음날, 지원은 확인했다. 지석의 초고를 거의 그대로 올린 닉네임 ’수진‘이라는 여자의 글을. 열심히 요약, 축약, 문장전환을 한 자기의 글은 떨어지고 거의 그대로 올린 그녀의 글은 된 것이다. 

  아,  동시에  두여자에게 같은 원고를.... 지원은 맥이 풀려버린다. 자기가 한 짓이 너무도 바보스러웠다. 그는 왜 나를 여수로 오라고 했든가. 지원은 할말을 잃는다. 대학원시절, 둘 사이엔 딱히 뭐라할 감정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급히 학교신문에 실을 원고를 부탁하고 그걸 써준 정도다. 그게 이런 뒤탈을 남길줄은...     

  지원은 그에게 문자를 날린다. ”두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두사람 갖고 저울질 하지 말라고“ 그러자 곧바로 그에게서 답신 문자가 온다.

” 저울질? 우리 뭐 했니?“

  지원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이 박살난다.

  ”너, 나 좋아하냐?짜식..“

  지원은 그의 문자를 차단하려한다. 그리곤 확인 버튼을 누르기 직전 다시 그에게서 문자가 온다.

  ”이거 들으면서 진정해“

   하며  아르보 패르트의 “mirror in the mirror ”라는 음악  링크를 보내온다. 나름 음악을 좀 안다는 지원이었지만 이 음악은 처음이었다.

  소녀 둘이 거울을 사이에 두고 팔을 치켜든채 서로의 손을 맞대고 있는 영상이 사람을 보는 이를 나른한 마비속으로 끌어들인다. 멜로디는 반복되고  마치 수천개의 파도가 소리없이 밀려드는 느낌이다.지원은 저도 모르게 울고 있다. 그까짓 저울질 따위가 ,아내가 자살을 했든 말든, 그게 무에 대순가, 하는.이대로 끊어져선 안된다. 그의 여자,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이 지원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45) Spiegel im Spiegel | Mirror in the mirror | Arvo Pärt | 거울 속의 거울 | 아르보 패르트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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