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영 Mar 25. 2024

언약

기존작품이 하나도 없는 신인작가를 컨택해놓고 기현은 내내 후회하였다. 원고 받아보고 퇴짜놔도 되지만  그런일을 에사로 해대는 동료나 선배들을 보며  비난을 일삼아온 자기가 이번엔 자신이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

이번 작가공모를 통해 선발된 민영과는 작가워크샵때 몇번 강의를 하면서 사적인 말을 나눠봤고 한달에 한번씩 제출하는 단막극을 읽은 정도일 뿐이다.


제발 원고가 잘 나와야 할텐데...

안그래도 방송국에서 단마극은 돈이 안되기때문에 부정기적으로 가거나 아예 폐지 할 생각까지 하고 있는터에 원고가 좋지 않으면 그 뒤가 난감하다.

"뭘 믿고 단독 작가로 가"라며 동료s는 비아냥대기도 하였다. 그는 단막극 하나에 컨택하는 작가가 서넛은 되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원고를 고르는 식이었고 그 외에도 많은 pd들이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곤 하였다.


원고를 받기로 한 시간이 다 돼자 기현은 이런저런 감정이 뒤엉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띠띠링, 하고 메일 알람이 울린다. 열어보니 약속한대로 민영의 원고가 와있다.



그렇게 애를 태우고 속앓이를 했던 민영의 원고는 대학초년생의 청초하고 눈부시게 맑은 청춘기를 너무나 아름답고 애틋하게 그려냈다. 그럼에도 돈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에둘러 그려내 결코 만만찮은 느낌을 주는 수작이었다. 초고에서 별로 수정이나 다듬지도 않고 기현은 촬영을 나갔고 후반 작업때 민영을 편집실로  불러 함께 보기도 하였다.

그즈음, 민영의 <사랑의 노래>가 꽤 괜찮다는 입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고 기현은 앞으로도 민영과 계속 가기로 하였다.  단막극에서 시리즈물로, 그리고는 주말극까지 평생의 콤비로...


<사랑의 노래>는 예상대로 시청률도 높게 나왔고 호응도도 좋아 기현은 그 다음 작품을 하기 위해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다른 작업하시는 거 없죠?"

"네, 아직은..."

"그럼 , 한번 더 합시다 우리"라는 말에 민영은 대뜸 "고맙습니다"라고 응대를 하였다.



그러나 민영은 원고를 주기로 한 바로 전날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정이 생겨 원고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기현은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전화를 하였지만 민영의 전화는 '통화중입니다'가 흘러나오는 수신거부 모드로 설정돼있다.

신인이, 그것도 딱 한편 한 작가가 이렇게 약속을 어긴다는건 이 바닥 생활을 접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어서 이걸로 김민영이라는 작가도 끝이구나, 생각하며 기현은 서둘러 아는 작가들에게 전화를 돌려 완성고 여부를 물었다.


"김민영 , 이번에 태현 형이랑 3부 특집극 들어가잖아"

이말을 동료  s에게 들은건 촬영일이 바싹 다가온 어느 점심무렵이었다. 조연출 시절 친분있던 작가w에게 원고를 받긴 했지만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 안그래도 이걸 찍나 마나를 고민하는 그에게 s의 말은 충격으로 와닿았다.

'태현이형'이란 cp를 말했다

"그거사실이야?"

"야, 지난번 니들 <사랑의 노래> 좋았다고 태현이 형이 입에 거품 문거 몰랐어?"라는 말에 잘 쓰고 잘 만든 탓에 결국 작가를 뺏겼구나 싶다. 어떻게 한방에서 선후배로 근무하는 처지에  남의 작가를 뺏아갈까, 하는 생각에 기현은 당장이라도 cp에게 가서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은걸 간신히 참는다. 그리고는 애써 감정을 누르고 민영에게 전화를 하자 이번엔 벨이 서너번 울리고 연결이 되었다.

"말씀 들었습니다. 이번에  특집극 하신다고요..

"...죄송해요. 지난번 <사랑의 노래>잘 만들어주신거 보답도 못하고"

"다음엔 나랑하는 겁니다"

" 고맙습니다. 이해해주셔서"라며 민영은 자기가 조만간 밥을 꼭 사겠다고 했다.



방송계라는게, 특히 드라마파트에서 pd와 작가는 서로 공생하는 관계다. 사실, 이런 일은 흔하디 흔한 작가쟁탈전이라 하소연할 '꺼리'도 안되었다. 제 아무리 재능있는 pd도 작가 잘못 만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그 반대 역시 성립하는게 제작국이라는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좀 '쓴다'하는 신인 작가들 주변엔 일찌감치 그들을 '선점'하려는 pd들로 북적이곤 한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w의 원고로 작품을 만든 기현은 예상대로 시청률도 반응도 시원치 않았고 이러다 한직으로 발령이 날수도 있겠다 싶어 다음엔 무조건 민영을 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w의 작품 <혼돈의 집>이 나가기도 전에 민영과 약속해 다음 원고를 받기로 하였다.

이번엔 그림에 신경 쓰고 싶다는 생각에 그는 스크립터, 민영과 함께 지방 한 저수지 답사까지 다녀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약속을 어기랴 싶었다..


동료 s는 이번에 시리즈물로 옮겨간다며 은근 자랑을 하였다. 단막극에서 막히는 pd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결국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는 일도 허다했다. 그리 되지 않으려면  기현은 무조건 민영을 잡고 있어야 했다.


민영으로부터 넘어온 초고를 다듬던 기현이 냉장공에서 맥주를 꺼내 한모금 마시는데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라 기현은 누굴까 싶었다. 설마,  헤어진 수경은 아니겠지,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인것도 사실이다. 3년의 연애끝에 상견례까지 마친 그녀가 어느날 불쑥 이별을 고했다. 뒤늦게 알게 된건, pd라는 직업을 마뜩치 않아했던 그녀의 모친이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 아들과 연결해주고 상대가 적극적으로 나와서 결혼을 약속하였다는 것이었다...

함께 한 시간, 서로 주고받은 언약의 말들, 그 모든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던 그 뼈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면서도 제발 수경의 전화이길 바라고 폰을 봤지만 작가 민영의 전화였다.


"아, 작가님...무슨 일로"

"죄송해요. 수정, 못하게 생겼어요"

"그게 무슨...이제 와서 그러면"

"몸이 좀 아파요. 죄송합니다"라며 그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그가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씨발...그의 입에서 욕이 새어나왔다..



"선배 몰랐어요? 이번에 김민영 작가, s 선배랑 미니 들어가잖아요"라며 조연출 지욱이 말했다.

"뭐? s랑?"

"네...그래서 아마 선배 거 못한다고..."

그말에 s의 책상쪽으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책상은 비어있었다.

지난번에 민영을 cp에게 뺏겨 분해하던 자신을 다독이던 게 s였다. 그런 s가 이번엔 그 짓을 한것이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수 없다는 생각에 기현은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영은 운전중이라며 끊으려고 하였지만 그런 민영에게 "그렇게 살지 마!"라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전화는 끊어졌다... 창밖을 보니 벌써 봄꽃이 다 지고 있다. 여름....

불쑥 수경이 생각났다. 그녀를 처음 본 것도  초여름이었다. 선배 작품의 조연출을 하던 그때 야외촬영지에서 수경과 만났다. 기현은  순간 그녀가 미치게 그리웠다...이럴때 수경이라도 있었으면....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뻔 한 기현은 애써 자신을 추스리고 제작국을 나와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그순간 그의 앞에 믿을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저만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수경이 보였다. 기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수경이었다.

"너..."하며 그자레에서 굳어버린 기현을 향해 수경이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다가왔다.

"잘 지냈어?"


둘은 로비 대리석 의자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지금쯤, 그놈한테 시집갔겠지 했는데..."

"헤어졌어..너무 안맞더라. 가부장적이고 나를 억업하려고 해"

그말에 기현이 물끄러미 수경을 쳐다본다.

"그럼, 다시 와줄래? 너는, 너만은 나 배반하기 않고 내 옆에 있어줄래?"

그말에 수경의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울보"하며 기현이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엘리베티어가 열리며 한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온다. 멀뚱히 그들을 보던 기현과 s가 눈이 마주쳤다.

s는 기현옆의 수경을 힐끔거리더니 다가왔다

"들었다.. 너 민영 작가랑 이번에 미니 시리즈 한다며?"라고 기현이 볼멘 소리를 했다.

"그게..."라며 그가 주저했다

"왜, 뭐가 잘 안되냐?"

"호흡이 짧아. 단막극에나 맞는...그래서 "

"그래서 깠어?"

"아니 모르잖아. 다른 원고가 제대로 나와야 김민영을 까지"

다시말해 더블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기현은 저도 모르게 s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 광경에 수경이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나쁜 새끼...더러운 새끼..."라며 그가 한대 더 치려는데 수경이 간신히 말리고 저만치 끌고 간다.

그 소동의 전말을 대강 눈치챈 제작국에서는 아무도 나와보질 않았다. 흔히 있는 일이므로....



바다가 보이는 동해 어느 펜션에서 신촌 첫날밤을 맞게 된 기현과 수경이 나란히 하객몀단을 훑어보고 있다. 그러던 기현의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새나온다. 왜?하며 수경이 궁금해하자 "이 여자"라며 그가 "김민영"이라고 기재된 이름을 가리킨다.

"아는 여자?"

"내 작가...아니, 한번 같이 했던...웃기네 이 여자. 오갈데 없어지니까 이젠..."이라며 그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래도 와주었음 고마운거 아냐?"라는 수경의 말에 기현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바깥 파도소리도 멀어지고 요요한 달빛이 창으로 새어들었다.


"저 이기현입니다. 잘 지내셨죠?"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에게 12부 미니시리즈를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졌고 그는 고심끝에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결혼축하드려요 감독님.  안그래도, 제가 써둔게 있는데" 라며 민영이 반색을 하였다.

"이런 얘기 어때요? 신인작가가 이것저것 재다 팽당하는..."

그러자 민영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식상한가? 그럼, 뭐 요즘 젊은애들 보는 판타지,  스릴러, 호러, 이런건 돼요?"라며 그가 퉁명스레 말을 하자 민영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는지 " 다시 전화드릴게요"라며 끊었다.

그날 하루 종일 미니시리즈 스토리 라인을 잡은 기현이 그날저녁 퇴근길 주차장에서 다시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두세번 울리자 연결이 되었고 "아까는 죄송했어요..아니...지금까지  모두 죄송..."하더니 그녀가 울먹이기 시작하였다.

"나 김민영씨 울리려고 전화한거 아니고요, 작품 하자고 전화한겁니다"

"..."

"써둔거좀 볼수 있을까요? 나도 잡아놓은 줄거리가 좀 있고"

"....제가 갈까요?"

"아뇨, 제가 갈게요.. 신촌 어디죠?"


그렇게 방송국 주차장을 빠져나온 기현의 차는 신호 직전에 매끄럽게 사거리를 빠져나가 신촌으로 길을 잡는다. 이른 달이 뿌옇게 빛을 발하는 초여름 저녁공기를 흡입며 기현은 오랜만에 행복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