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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Mar 24. 2024

여름비

현수는 가연이 선물로 보낸 e북을 여태 다운 받지 않고 있다. 일때문에 바쁘다더니 역시 여유가 없구나,하고는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선물을 취소할까 하다 며칠만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가연이 수혁과 헤어지면서 입은 막심한 경제적 피해를 만회하는 데에는 현수의 도움이 컸다. 비록 적은 급여라도 지금의 라디오일을 잡게 해준 사람이 현수였기 때문이다.


"나 한번도 방송 글 써본적 없는데?"라며 주저하는 가연에게 현수는 "니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때야?"라며 핀잔을 주었고 현수의 대학 선배가 지금 모 방송국 라디오 pd로 있는걸 알게 됐다며 그에게 가연의 이야기를 해놓았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가 불러주는 이메일 주소로 이력서와 데모원고를 보내라고 하였다.


글이라면 대학시절, 교내 문학상에 당선작 없는 가작 입선한 단편소설을 써본게 다인지라 가연은 영 자신이 없었지만 수혁이 가져간 자신의 피같은 돈을 생각하면 현수의 말대로 뭐라도 잡아서 보충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제 한두달이면 자신의 잔고도 바닥이 날테고 지금 오피스텔도 팔아야 할 상황이어서 '그래 한번 보내나 보자'하고는 pd 의 이메일로 자신의 이력서와 짧은 원고를 보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가연은 외국계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오래 하다 최근 한국지사가 철수하면서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그게 아니어도 수혁에게 5년간 시달리다보니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던 차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수혁이 두번씩이나 친구들과 벤처를 하겠다고 가져간 돈이 적지 않았고 그렇게 돈을 가져간 다음에는 어김없이 그녀를 배반했고 돈이 떨어질 즈음이면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수혁의 atm이었다.


그렇게 두번째 it 벤처 회사까지 망한 다음 수혁은 대뜸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 말은 그때까지 월세로 있던 오피스텔에서 나와야 하는 형편이라는 말이었고 가연은 더 이상 끌려 다닐수 없다는 판단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언제가 되더라도 내 돈은 갚아'라고 하자 수혁은 쌍욕을 해대며 그녀를 비난했고 가연은 5년의 긴 연애을 마감했다. 이후로도 수혁은 술이 올라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가연은 응답하지 않고 그렇게 석달이 흘렀다.


pd황은 가연의 이메일을 열어보고 그녀가 써보낸 데모원고를 읽고는 그 다음날 연락을 했고 그렇게 가연은 얼마 안되는 급여지만 일단 일을 잡게 되었다. 처음엔 낯선 방송글에 여러번 지적도 당하고 했지만 그것도 한달 정도 지나니 익숙해져 pd가 다시 수정하는 수고로움을 덜게 해주었다.



"나야. 방송국 앞"이라며 현수가 전화를 걸어온건 마침 급여일이었다. 작가같은 프리랜서는 정해진 급여날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돈 주는 일이 지체되는 경우가 허다한데도 pd황은 그런 면에서는 정확했다. 안그래도 현수에게 밥 한끼는 사야 할거 같아서 가연은 방송국 1층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너 좋아보인다"라며 현수가 파스타를 다 먹고 물로 입가심을 하며 씩 웃어보였다.

그러고보니 현수를 알고 지낸것도 거의 10년이 돼간다. 현수는 바로 옆 대학이었고 어느날 가연의 학교로 원정 농구를 하러 왔다 우연히 알게 된 케이스였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학교를 오가며 만났고 술을 같이 먹었고 각자 실연이라도 당하면 만나서 서로를 위로해주곤 하던 정말 '막역한'사이였다.

가연은 자주 생각하였다. '이런 이성 친구가 있으면 굳이 결혼하지 않고 살아도 좋다'고.

그런 현수덕에 수혁이 남기고 간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면 아문 셈이고 이렇게 돈벌이까지 주선해준 게 여간 고마운게 아니었다.



"일은 재밌구?"라며 현수가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물어왔다.

"하다보니 재밌네. 처음엔 구어로 글을 쓰는게 낯설었는데 이젠 그게 더 해졌어"

"야, 너 방송장이 다 됐다"라며 현수가 되레 좋아했다.

"너, 언제 결혼하니?"

현수에게는 1년 조금 넘은 여자친구가 있었다. 가연이 알기로는 피아노학원에서 강사를 한다는데 현수는 '소개시켜 줄게'라면서도 여태 한번도 그녀를 만나게 해준적이 없다.

"그게 잘 안됐다'라며 현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보기엔 당연히 이번엔 결혼으로 이어지려니 했기에 가연은 내심 현수가 안됐지만 굳이 내색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연락오겠지 뭐"

"지난주에 시집갔다"

그말에 가연은 아, 하고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쩌다..."

"그렇게 됐다"


이제 서른중반이 돼 가는 나인데도 둘다 이성문제, 결혼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는게 가연은 속이 상했다. 둘중 하나라도 잘 됐으면 했는데...

"니  덕에 오피스텔 당장 팔지 않아도 되게 생겼어"라고 가연이 말하자 현수는 금세 안색을 바꿔 "그놈은 이제 연락 안하는 거지?"라며 확답을 듣고 싶어했다.

"어..."

"차단, 했어?""

"응"

그말에 현수는 조금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오늘 이거 내가 사는 거"라고 가연이 말하자

"오늘 돈 탔냐?"

"응. 니 덕에"라며 그녀가 웃자

"야 임마 그럼 현금으로 줘야지"라고 하였다

"그런가?"라며 가연이 폰을 열고 이체 하는  시늉을 하자

"농담농담"하며 그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보름후, 현수는 다시 연락을 해왔다. 직전에 녹화가 끝나 가연이 부스 뒷정리를 혼자 하는데  현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나는 길이라며...

하기사 매일 보면 어떠랴,하는 마음으로 가연은 서둘러 부스를 나와 현수와 약속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현수는 그동안 이발을 해서 전체적 인상이 확 달라져있었다.

"머리 깎았네?"

"백수 티가 너무 나잖아"

"백수?"

현수는 사촌형이 하는 작은 무역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져 한동안 힘들어하다 요즘 다시 경기가 좋아졌다고 한거 같은데 백수라니...

"아무래도 내 사업을 해야 할거 같아. 이 나이에 어디 받아 주는 데도 없고"라는 말에 가연은 퍼뜩 수혁이 떠올랐다. 이런 말 뒤에는 꼭 '돈이야기'가 나오곤 하던..


지난번 먹은 그 파스타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가연은 아무래도 이 부분은 분명히 해야 할거 같다

"미안한데 돈때문에 , 그 얘기 하러 온건 아니지?"

그말에 현수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날 뭘로 알고"

"아, 미안"

"하긴, 그 자식한테 니가 웬만큼 당했어야지"라며 그가 유리잔에 담긴 물을 마신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라며 가연이 자세를 고쳐앉는데

"그러게..."라며 현수가 애써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현수가 자신에게 돈 얘기를 하러 온거 같다는 생각에 가연은 이틀밤을 꼬박 잠을 설쳤다. 자신의 처지와 이리 된 경위를 알면서 어떻게...라는 생각과 그래도 현수라면 자신이 여건이 되는 한에서는 도와야 한다는 반대 생각 사이에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에 와본 대학교정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저만치 비를 피해 곧잘 올라가던 작은 동산이 없어지고 그 자리엔 둔중한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안그래도 작은 공간이 더더욱 비좁고 답답하게 여겨졌다.

"야, 니네 학교 이젠 제법 대학 교정 같다"라며 현수가 낄낄 댔다

"그래, 니네 학교 부자라서 좋겠다"라며 가연이 투덜댔다.


둘은 오랜만에 학교나 가보자는 말에 주말에 학교를 찾았다. 담장만 넘으면 곧바로 서로의 학교인지라 두 학교 모두 둘러보기로 한것이다.

둘이 그렇게 운동장을 지나는데 저만치서 예전의 현수가 한것처럼 농구에 열중해있는 한무리의 남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수는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쳐다보았다.

"너도 가서 하구 오든가"

현수의 마음을 읽은 가연이 그리 말하자 "기다릴래?"하고는 마침 자기 앞으로 굴러온 농구공을 집어들고 무리에 합류했다.



이렇게 현수가 자기 학교에 와서 농구를 하던 모습은 대학시절 가연의 아름다운 추억의 하나였다.

물끄러미 그런 현수를 쳐다보다 그녀는 문득 '현수와 결혼해도 좋겠다'라는 생각에 이른다. '내가 프러포즈 할까?'라는 생각을 하자 쿡 ,  웃음이 새어나왔다


농구를 마친 현수와 학교 앞 호프집에 들어서서 피처 2000cc에 과일 안주를 시키고 한참 수다를 떨다보니 정말 예전 대학시절로 돌아간것만 같다.

"잊어아 잊어"라며 가연이 가볍게 그의 잔에 건배하자

"뭘?"하고 의아해하더니 "아 걔...다 잊었다 벌써. 니가 있는데 뭐"라며 현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밤 둘은 취기를 핑계삼아 대학 근처 모텔로 향했고 처음으로 동침을 하였다.

그런말을 한거 같다. "너라면 결혼해도 좋을 거 같아"라고 가연이 ....

다음날 새벽, 일찍 문을 연 해장국 집에서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다 현수가 힘겹게 말을 꺼낸다.

"이거 정말 하면 안되는 얘긴데..."

"돈 얘기면..."

"그래. 너, 어떻게 당했는지 다 아는데. 밥이나 먹자"라며 현수가 말을 끊으려 한다.

"...얼마나 필요한데?"


현수는 가연이 대출받아준 돈으로 예정대로 작은 완구사업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동도서까지 취급하게 되었다.

"은근 책이 잘 나간다"라며 현수가 소줏잔을 비우며 좋아했다

"내 돈 떼먹음 안돼!"라고 가연이 쐐기를 박자 "니돈이 내돈이고 내돈이 내돈인데 뭐"라며 그가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밤, 둘은 두번째 동침을 하였다.

현수는 일이 잘 풀려 조만간 중국거래를 할거라며 곧 출국 한다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중국출장을 간 현수를 놀래키고 싶다는 생각에 가연은 녹화가 끝나자마자 택시로 인천으로 향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운전을 못한다는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어서 가연은 현수와 결혼하면 제일먼저 운전부터 그에게서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지금쯤 컨베이어 벨트서 자기 수하물을 찾고 있겠지, 하며 택시에서 내린 가연의 눈에 저만치 현수가 들어왔다. 현!....하고 부르려는데 그 옆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가 그에게 밀착해 공항에서 나오는게 보였다. 뭘까...지금 이 상황은...


그때 마침 현수가 가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주저하더니 가연에게로 다가왔다

"설마, 나 마중 나왔어?"

하지만 가연의 시선은 어린 그녀에게 꽂혀있다.

"우리 직원..."하며 그녀를 현수가 소개시키려 한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오빠 많이 도와주셨다고"라는 그 어린 여자의 말에 가연은 순간 현기증을 일으키고 만다. 휘청이는 그녀를 현수가 재빨리 잡아준다.

"됐어...너, 마중 나온거 아냐. 유학간 친구가 온다고 해서.."라며 가연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번에 중국 일 잘 성사되면 니 돈 갚으려고 했는데"

"그래서....언제 되는데?"

"조금 늦춰질거 같아. 상대가 의심이 많더라고. 해서, 여기 현장 보고 결정한대"

"알았어.."


그렇게 약속한 기일이 되면 현수는 그래도 꼬박꼬박 돈이 늦어지는 이유를 말해줬다.

그래도 다정하고 세심한 구석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연과 동침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니들, 깊은 사이 아직 아니면"

가연쪽에서 힘들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여자에게 잠시 흔들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난주에 부산 다녀왔어. 걔 친정이...그러니까 본가가 그쪽에"라며 현수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장 "니 돈..."하며 돈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그래, 빨리 줘 . 내 사정 알잖아"

"너, 남자한테 돈 막 주고 그러지 마. 만약 혼자 살게 되면 돈이 필요한데"

이제 서른 중반인 가연이 줄창 혼자 살거라고 얘기하는 현수가 순간 얄밉고 원망스러웠다.

"나랑은 왜 잔거니?"

"그건...그건 미안했다"라며 현수가 이미 비워진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음이나 모질든가...



현수와 헤어져 택시에 오른 가연은  도심을 통과하면서 세상엔 '다정한 타인'이 많다는 생각을 한거 같다. 하지만 온갖 악질짓을 다 하고 떠난 수혁이나 현수가 결과적으로는 별 차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술기운에 잠시 졸음이 몰려왔고 꿈결인듯 메시지 알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눈을 뜬 가연은 자신이  현수에게 보낸 e북 선물이 마감기한이 다돼서 자동 취소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한다...그러다 밖을 보자 맑은 하늘에  갑자기 여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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