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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Mar 08. 2024

금요일의 연인

지난번 살던 단지는 수시로 분리배출을 할수 있엉 집안에 쓰레기가 쌓이질 않았는데 이사온 이 아파트 단지는 일주일에 한번 금요일만 한다고 해서 1주일동안 잔뜩 쌓아둔 배달앱용기들이며 우유통, 생수페트병을 분리해놓은 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기영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직은 초봄이라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그렇게 자기 동 앞에서 벌어지는 분리배출을 하며 그는 '엇 추워!'를 연발했다. 그러고보니 잠옷위에 카디건만 걸치고 나온건 자기뿐이었다. 다들 한겨울 패딩을 입고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페트병과 일반 플라스틱을 구분해서 넣다가 어? 하는 소리가 기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매주 금요일이면 새벽장이 선다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거기서 자기 또래의 한 젊은 여자가 난롯불에 손을 쬐며 야채를 팔고 있었고 단번에 정미임을 알아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를 잊을 수는 없었다. 그는 분리배출을 마치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다 드디어 정미와 눈이 마주쳤다.



정미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지만 기영은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자 정미도 체념한듯 고개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서오세요"라는 정미의 말에 기영은 순간 숨이 멎는것만 같다. 분명 자기를 알아봤음에도 완전히 남처럼 대하는 그녀를 기영은 뭐라 부르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다.


"오늘 콩나물이랑 시금치 신선해요"라며 그녀가 낮은 매대에 진열된 두가지를 가리켰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기영은 차마 "조정미!"라고 이름을 부를수가 없다. 지난 세월이 둘의 거리를 이만큼 벌려놓은 것이다.

"시금치랑 콩나물, 그리고 두부도 한모만.."이라고 말끝을 흐리자 정미는 재빨리 그가 요구한것들을 비닐에 담아 건넨다. 그가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뒤적이자 "돈은 됐어"라고 그제야 예전에 정미로 돌아갔다.

"어디 가서 차 한잔 할래?"

"지금 문 연 데 없어"라며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고 기영은 우두커니 한참을 서있다."또보자"라며 돌아서서 자기 동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힐끔 돌아보자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정미와 시선이 마주치지만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갈수는 없었다. 



자기를 무참히 버린 여자 조정미. 그때 기영은 지방대를 나와 작은 무역회사를 다니다 거래처 여직원 정미를 알게 되엇고 둘은 그렇고 그런 연애과정을 거쳐 동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정미는 늘 무언가 화가나있는 얼굴이었고 8평 원룸생활이 불편하다며  툴툴댔다. 아무래도 이러다 저 여자를 잃을거 같다는 생각을 기영은 자주 하였지만 애써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미의 불평에 짜증이라도 내는 날이면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미는 화장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회사 늦는다"라며 기영이  재촉을 하자 잠시후 두눈이 벌개진 정미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나왔다.

"뭐야? 왜? 하던 기영의 눈에  정미가 쥐고 있는 임신테스터가 들어왔다.

"너 혹시.."

그녀는 아무말도 않고 "오늘 하루 쉴래"라고 말한다.

"그래, 회사엔 내가 연락할게"라고 하자 "아니, 내가 해. 당신이 왜 해?"라며 볼멘 소리를 했다. 그순간, 정미가 임신을 후회한다는 걸 기영은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사흘후 늦은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정미는 태연하게 "아이 지웠어"라고 했다.

기영은 정미의 임신소식에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당황하였다.

"그런게 어딨어 나랑 상의도 안하고"라고 하자 " 요즘 애낳고 키우는 데 얼마 드는지 알아?"라며 그녀가 울먹울먹 하더니 그만 수저를 내리고 침대로 가서 흑흑 흐느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기영은 안쓰럽기도 원망스럽기도 하엿다. 

이미 죽어버린 그 아이를 놓고 그가 해댄 상상이 얼마며 행복감이 또 얼마였는데...


그후로 둘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고 급기야 정미는 어느날 만찬에 가까운 저녁을 차려놓고 그의 퇴근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식사가 끝나갈즈음, 오래 준비해온 사람처럼 '이제 끝내자'라고 하였다.

"정미야"

"나, 이렇게는 못살아. 답답해. 방음도 안된 원룸, 수시로 막히는 변기"

"우리 이제 적금타잖아. 그걸로 넓혀가고 결혼하자"라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봤어 어제"라고 그녀가 털어놓는다.

"뭐?"

"자기 사업하는 사람이래. 기영씨, 나 놔주라"라고 그녀가 말했다.


기영은 서로 처지가 비슷해 그것이 결혼까지 가는 매개가 되려니 했는데 정미는 가난이라는 현실을 늘 버거워해왔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기영은 그녀에게 밤새 매달리시피 했고 설득까지 하였지만 정미는 결국 그다음날 짐을 싸서 본가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기영은 여러번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둘의 이별을 되돌릴 마음이 없어보였다.

"그래. 잘먹고 잘살아라!"며 기영이 볼멘 소리를 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정미가 그의 허리를 안아왔다.

그가 몸을 돌리려하자 "그냥 있어 잠깐만"이라며 그녀가 울먹였다. 

자기에게로 돌아오려는 제스쳐가 아닌 이별의 마지막 의례임을 알고 기영은 먹먹해졌다. 



그렇게 떠나간 조정미.

그후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날 기영은 소주 일곱병을 안주도 없이 퍼붓고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이틀만에 퇴원한 그가 들어선 정미와 살던 그 작은 방이 주던 쓰라린 고독감을 그는 여태 잊지 못하고 있다.


정미를 새벽장에서 본 이후로 기영의 일주일은 내내 그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그를 밀어내는 태도를 보였다. 아마도 자격지심에 그랬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제 와서 뭘'하며 그도 체념하려 하였지만 그게 되지를 않았다.

그 다음주 분리배출 날은 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새벽까지도 이어졌다. 기영은 혹시나 정미가 또 와 있을까 기대를 하고 나갔고 정미는 지난주처럼 그 자리에서 야채를 팔고 있다. 분리배출을 마친 기영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는데 그 모습을 정미가 보았다. 이렇게 된 바엔 차라도 한찬 하는게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기영은 정미에게로 다가갔다.

"집에 올라가서 차 한잔 할럐? 아니, 하자"라고 그가 용기를 내자 정미는 "그럴 시간 없어"라며 매정하게 거절했다. 그말에 기영은 맥없이 돌아섰지만 10분후, 직접 내린 원두커피 두잔을 들고 다시 나와 한잔을 정미에게 내밀었다.


"남편사업이 잘 잘안됐어  그리고는..."이라며 그녀가 말을 맺지 못한다.

"아이는?"

"딸 하나 있어. 죽은 아빠를 무척이나 그리워해"라는 말에 기영은 깜짝 놀란다.

"죽다니....그럼..."

"응. 자살"이라고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남은 커피를 다 바시고는 커피잔을 기영에게 돌려준다.

"옛날 그맛이야"라며 희미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기영은 둘이 아침이면 이렇게 커피를 내려 같이 마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춥다 비와서. 들어가 얼른"이라며 그녀가 난로에 손을 쬔다.

"넌 몇시까지 여기 있니?"라는 그의 물음에 정미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음주에 또 보자"라며 그가 비워진 커피잔을 양손에 쥐고 안으로 들어간다.


정미가 그렇게 집에서 나간 후 기영은 한동안 폐인으로 살았다.그러다 다니던 회사까지 부도가 나고 오갈데 없어진 자신을 학교선배 s가 거두어주었고 회사는 조금씩 커나갔다. 그리고 그는 팀장까지 올라갔고 그렇게 대출을 받아 외곽에 작은 아파트까지 사게 되었다. 언젠가 tv드라마로 보았던 재벌여자와 가난한 대학생의 뒤바뀐 운명까지는 아니어도 기영은 이제 최소한의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정희가 내 공간에 들어온다면, 이라는 상상은 내내 꼬리를 물고 따라다녓다.

다시 보자고 하면 만나줄까, 하다가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 사실에서 막히곤 하였다. 그 아이가 아빠 아닌 다른 남자에게 정을 줄까싶어 그는 망설였다.


기영은 정미를 잃고 난 뒤 한번도 여자를 가까이 한적이  없었고 그래서 어쩌면 돈을 모을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로 인해 다시는 아파하지 않고 여자에게 기만당하지 않겠다고 그는 굳게 다짐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 안에 , 인생의 여자는 딱 하나 조정미였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여러날을 고민한 끝에 그는 정미에게 청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그녀의 처지가 어떻든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분리배출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정미와 자기 애를 하나만 낳고 지금 정미의 딸과 똑같이 키우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 주 분리배출일에 정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은 여느때처럼 섰지만 그녀의 자리엔 생선코너가 들어섰다. 가버린걸까...

"저 혹시 여기서 야채 팔던 젊은 아가씨..아니, 젊은 여자는..."이라고 묻자 생선장사가 물끄러미 보더니 대답한다. 

"우린 서로 몰라요.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같이 장사를 할 뿐이지"라며 조금은 귀찮다는듯이 대답한다. 그말에 기영은 이제 어디가서 정미를 찾나 하는 막막함과 그녀를 다시 잃었다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버린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동안은 새벽장이 서면 정미를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그날도 그녀가 오지 않은걸 확인하고 허탈해서 돌아서는데 뒤에서 '기영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하며 그가 돌아보자, 말끔히 차려입은 장미가 웃으며 서있다.

"집구경좀 해도 돼?"라는 그녀의 말에 기영의 얼굴이 환해진다. 

"나 배고프다. 밥좀 주라"라며 그녀가 살짝 울상을 지어보인다

"밥 많아. 너 좋아하는 간장게장도 사다놨는데"라며 기영이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그렇게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린다.

"니 생일"이라며 기영이 도어락 비번을 누르며 번호를 알려주는데 뒤에서 정미가 묻는다.

"우리 애도 잘 키워줄수 있어?"

"그럼..."하며 기영이 따스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서자 그는 그녀를 안았다.


이후 정미는 다시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알려준 휴대폰 번호는 결번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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