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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Mar 23. 2024

믿었던 그대

소진은 하루종일 그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는 받지를 않는다. 중간에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를 여러번.. 3년 연애도중 둘이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한건 아마도 수십번은 되리라. 그렇게 힘들게 끌어온 만남인만큼  소진은 가능하면 결혼으로 매듭짓고 싶지만 다 된 결혼이야기라고 믿으면 그는 틀어버리곤 하였다.


"나, 니 명의  집엔 안 들어가 "라며 현욱은 약속을 뒤집곤 하였다.

분명 이전에 소진의 집에서 신혼을 시작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조금만 기분이 상하거나 마음에 안들면 그는 이런식으로 모든걸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누구 명의의 집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건 알고 있지만 집 명의까지 바꿔주면서까지 결혼이란걸, 그것도 현욱과 하기는 싫은것이 솔직한 그녀의 심정이었다.

대학졸업후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지금의 출판사에서 딱 10년을 편집기자로 일해온 그녀는 이미 회사에 결혼으로 인한 퇴사를 말해놔서 그걸 번복한다는게 쉽지 않았고 설령 계속 다니게 된다 해도 구설에 오를게 뻔했다. 현욱과 결혼하면 편집 외주 프리랜서로 일을 하면서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방송극을 써서 목돈을 벌어보겠다는 그녀의 계획과 바람도 물거품이 되는듯 했다.


이번에 또 현욱과 틀어진건,  영화를 보러 가서였다.

현욱은 무인발권기에서 티켓을 한장만 구매하였다.

"내거는?"

"니건 니가 사"라며 매몰차게 나오던  그를 소진은 더이상 견딜수가 없었다

"이럴거면 혼자 오지, 왜 같이 오자고 했어"라고 쏘아붙이자

현욱은 안경을 고쳐쓰며 그녀를 노려보더니 아무말없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조금전 그녀가 값을 치룬 샤브샤브 정식을 정신없이 먹어대놓고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수 있을까, 하며 소진은 영화를 보지 않고 상영관 앞 의자에서 2시간을 내내 기다렸다. 이번엔 어떻게든 결말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는 2시간의 긴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는 현욱에게로 다가가서 "얘기좀 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욱은 "할말 없어"라며 그녀를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버렸다. 그녀가 따라서  타려하자 '만원'경고벨이 울려 그렇게 둘은 따로따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현욱의 차가 주차돼있는 옆건물 주차장에서는 만날줄 알았지만 현욱의 흰 suv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쯤이면 이미 끝나버린건가, 라는 생각이 들수 밖에 없는 소진은 잘 알지도 못하는 신촌거리 여기저기를 헤매다 어둑해서야 외곽 자기 아파트로 돌아왔다.

온수에 몸을 담그자마자 울컥 설음이 복받쳤다.


담당기자와 작가로 현욱을 만나 그의 적극적인 대시로 사귀기까지 하였지만 그의 잦은 변덕을 받아준다는게 여간 피곤하고 고된게 아니었다. 그러다보면 소진 자신의 자존감은 곤두박질을 쳤고 꼭 싫다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여자꼴이 돼서 그녀는 몇번이나 이 관계를 끊으려 하였지만 그러면 또 현욱쪽에서 놓지를 않았다.


현욱은 아무리 없이 살아도 차는 있어야 한다며 하필 그녀가 폐렴에 걸려 입원해있을 때 새차로 바꿔달라고 닦달을 하였다. 기자 월급이 빠듯한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 그것도 병상의 그녀에게 그렇게 채근한 것에 그녀는 적잖이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의 말대로 요즘 '차없이 산다는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출을 받아 그의 지금 suv를 사주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싶었지만, 어느날 현욱이 불쑥 "카드 없이 살려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라고 토로하였다.

현욱은 한때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그때 번 돈으로 신촌에 꽤 크게 술집을 냈는데 그것이 도중에 부도가 나면서 신용불량자가 돼버렸고 그래서 지금은 신용 카드 한장 없이 지내는 형편이 돼버렸다.

안그래도 번번이 음식값이나 주유비를 내야 할 때 자신의 카드를 주는게 번거롭고 현욱 입장에서는 모멸감도 느낄것 같아 소진은 카드 한장을 주려 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소진이 내민 카드를 현욱은 마지못해 받는 시늉을 하더니 '쓸일이 있을까'라고 말하면서도 자기 폰 지갑에 넣었다 .  그리고는 바로 그날 오후부터 그는 줄창 카드를 긁어댔다. 조금전 밥을 먹고 헤어졌음에도 먹거리 비용으로 5만원 넘게 쓰더니 이어서 주유비로 20만원...

이런식의 그의 폭주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한도설정을 해야할거 같아. 한달 50만으로 설정한뒤 그에게 알려주자 그는 대번에 '내가 그지냐? 안 써"람며 화를 냈다.

하기사, 돈 50으로 어떻게 도시살이를 하랴 싶어 소진은 한도를 풀었고 이후로 한달에 최소 200은 그의  카드비로 지출을 해야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자신의 카드를 쓴다는것은  '장래를 같이 한다'는 언약으로 여기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현욱은 조금만 심사가 뒤틀리면 관계에 흠집을 냈고 그것이 계속되다보니 소진은 지칠대로 지쳐버려 '이별'을 통보해야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잘못을 소진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곤 했다.

다신 안본다, 혼자 사는 한이 있어도 다신 현욱을 보지 않겠다 다집하고 애써 참고 있노라면 그는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다시 연락을 해왔고 그렇게 질질 끌려가듯 그 관계는 오랜 시간을 계속돼왔다.


며칠전 영화관 일도 있고 해서 소진은 이번엔 분명하게 매듭을 지어야겠다 생각하고 회사일도 하는둥 마는둥 하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현욱은 받지 않고 음성사서함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퇴근하면 아무래도 그의 집으로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소진은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하고 조금 일찍 나와 택시를 잡았다.

어릴때 교통사고를 당한 기억에 그녀는 운전 배울 엄도를 내지 못하고 여태 뚜벅이로 살고 있다.

그렇게 현욱의 원룸 건물 앞에서 내린 소진이 다시 전화를 하자 이번에는 거의 끊어질 즈음 현욱이 전화를 받았다.

"왜"

예의 퉁명스런 그의 음성에 소진은 할말을 잃는다...

"우리, 이제 안 보는거야?"

"야 전화끊어!"라며 그가 화를 끊을 태세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거나 알자"라고 소진이 다급하게 말을 잇자

"가끔은 눈 딱 감고 봐주는게 없어 넌. 시시콜콜 따지고 카드비 몇푼 대준다고 날 거지 취급해" 라며 그가 볼멘 소리를 한다.

소진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 무시하거나 거지취급을 한적이 없다

"아무튼 만나 우리 . 자기 집 앞이야"

"보고싶음 니가 올라오든가 아님 그냥 가든가 맘대로 해!"라며 그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진은 '뚜뚜'거리는 폰을 한참 들여다보다 이제는 정말 마침표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부인양, 거의 그렇게 된양 대해오고 챙겨준 상대가 저렇게 나오는걸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고 더 이상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는 다시 택시를 타고 먼길을 달려 자기 집에 들어서며 그녀는 그에게 준 카드를 막기로 했다.

알려줘야 되나,하다가 , 그랬다가 또 어떤 폭언을 들을까 싶어 그녀는 따로 알리지 않고  카드를 일시정지시켰다. 그리고는 밤새 펑펑 울어댔다...지난 3이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생각, 그에 대한 애증의 감정, 그리고 그리움이 뒤엉켜 소진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자기가 담당한 작가 s와 시내에서 만나기로 돼있어 그녀는 자료를 준비해 서둘러 사무실을 나오는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s의 메시진줄 알고 다급히 열어본 폰에는 '카드 승인거절 일시정지카드 일시불 300000원'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가 막힌 카드를 그은것이다. 바로 전날 자신을 그리도 무시해놓고 그 카드는 쓰려 했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끝날거, 이렇게 완전히 매듭지어졌다는 생각이 한편은 소진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작가 s와 작품, 계약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내 소진의 폰은 악의에 받친 현욱의 메시지로 계속 알람이 울려댔다.

'지금까지 날 거지취급을 하더니 급기야 카드도 끊어?...이럴줄 알았어. 돈좀 있다고 사람 무시하고 갖고 놀더니...."차마 읽을수 없는 막말에 가까운 메시지를 그는 계속 보냈다.

자꾸만 알람이 울려대자 작가 s가 신경 쓰는 눈치여서 소진은 아예 폰을 꺼버렸다.


"니가 날 개로 보니? 소로 보니? 나쁜년"이라며 기세등등한 현욱은 금방이라도 소진을 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다 끝난거 아냐? 그런식으로 날 대한다는건?"

"니가 그렇게 잘 났어? 돈 몇푼 쓰게 해준다고 날 막봐?"라며 그가 정말 한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소진이 그 올라간 팔을 움켜쥐었다.

"어쭈? "라며 그가 조금은 긴장하는 눈치였다.

"너 이렇게 살지 마. 그 벌을 다 어떡하려구"라며 그녀가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3년간 자주 보아온 현욱의 싸늘하고 비열한 시선이 그녀의 두눈에, 가슴에, 온몸에 와서 꽂혔다.

에이씨, 하고 그는 폰지갑에서 그녀가 막아버린 카드를 꺼내 바닥에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저만치 주차돼있는 자신의 suv로 가는가 싶더니 고개를 홱 돌려 '이 차도 팔아서 주랴? 니 돈으로 산거니까?'라며 소리쳤다.



현욱의 차가 단지를 다 빠져나가자 그제서야 소진은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집어들고 그녀는 자기 동  현관으로 간다. 그런데 비번이 생각나질 않는다....아, 현욱의 생일이었지,  하고는 0514를 누르자  현관 유리문이 부드럽게 슬라이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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