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약속

by 박순영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영하 10도에 결혼식이 걸렸다. 추운데다 주말이어선지 앱으로 아무리 택시를 호출해도 콜을 받지를 않는다. 순정은 일단 사거리까지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리고는 버스에서 내려 다시 앱을 켜는데 저만치 마침 빈택시가 온다. '빈차'라고 돼있어 다급히 뒷문을 여는데 기사가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다. 강남이라고 대답하자 기사는 멀리 못간다며 내리라고 한다. 그러는 기사에게 순정은 빌다시피 해서 강남 예식장까지 간다. 택시 안의 후끈함에서 벗어나자마자 온몸에 냉기가 파고든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식장이 있는 8층 으로 올라간다. 시간을 보니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축의금 줄 끝에 혜영과 남편이 나란히 서서 하객을 맞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 식장 입구에서 하객을 맞던 풍경과는 많이 달라진걸 느낀다. 줄이 짧아지면서 혜영이 순정을 알아보고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순정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워'라고 말한다. '축하해' 순정은 진심으로 혜영의 큰딸 지우의 결혼을 축하했다. 어릴적 지우는 순정을 '이모'라 부르며 곧잘 따르곤 하였다. 그런 지우가 이제 시집을 간다는 소식에 순정은 자기 자식인양 허탈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식이 반쯤 거행됐을때 원형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는 순정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친다. 응? 돌아본 순정은 처음에는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상대가 "나야 나. 서지은"이라고 한다.

아...지은이...

순정은 아직도 서지은이란 이름 석자만 들어도 그해 겨울 그 전철 플랫폼이 떠오른다. 나란히 응시한 s대에 순정은 붙고 지은은 떨어졌다. "니가 됐으면 된거지"라며 지은은 애써 낙담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다고 그 속을 모를리 없는 순정이었다. 그래서 순정은 대학에 입학후에도 자주 지은을 만나 서로의 틈이 벌어지는걸 막으려 하였다. 그러다 영동 전철역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순정이 깨고 말았다.


순정은 그날 마지막 수업이 끝나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와 교문으로 향했다. 그때 '강순정!'하고 귀에 익은 정욱의 소리가 들렸다. 둘은 cc로 지내다 헤어진 지 두달 만이었다. 순정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헤어진 뒤에도 그를 잊지 못해 같이 공부하던 도서관 3층을 기웃거린게 여러번이다...

그런 그가 그녀를 찾아온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녀는 정욱을 따라갔고 그 시간 지은은 황량한 지상 플랫폼에서 단 한통의 전화도 받지 못한채 추위에 덜덜 떨며 바람을 맞았다.



정욱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순정은 내내 지은을 생각했지만 발길이 돌려지질 않았다. 휴대폰이 귀하던 시절이라 순정은 못나간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일은 순정과 지은 둘다에게 모진 상처로 남았고 지은은 자신이 재수생이라고 무시당한거라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만나자고 계속 연락해오는 순정을 내쳤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보지 않고 나이들어갔고 근 30년만에 혜영의 딸 지우의 결혼식에서 마주친것이다. 혜영과 순정, 지은은 여고때 똘똘 뭉쳐다닌 사이였다.

순정과 지은을 다시 연결해주려고 혜영이 중간에서 무척 노력하였지만 지은쪽에서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 지은이 먼저 순정을 알아보고 다가온 것이다.

순간 순정의 머릿속에 허허벌판같은 그 플랫폼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스무살의 어린 지은이 스쳐간다. 미안해..그말을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해서 전화도 여러번 했고 편지로도 여러번 사과를 하였지만 지은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나, 옆에 앉아도 되지?"라며 지은이 순정 옆의 빈 의자를 바투 끌어다 앉는다.

비록 화장으로 덮긴 했어도 지은의 얼굴에서도 세월이 느껴진다.

"어떻게 지냈어?" 순정이 간신히 입을 열자 "그냥 뭐..들었지? 나 이혼하고 혼자 산거?"라며 지은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는 혜영을 통해 알고 있었다. 사업하던 남편이 부도를 내면서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그러다 남자의 외도로 이혼에 이르렀다고 했다.


둘은 어색함이 가시지 않은채로 피로연이 열리는 뷔헤홀로 이동해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너, 돈줌 있니?" 지은이 불쑥 돈 얘기를 꺼낸다. 너무도 거리낌 없이. 그 말속에는 30년전 빚을 지금이라도 갚으라는 의미가 숨어있는것만 같다.

"내가 무슨...얼마나 필요한데"

"한 1000?"

1000이라는 말에 순정은 씹던 고기를 꿀꺽 삼켜버리고는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그녀에게 지은이 자신의 물을 건네고 그 물을 받아 마신 순정이 간신히 진정을 한다. '한달만 쓰고 줄게'라며 지은이 애원을 한다.


순정은 그날밤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하다 지은이 알려준 계좌로 돈 1000을 입금하기로 한다. 이렇게라도 30년전 그 빚을 갚자는 마음이었고, 당장 돈 1000이 없어 죽는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액정에 뜨는 이름은 지은이 아니다. '하규완'이라는 낯선 남자의 이름이다. 해서 계좌를 잘못 기재했나 하고는 여러번 시도해보지만 계속 그 남자의 이름이 뜬다...지은에게 전화를 걸려하던 순정은 생각을 고쳐먹고 혜영에게 전화를 한다. 이제 막 하객들을 보내고 들어왔다며 혜영은 숨이 턱에 닿아 전화를 받는다.

"너, 혹시 지은이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알아?"

그말에 혜영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후, 한숨을 내쉰다.

"걔, 남자 잘못 만나서 신불됐잖아. 평생 혼자 장사하면서 모은 돈도 몽땅..그러고도 헤어지질 못하는거 같드라."

"혹시 남자 이름이..."

"그거까진 몰라. 왜?"

그렇다면 하규완이라는 남자는 지금 지은의 남자일테고 지은이 신용불량자가 됐다면 계좌 막혔을것이다.그래서 남자계좌 돈 1000을 보내라는 얘긴데 ㆍㆍㆍ

순정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하규완이라는 남자의 전화번호를 달라는 말에 지은은 발끈하지만 순정의 끈질긴 설득끝에 결국 알려준다.

"어찌됐건 내가 사랑하는 남자야. 알지?"라며 지은이 눈물을 글썽인다...


첫눈에도 까페문을 열고 들어서는 남자의 두리번거림에서 순정은 그가 하규완인걸 알아차린다.

순정이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자 규완이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가 주문한 허브티가 세팅되고 직원이 물러간뒤 순정은 준비해온 돈 1000이 든 봉투를 그에게 내민다. 규완이 어리둥절한채 그 봉투를 열어보더니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게 마지막이예요"라는 말에 그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다.

순정은 미리 준비해온 '돈 1000을 받는 대가로 지은과 완전히 헤어지겠다'라는 각서를 그에게 내민다.

"이봐요. 댁이 뭔데..제 3자가 뭔데?"라며 그가 발끈한다.

"그래? 그럼 고소할까?"

그말에 규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뭘로? 지가 좋아서 갖다바친 돈인데 내가 왜?'라며 그가 돈봉투를 안주머니에 쑤셔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까페문이 열리며 험상궂은 남자 둘이 들어선다. 그들에게 순정이 살짝 손을 들어보이자 그들이 규완에게로 다가온다. 규완은 직감으로 위험을 감지한다.

"각서, 안 쓸거죠?"하며 순정이 각서를 다시 집어 넣으려고 하자 종이 한 귀퉁이를 규완이 움켜쥔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순정이 타이핑해 온 내용 밑에 자기의 이름과 주빈번호, 사인을 한다.

"이럼 됐나요?"라는 그의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다..


규완이 도망치듯 까페를 뛰쳐나간뒤 순정은 가방에서 역시 미리 준비해온 돈 봉투 두개를 남자 둘에게 내민다.

"고마워요 도워줘서"라는 그녀의 말에 남자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라도 30년전 지은에게 진 빚을 갚았다는 후련함과 지은이 지금쯤 깊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거라는 생각에 순정은 아무래도 지은에게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저만치 서있는 택시로 걸음을 옮간다. 며칠째 한파와 강풍이 계속 되고 있지만 그래도 지난번 예식이 있던날보다는 많이 적응이 돼있는 자신을 느끼면서 택시에 오른다. 무엇이건 적응하게 돼있다. 지은도 지금 당장은 힘들고 외로워도 곧 적응할 것이다...

기사에게 지은이 산다는 봉천동을 말하자 기사는 빠르게 출발한다

순정은 남편 정욱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늦을테니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한다.

택시밖으로 내다보이는 도심은 평일이어선지 한산하고 강풍에 쓰레기들이 나뒹군다..그래도, 빚을 갚았다는 마음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순정의 안에서 솟구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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