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마음
j'ai peur

by 박순영

하필 민수에게 바람을 맞은 날 주영은 인사동 거리를 헤매다 민기의 전시회와 맞닥뜨린다. 작은 규모지만 꽤 인지도가 있는 화랑에서 그가 개인전을 연것이다.

오래전, 그와 온라인에서 우연히 채팅을 하다 만나 두어번 술까지 마셨고 그는 적극적으로 대시해왔지만 그당시 민수와 이른바 '썸'을 타던 시기였고 그것조차 잘되지 않아 연애에 피곤함을 느끼던 차라 그렇게 다가오는 민기가 버겁고 조금은 귀찮았다.

그는 세번째 만난 날 "우리 결혼, 어때?"라며 청혼을 하였고 주영은 어이가 없었다. 서로 알면 얼마나 안다고, 손한번 잡지 않고 서로의 감정도 살피지 않은채 그런 말을 해대는 그가 너무 경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나서 민기는 주영이 묻지도 알고싶지도 않은 자신의 치부라면 치부인 첫결혼, 아니, 지난 동거와 굴욕적인 그 끝을 이야기했다.

"둘이 좋아 사는데 어느날 장인이, 그러니까 예비 장인이 들이닥쳤어. 그러고는 당장 자기 딸과 헤어지라는 거야. 시간강사나 하는, 그것도 그림이나 그리는 녀석에겐 자기 딸을 줄수 없다고 하는거야.나는 거의 빌다시피 했지만 그 노인의 노기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결국 우린 헤어졌지.그리고는.."까지 이야기한 그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시간을 벌더니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두달쯤 지난 어느날,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 같이 병원에좀 가달라고.,.."그렇게 자기와 그녀의 아이는 저세상으로 갔다며 그는 젖은 눈가를 냅킨으로 꾹꾹 눌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딱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이 연애 감정은 아니어서 주영은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단번에 '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사뭇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친구라도.."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그리고는 "다신 볼일이 없겠구나"라며 먼저 까페를 나갔다. 그로부터 흐른 세월이 얼마던가....

그동안 그는 모대학 미술학과 조교수가 돼있었고 결혼도 한걸로 주영은 알고 있다...


어찌됐든 자신에게 마음을 듬뿍 주었던 사람이기에, 비록 끝은 이별로 결론이 났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은 하였다. 그래서 이따금 포털에서 그의 이름이며 관련기사를 검색하곤 하다가 마침내 그의 전시회장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하필 민수에게 바람을 맞은 그날...

민기, 민수...자기는 '민' 자 들어가는 남자들과 인연이 있나보다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들어서며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그는 천천히 그의 그림들을 감상한다. 그의 전시회 주제는 '뤼미에르'였고 그게 '빛'이라는 것쯤은 주영도 알고 있었다. 불문학도 시절, 그녀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싶어할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양화' 그것도 '인상파'에 국한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민기가 '동양화전공'이라는 얘기를 했을때 그녀는 시큰둥해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민기의 그림을 감상하며 혹시 작가인 그와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그날 민기는 화랑에 나오지 않았거나 시간이 엇걸리거나 하였다. 게다가 화랑에 관람객이라곤 달랑 자기 하나뿐이어서 만약 그가 그림만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면 굶어죽었으리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는 이제 엄연히 대학교수가 되었다.

일단 방명록에 자기 이름' '강주영'을 남겼으니 그가 혹시 연락이라도 해올까 싶어 그녀는 그날 이후로 한동안 그의 전화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민수와는 이런저런 굴곡을 겪으며 점점 멀어져갔고 결국 그 사달이 난게 그에게 새 여자가 생겼기 때문인걸 알고 그녀는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오래 알아온 민수와의 이별인데도 그리 마음이 아프지 않고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둘이 한창 갈등이 깊을 무렵 서로에세 해댄 폭언들과 서로의 마음에 낸 상처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미련을 갖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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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있는데, 어느날 민기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내가 전에 알던 이주영?"이라며 그가 조심스레 물어온다.

그말에 주영은 쿡, 하고 웃음부터나온다.

"나말고도 이주영을 또 만났나보네"라고 하자 그쪽은 긴장이 풀렸는지 하하, 하고 웃는다.

그리고는 서로의 안부를 간단히 묻고 그 다음날 그가 재직중인 대학근처 까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다.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하자, 둘은 어릴적 친구라도 만난양 반갑고 수다 삼매경에 빠져든다.

그는 주영과 헤어진 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이를 둘을 낳고 그 아이 둘 다 미술을 하고 싶어한다며 은근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다. '피는 못속이나봐'라며 그가 연신 방글댄다..

"넌 여태 혼자야?"라고 그가 자리를 호프집으로 옮긴 뒤 물어온다.

"오래 좋아한 사람이 있었는데...바람이 났드라구."하자

"저런"하며 그가 끌끌 혀를 찬다...

"실은..나,..."하다 그가 말을 끊는다. 주영은 잘린 부분의 말이 궁금하지만 그럴만 햇으니 그러리라 생각한다.

"난 요즘...일만 해...꽤 재밌어. 북까페"라고 하자,

"그거 해서 먹고 사냐?"라며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굶지는 않아 , 최소한 아직은"이라며 그녀가 웃는다.

예전에 이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일걸,하는 후회가 살며시 밀려들지만, 그리 되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편하게 마주 할수도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남자여자는 이성으로 얽히면 모 아니면 도라는 결론을 그녀는 민수와의 일로 충분히 체득하였다.


"언제 우리 학교와라. 내가 구경시켜줄게. 구내식당 밥이 꽤 괜찮아"라고 그가 슬쩍 학교 자랑을 하는데 이마에 뚜렷하게 주름 두줄이 잡힌다. 우리도 다 이렇게 늙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이제 젊음은 다 가버렸어,라는...

그러고 있는데 "실은 그때 내가 너한테 청혼하면서 이야기하지 않은게 있어"라고 그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주영이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자 "궁금하니?"라고 물어온다.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있다고 그가 말한다. 물론 하나는 생물학적 아버지고 또다른 아버지는 어머니가 외도를 한 상대라고. 그런데 그 외도한 상대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고..그 이름이,

하는데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설마,하면서도 그를 찬찬히 살펴본다. 뚜렷한 이목구비, 남자치고는 가늘고 긴 목, 그리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 전체적으로 꽤 준수한 외모...게다가, 게다가 키까지...민수와 비슷하다...

"혹시, 그 이복동생 이름이?"

"응? 그게 왜 궁금해?"

"아냐..."하며 그녀는 급히 들어가봐야 한다며 그 자리를 떠나 자신의 북까페로 차를 몬다. 아닐거야...설마 아닐거야...하다가 , 언젠가 민수가 자신에게 "형이 하나 있는데...배가 달라"라고 했던게 떠오른다. 드라마도, 소설도 아니고,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둘이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접촉사고를 내고 만다. 그것도 상대는 고가의 외제차였다.

그날 그렇게 큰 돈을 쓰고는 터덜터덜 까페를 들어서는데 저만치 ' 민수'가 아니 '민수인듯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혼자 앉아있다.

오늘 왜 이러지? 하며 그녀가 달아나버린 정신줄을 잡으려고 하는데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서 "저, 사장님 기다리는 분인데.."라며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그의 앞으로 간다. 민수였다. 지금보니 민기와 쌍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너무나 닮아있다...

"아니지?"하고 그녀가 앞뒤를 잘라먹고 물어대자 민수는 "뭐?"라고 어리둥절해한다.

"당신, 이복형제 이름이..."하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컬러링을 설정해놔 그녀는 자기 폰인걸 안다. 조금전 헤어진 민기였다.

만약 민수와 민기가 이복형제라면, 하나는 자신에게 청혼을 하였고 또 하나는 결혼까지 약속했던 남자다...그 사이에서 '나는 뭐였을까'라는 새삼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드는데, 울리던 전화벨이 끊어진다.

그러자 민기와 주영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왜 갑자기 그 형 얘기는...미술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에 그녀는 자신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이는걸 느낀다.점점 초점이 흐려지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가 말한다."나, 걔랑 헤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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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그 어떤 얘기도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는 오늘은 그만 가달라고 민수에게 애원하듯 말한다. 그말에 민수는 그사이 주영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냐고 묻지만 그녀는 대답대신 빨리 나가라고 소리를 친다. 그렇게 그를 밖으로 내몰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나 실은 와이프랑 별거중이야"라는 민기의 말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려온다. 그러면서 민기는 "나 다시 생각해줄래?"한다.

민기, 민수, 미술....더 이상은 추측조차 두렵기만 하다. 그녀는 민기의 질문에 대답을 않고 그대로 끊어버린다. 창밖에선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그리고 두남자가 동시에 돌아오고 싶어한다. 겨울 끝에서...

아닐거야...세상에 비슷한 사람, 비슷한 직업,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런건 존재할테고 그 경우의 수 역시 셀수없이 많을거라고 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킨다.

그러고는 이제는 잠잠해진 자기 전화를 물끄리미 쳐다보는데 손님이 들어오는지 유리문 상단에 달아놓은 종이 딸랑 소리를 낸다.

"어서 오"하는데 그곳에 민기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있다.

"까페 구경좀 해도 되지?"라며 그가 정신을 잃어가는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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