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남자

by 박순영

은선은 어떻게든 결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선 이것만이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이므로 여기서 실기하면 안된다. 그런데 후반부가 써지질 않는다. 남자여자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드라마의90%까지 이야기를 끌고 왔다. 그런데 남은 10%가 안되고 있는것이다.

어렵게 다시 연락해 원고를 봐주기로 약속한 pd 태석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서 오락가락한다. 이번에 팔면 밀린 월세도 좀 내고 당분간은 사는건데..


그러고 있는데 태석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고. 그말에는 짜증이 묻어난다. 둘은 예전 은선이 처음 드라마작가로 등단했을때 그녀가 건네준 원고를 수정해 드라마로 만든게 인연이 되었다. 그러다 그녀는 '인간시장'과 다름없는 방송계 풍토를 이지 못해 뛰쳐나오다시피 그일을 그만두고 지인의 출판일을 거들며, 남는 시간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늘 돈에 쪼들려야 했고 나이 마흔이 다 돼가도록 '뚜렷한 직업'이라고 내세울게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흘안에 보내드릴게요. 거의 다 썼어요"라고 하자 pd 태석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아무말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렇게 해서 이 원고가 드라마화 될 확률도 50%로 팍 줄어버렸다 . 은선은 그래도 어떻게든 후반을 써내야 한다는 생각에 담배도 피워보고 술도 마셔보고 그러다 문득 남자와 섹스를 해보면 글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그'가 떠올랐다.

지난번 홀로 떠났던 남도 여행길에 만난 그 남자 이도훈. 그때 둘은 펜션을 하나 잡아 이틀을 같이 묵으면서 몸을 섞었고 그 어떤 기약도 없이 은선이 먼저 서울로 올라오면서 헤어졌다. 이후 서로 안부 문자 정도가 두세번 오갔지만 그것도 한참 전의 일이다.



지금 내가 도훈에게 연락을 하면 나를 기억이나 할까,싶었지만 자신의 원고를 끝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했으므로 그녀는 눈을 딱 감고 폰에서 그의 연락처를 찾아내 전화를 건다. 발신자가 뜰것이므르 만약 그가 안받는다면 그 자체로 미련을 접어야 하리라...

한참을 벨이 울린뒤 상대는 예의 그 나긋나긋한 도시 남자 특유의 톤으로 전화를 받는다.

"잘 지냈어요?"라는 그의 말에 은선은 안도한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글을 마무리해야 해서 당신과 섹스가 핖요하다고 어떻게 말을 하는가...

"안그래도 궁금했어요?"라며 그가 말한다.

"한번, 뵐수 있을까요?"라며 그녀는 쩍쩍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간신히 물어본다.


해변의 연인.jpeg



오랜만에 보는 도훈은 남도에서 보았을때보다 조금은 야위어 보인다. 그래도 귀공자풍의 세련된 외모는 여전했다. 찻잔을 쥐는 그의 손은 여전히 희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 그런데....그 시점에서 은선은 숨이 턱 막혀버린다. 도훈의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있다. 그동안 결혼을 했구나 하자, 섹스고 뭐고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게 계속 입술이 타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도훈이 "안그래도 연락 한번 하려고 했어요"라고 운을 뗀다.

"실은 제가 글을 ...그러니까 드라마를 다시 쓰고 있는데"라고 은선이 대답하자

"아, 잘됐군요. 언제 방송되나요?"라고 천진하게 물어온다.

"근데 원고를 아직 끝내지 못했어요"라고 하자 "그럼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음 안되겠네요"라며 그가 상기된 얼굴로 말을 한다.

"그게 아니고...결혼, 하셨나요?"라고 그녀는 묻는다.

"그게...네, 했습니다"라고 도훈은 망설이는가 싶더니 했다는 대답을 한다.

그말에 둘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먼저 깬건 은선이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아, 저는 잘 지냈어요.."라고 그는 곰곰이 둘이 함께 했던 시간을 반추라도 하는 표정을 짓는다.

"바쁘실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그녀가 말하자 그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차가 없으면 자기가 바래다 주겠노라 한다. 은선은 호의는 고맙지만, 하고는 서둘러 까페를 나선다.

그자리에서 "오늘밤 저랑 섹스하실래요?"라는 말을 차마 어찌 하겠는가...

그녀는 마침 오는 버스에 올라탄다.그리고 힐끔 창밖을 보는데 까페를 나온 도훈이 저만치 파킹돼있는 suv에 오르는게 보인다.

글렀어...이 글을 끝낼수가 없어....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 집에서 떨려나고 오갈곳 없어진 근미래 이런저런 자신의 모습을..게다가 달랑 한개 있는 신용카드마저 연체기한을 넘겨 신용불량자가 되는것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얼핏 도훈의 차를 본거 같다. 그녀가 시선을 모아 밖을 보자 도훈의 suv가 바싹 옆에 붙어 따라오고 있다. 설마 자기를 쫓아오랴 싶으면서도 그녀는 포기했던 '그와의 섹스'에 대한 미련이 되살아남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것도 '기회'일수 있다는 생각에 중간에 버스에서 내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도훈의 차가 그녀 앞에 와서 멈춘다.


도훈의 섹스는 남도에서보다 한층 원숙하고 감미로워졌다. 하긴 이제는 유부남이니 ... 둘은 한몸이 돼서 좁은 은선의 침대를 뒹굴었다..

그러나 섹스가 끝나고 짧은잠까지 끝난 뒤에는 그녀의 마음에는 죄책감이라는 거북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유유부남과 잤다는...

해서 그녀는 얼른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때 도훈은 방에 없었다. 응? 하고 둘러보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다. 창밖을 내다봐도 그의 suv는 보이지 않는다. 갔구나 와이프한데...나처럼 죄책감을 잔뜩 안고...

그런 생각을 잠시하다 그녀는 섹스로 인해 잊고 있던 원고가 떠올라 서둘러 컴퓨터를 켠다. 문서창을 띄우고 마지막 씬 바로 밑에 커저를 갖다댄다.

그녀는 마법에 걸린것처럼 후반을 써나간다. 확실히 '섹스'만한 자극제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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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도훈이었다.

그는 반가웠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어렵게 실은, 하면서 따로 할 얘기가 있어보인다. 그도 은선을 만나고 싶었다는 말을 하자 은선은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돈이 좀 필요했어요...회사 나와서 친구들하고 벤처 하나 차렸는데 기대했던 지원금이 안나와서"

은선은 어이가 없다. 그 역시 뚜렷한 '목적'이란걸 갖고 그녀를 기억에서 불러냈다는게 여간 불쾌한게 아니다. 그것도 돈문제로...

"근데 사시는거 보니까...."

"얼마가 필요하신가요?"그녀는 비웃는 투로 물어본다. 들어나보자,는 식으로.

"한 5000, 어렵겠죠?"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말 없이 통화 종료를 누르고 컴퓨터 액정으로 눈을 돌린다. 자신은 그가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자책읋 하였는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돈이 필요해 잠깐 스쳐간 여자인 자신을 이용하려 했으니, 그에 비하면 자신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순간, 그녀는 두 남녀의 해피엔딩으로 치닫던 원고를 손봐야겠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클라이막스에서 반전을 넣기로 한다. 남자가 회사 건물 옥상에서 실족하는 걸로 .

남자는 그렇게 30층 빌딩에서 추락해 그자리에서 죽고 만다.


원고를 받아본 pd태석은 원고가 마음에 든다며 당장 보자고 한다.

아자! 은선은 쾌재를 부르며 나갈 채비를 하는데, 봄비가 가늘게 유리창을 적시는게 눈에 들어온다. 겨울이 갔어...영영 갈거 같지 않던 그 겨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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