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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Apr 12. 2024

나쁘지 않은 사랑

"중고마켓에 판다"라는 희석의 문자에 지영은 이제 아예 넌더리가 난다.

뭐든 자기가 원하는것만 사라, 보내라 하다가 어쩌다 지영이 마음을 써서 임의로 보내면 덜컥 화를 내면서 '이런걸 바로 선의를 가장한 악의'라고 하는거라며 불퉁한 반응을 보이는 그를 참아온 것도 벌써 3년이다. 이렇게 매사를 자기의 생각대로 끌고 갔고 그것때문에 지영은 속앓이며 굴욕감을 수도 없이 겪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잦은 갈등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가 반복되면서 지영은 이제 지칠대로 지쳐서 될대로 되라는 식이 되었고 이번에는 정말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끔 가보는 그의 원룸은 남자 혼자 생활하는 티가 물씬 풍기는 산만하고 정리되지 않은것들 투성이었고 게다가  그와 동침할때 덮었던 이불은 한 10년은 빨지 않은것 같은 퀘퀘하고 눅눅한 냄새가 배어나 이걸 언제 바꿔줘야겠다 생각하였고 이번에 그걸 실행한것이다. 겨울 끝나고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애매한 봄끝에 적당한걸로 골라서 보낸건데, 희석은 자신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보냈다고 타박에 구박에 심지어는 중고마켓에 판다는 얘기까지 하는것이다.


"넌 왜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라는 말 속에 묻어나는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에 지영은 더이상 견디기 싫다는 마음이 돼서 조용히 이 끈을 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밤이 되서는 왠지 기운이 심상치않음을 느꼈는지 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지영은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려놨다. 그리고는 잠자리에 들었고 불면을 예상했지만 오랜만에 숙면을 하였다. 처음부터 우린 아니었던거야,라는 생각에 그녀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오랜만에 조깅에 나섰다.


온다는 말도 없이 이미 가버린 봄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는 집앞 산책로를 달리다보니 여기저기 주인과 함께 아침운동을 하는 개들이 보였다. 그러자 불쑥 희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도 강아지나 고양이 한마리 키워. 그럼 매사를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그 버릇이 없어질거야"라던.

이젠 더 이상 그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그녀는 한없는 자유로움을 느끼며 산책로 양옆으로 펼쳐진 녹음을 즐기면서 달렸다.


"야, 너 왜 내 전화 따고 문자 씹어?"

 그날저녁 지영이 일하다 잠들었을때 요란하게 울린 벨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깼고 희석의 전화를 받았다.

"..."

"너 인제 아예 날 무시하기로 한거야?"라며 그는 또다시 볼멘 소리를 했다.

"잠깐 봐. 내가 그 앞으로 갈게"하고 지영은 점퍼만 위에 걸치고 차를 몰아 그의 원룸으로 향했다.


"지난 3년, 좋은 시간 만큼 힘들었던거 같아 우리"라는 지영의 말에서 심상찮음을 감지했는지 희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또 헤어지자는거야?"

"우리가 헤어지자고 헤어져지기나 하고?"

"그럼 뭐..애처럼 투정부리지 말고 니가 한 짓을 생각해봐"

그말에 지영은 어이가 없었다. 남친의 이불 하나 바꿔주고 이런 애먼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게 이젠 우습기까지 하였다.

"니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듯, 그래 너 많이 배운 여자야. 그러니 대접해달라고 하면서 정작 니가 하는 짓들이 대접받을 짓인지"

"피곤하다. 우리 서로 시간을 갖자"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끝내? 또 그 애기?"

"원하면.."하고 그녀는 그의 방에서 나왔다.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지영은 어쨌든이별 통보는 한 셈이라고 여겼고 그러자 씁쓸한 자유가 그녀의 전심을 휘감았다. 오랜만에 쇼팽을 들으며 그녀는 운전을 즐겼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운전을 가르쳐준 이가 희석이었음이 떠올랐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 더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점심무렵 회사에 나온 지영은 전날 마치지 못한 업무를 마저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원 a가 테이크 아웃으로 사온 커피 두잔중 하나를 지영에게 내밀었다.

"땡큐..."

"점심 드셨어요?"

"오늘은 별 생각이 없네"하면서 그녀는 빈속에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살짝 어지럼증이 밀려오며 속이 울렁거렸다. 왜 이렇게 커피가 안받지 오늘? 하며 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져 책상위 캘린더를 쳐다보았다. 희석과 잔 날 이후.....한달째 생리가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아래층 약국으로 가서 임신테스터를 샀다.

다행히 테스터엔 두줄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빈속에 커피 마시고 메스껍던 기억이 났다. 그때 약사에게 이야기했더니 '위가 나쁘면 그럴수 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 그녀는 다시 길건너 베이커리로 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내내 한 생각이 '이게 만약 임신이었라면'이었다. 아니어서 다행이라는건지 아쉽다는건지 그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작가 h.아델의 출판 게약이 성사된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아델은 지영이 문학에이전시를 열고 겪은 가장 까탈스러운 작가이기도 하였다. 인세는 물론 이런저런 조건이 많아 중간에 그만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여러번 들었지만 그래도 최근들어 북미권에서 떠오르는 신예여서 그게 쉽지가 않았다. 해서 최대한의 인내내심을 발휘해 타협하고 기다린 끝에 결국 계약이 결정난 것이다. 


아델과의 계약성사를 기념하러  직원 a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엘리베이터앞에서 지영은 희석과 딱 마주쳤다. a도 희석을 몇번 본 터라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고 그렇게 해서 지영과 희석은  1층 까페에 마주 앉게 되었다.

"너 정말 끝낼 생각이야?"

"생각좀 하자고 했잖아"

"우리 부부 아니었니?"

그말에 지영은 픽 웃음이 새나왔다. 부부....


둘이 한집에서 같이 자고 아이낳고 함께 밥을 먹는 상상을 지영은 수도없이 했고 얼른 합치자는 얘기도 여러번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희석은 '내가 처지가 안되잖아'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업이야 결혼해서 다시 시작해도 되는걸 그는 기어코 재기한 다음에 결혼을 하겠따고 하였다. 그렇게 둘은 무심한 세월만 보내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른것이다.

"우리, 안될거 같아 생각해봤는데. 사사건건 부딪치잖아. 이번에도"

"그러니까 왜 하지 말란 짓을 자꾸 해? 방이 좁아서 그 이불 놓을데도 없어. 너도 알잖아"

"딱히 이불 애기만은 아냐. 매사가 그런식이야.. 일일이 당신 컨펌을 받아야 하는. 나, 그런거 답답해."

"너 진심이야?"

그 물음에 지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나왔다.

"니가 정 그렇게 힘들면  나도 뭐..."하면서 그도 포기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순간 지영은 그를 다시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살짝 일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후회로 이어졌기에 이번엔 마음을 야무지게 먹기로 하고 먼저 까페를 나왔다.


오랜만에 여름을 맞은 도심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영을 스쳐갔다. 그렇게 거리를 걷다보니 예전에 자신이 희석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여름은 마술같아"라던...

한낮의 열기가 사그라든 선선한 기운이 음울하고 지쳐있는 마음들에 커다란 위안이 돼주었다.

이제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맞는, 더이상 참아야 하고 기다릴 필요없는 그런 상대를 만나는게 순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후 한달간 지영은 또다른 계약을 의뢰받아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고 희석도 완전히 단념을 했는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도 가끔은 나를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전혀 안한건 아니었지만 힘들게 내린 결정인만큼, 자기와의 약속인만큼 이번에는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는 b를 소개받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유학파답게 모든것에 오픈돼있고 쿨했고 최소한 희석처럼 사사건건 자신의 컨펌을 받으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사람과는 결혼에 이를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렇게 희석이 자기 안에서 완전히 지워진다는 사실을 가끔은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두남자와 살수도 없는것이어서 b를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b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어느 시점부턴가는 속도를 내는 모습이었고 어는날 상견례 얘기까지 꺼내서 지영은 자연스레 동의했다.



이렇게 b와의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사무실로 웬 낯선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을 'b의 여자'라고 말하며 두번이나 그의 아이를 지운적이 있다고 하였다. 

b에게 물어보자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그렇게 그와의 만남도 결국은 끝이나고 말았다. 

당분간 남자 따위는 잊고 살자, 하는데 오랜만에 희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잘 지냈지?"

"응....결혼도 할뻔 했는데"

"뭐할러..혼자 살아. 넌 그게 맞아.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알고"

또 그 지긋지긋한 가부장적 말에 지영은 희석과 헤어진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긴 누구 생겼구?"

"야, 무일푼인데 여자가 붙니?"

그말에 지영은 오랜 친구를 만난듯한 애틋함을 느꼈지만 더이상 그것이 이성에게 향하는 사랑이니 욕망이니 하는 따위의 감정은 아니었다.

"밥먹자 우리"라고 지영이 나이브하게 말하자 "약속있다 나"라며 그가 거절을 하였다.

그와 헤어져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며, 무슨 약속일까? 여자가 없다고 했으면서,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더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그녀는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는 한달후 아는 지인을 통해 희석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한달전 자기를 만났을땝만 해도 여자가 없다던 그가 그새 여자를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는게 믿기지 않았고 결국엔, 한달전 이미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흘후, 그녀는 희석으로부터 모바일 청첩장을 받았다. c라는 사진속 앳된 여자는 조금은 새침해보이는 인상의 미인이라면 미인이었고 그옆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희석은 처음보는 남자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지영은 축의금만 희석의 계좌로 입금했고 식에는 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쿨할 자신도 없었고 그것도 일종의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석달후 그가 이혼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잘 살줄 알았는데, 그러길 빌었는데 진심으로....지영은 뒤숭숭해서 그날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향했다. 아직 러시아워 전이라 길은 막히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오는 길에 지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예전 희석의 원룸으로 차를 돌렸다. 결혼전 그가 살았던 그곳이, 그 허름하고 낙후됐지만 정감어린 동네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리고는 원룸 건물 앞에서 그녀는 나와서 담밸를 태우고 있는 희석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희석도 그녀의 차를 알아보고는 담배를 끄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왜? 무슨 일로 여긴?"이라며 그가 차 안으로 몸을 굽혀 물어왔다

"..."

"설마 나 보러 온건 아닐테고?"

"아냐...길을 잘못 들어서"라는데 왠지 그녀는 울적해졌다.

그러자 희석이 조수석에  올라타서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서 그녀는 이렇게 또 무너져서는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파경이 어쩌면 자신으로 인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여자였어. 착하고 말 잘듣고"

"...."

"근데 너는 아니잖아. 고분고분하고 순해서 택했는데 꺼떡하면 대들던 니가 잊혀지질 않았어"

"바보....그렇게도 종같은 여자 찾더니"

"그렇다고 너를 용서한건 아냐. 그냥 그랬다는거지... 너 또 말 안들으면"

이라며 그가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럴걸 뭐할러 결혼까지 했어? 바보처럼"

"지는 한번이라도 갔다왔어? 너야 말로 바보다"

그렇게 서로 바보씨름을 하다 둘은 나란히 희석의 예전 그 원룸으로 들어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섹스도 하지 않은채 날이 어두워지기를, 그런 날이 다시 밝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희석이 잠든 틈을 타서 그녀는 살며시 원룸을 나왔다 또 오게 될지, 이게 마지막이 될지는 그녀 스스로도 몰랐지만 어떻게 되든 지난 3년의 시간이 마냥 헛뒤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그녀는 오랜만에 하우저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반복 재생햇다. 

"난 이놈 싫어. 액션이 너무 많아. 싸구려같아"라며 희석은 싫어하였지만 그녀는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는 연주자였다. 그런것조차 우린 서로 맞지 않았지,하는 생각이 들자 역시 둘의 이별이 옳았다는 안도감과 이제 다시 그를 못보면 어쩌나 하는 슬픔이 동시에 몰려와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게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한 지영이  도어락을 누르는데 문자 알람이 울렸다. 누구지 이시간에? 하고 그녀가 폰을 보았다. 희석의 문자였다

"점심때 갈테니 어디 돼지 국밥 맛있게 하는데 알아놔"

그는 또다시 명령을 하고 있었다. 이게 싫어 헤어졌는데...이렇게 또 이어지는 건가? 그게 옳은 걸까? 난 정말 그를 원한 걸까? 하는 의심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아서도 그녀는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하지만 어느순간, 바삐  인근 돼지국밥집을 검색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돼지국밥....돼지...마침 회사 근처에 후기 좋은 국밥집이 떠서 그녀는 화면 그대로를 캡처해서 희석에게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나쁘지 않군"이라는 그의 답문이 날아왔다.



pics from google



(19) HAUSER - Gabriel's Oboe (The Mission)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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