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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Apr 10. 2024

유턴

"뭐가그렇게 충격적이었어?"

경원은 의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뭐..그럴일이 있었어. 알려고 하지 마"

경원은 그 순간 자신들의 관계가 도대체 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이미 끝난사인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온라인 돌싱모임에서 서로 알게 돼 동변상련이라고 너무 빠르게 가까워진건 아니었을까?

그때 지인들모두 온라인 모임은 리스크가 많으니 되도록이면 친구정도로만 지내라고 했지만 서로 외로운 처지다 보니 온라인이 오프라인 만남이 되고 두어번 식사뒤 술을 같이 마신 뒤엔 동침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둘의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가 결국엔 어엿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의현은 한마디로 '세상 모두에겐 친절하지만 자기 여자에게는 소홀한'그런 타입의 남자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인다는 등산 모임에 지적 장애인이 하나 있는데 힘들게 산다며 그의 등산장비를 바꿔준다며 경원에게서 돈을 가져갔고 얼마 안돼 고향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며 최소 50은 내야 한다고 경원에게  급히 돈을 부치라고 하였다. 의현도 적게나마 벌이를 하는데도 경원을 만난 뒤부터는 그런식으로 자신의 돈은 쓰지 않으려 하면서 경원의 지갑을 계속 열게 하였다.

"나도 힘들어"라고 경원이 말하면

"넌  집이 있잖아"라며 불퉁하게 되받곤 하였다..


그 집이라는게 ,외도를 밥먹듯이 하는 전남편에게 위자료는 커녕 아이까지 빼앗기다시피 하면서 갈라선 뒤,  대학동창 미경이 pd로 있는 음악 방송 작가를 하면서 겨우겨우 외곽에 분양받은 소형 아파트를 말했다. 그야말로 경원의 '피땀눈물이 배인' 집을 의현은 꺼떡하면 그런식으로 말하였다.

오프라인에서 만나 서로 두번째 식사를 할때 경원은 자신의 이혼사유를 다 이야기하였지만 의현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뿐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 헤어지면서 경원은 '이게 맞는건가'하는 생각까지 했다.


매사가 그런식이었다. 하루종일  같이 걷고 맥주를 나눠마신 뒤 헤어져도 그는 단한번도 '잘 들어갔냐'는 따위의 안부인사를 하지 않았고 가끔 경원이 그런 무심함에 서운해하면 '니가 나이가 몇인데'라며 되레 타박을 하였다. 그거야 여자를 살뜰히 대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럴수 있다고 넘어가려 해도 가끔 언급되는 고향 '초등 여동창'의 이야기를 할때는 일찍 사별하고 구멍가게 하면서 힘들게 산다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한다며 애면글면하였다. 

"사랑과 우정, 둘중에 하나를 택해"라고 언젠가 경원이 내뱉자

"너 백치냐"하며 즉답을 피하기도 했다.

경원도 오죽하면 그런 단세포적인 질문을 했을까싶어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후회를 하였지만 언젠가 이런 그의 부분이 빌미가 돼서 둘사이에 금이 갈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고질적인건 경원에게는 전혀 이유를 말하지 않는 '심적 충격으로 인한 쓰러짐'이었다. 뭔가 충격을 받았다며 며칠 동안 소식을 끊어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바로 전날 같이 잠을 자놓고 그 다음날 그녀의 전화를 피한다든가 안받는따위의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바람에 그녀는 여러번 상처를 받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만나서 무슨 충격이냐고 물으면 '넌 알것 없어'가 그의 대답이어서 경원은 그의 삶에서 자신은 철저히 배제돼있거나 혹시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과연 우린 서로를 얼마나 알면서 서로를 연인이라 부르고 돈을 나눠쓰고 아프다면 걱정을 하는 걸까,하는 생각에 이르자 둘의 관계는 ' 완전한 타인'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경원은 의현을 배려해 조금이라도 불안이나 의혹에 시달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매사에 투명하려 했지만 의현은 그런 부분에서는 한마디로 젬병이었다. 처음엔 성격이 저러려니 했지만 그런것들이 되풀이되면서 둘의 관계자체에 회의가 들때가 여러번이었다.

하지만 경원이 정색을 하고 이별을 말하면 의현은 '넌 서로 갈등할수도 있는걸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몰고간다'라며 핀잔을 주었고 이별에 동의하지를 않았다. 그러면 좀 달라지려나 했지만 그녀를 대하는 냉랭하고 무심한 태도엔 변화가 있지 않았고 그녀는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나이 40을 바라보면서 뭐 그리 충격을 받고 뭐 그리 몸져 눕고 뭐가 그리 안쓰럽다는건지...

언젠가 연휴를 앞두고 녹음을 몰아 하다  어두운 얼굴의 경원을 보고  pd 미경이 조심스레 물은적이 있다. 무슨일이 있냐고. 해서 그때 의현의 얘기를 털어놓자 '널 좋아는 하니?'라고 대뜸 반응했던게 떠올랐고 그게 아니었어도 이제는 '외사랑'같은 이 외로운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조용히 끈을 놓아야겠다 마음먹기도 하였다.

연인사이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가면 상대가 금방 알아차리기 마련인데도 의현은 워낙 그녀에게 무심한지라 이별을 결심한 연휴에 낚시를 갔다와야겠다며 여비를 좀 보내라고 하 하였다.

경원은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돈 50을 보내자 금방 전화가 걸려왔다. "야 50으로는 안돼. 좀 더 부쳐"라고할때는 어이가 없어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지만 결국 30을 추가로 보냈다.



혼자 낚시를 간다는건지 동행이 있다는건지, 왜 같이 가자는 얘기를 안하는 건지,그 어떤 설명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는 그런식으로 훌쩍 길을 떠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로 경원이 불만을 토로하자 "내가 뭐 여자라도 끼고 다녀왔을라구?"하면서 버럭 화를 내고는 그쪽에서 헤어지자고 한적도 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새벽 메시지를 보내와 그녀에게 제발 '턱도 없는 의심'따위는 하지 말라며 당부를 하였고 그녀는 또다시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우리  여행 한번 가자. 원고 몰아서 쓰면 나 시간되거든?"이라고 경원이 말하면 "나 회사는? 일 안해?"라며 불퉁한 대답이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둘이 사귄시간이 꽤 됐는데도 여행이라면 당일치기로 속초를 다녀온게 전부가 되었다.


수시로 얼굴이 어두워지는 경원에게 미경이 '돌싱인데 사람 괜찮아'라며 의사 a를 소개시켜준 적도 있다. 하지만 그와 마주하자 이미 다 고갈돼버린줄 알았던 의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적당히 핑계를 대고 레스토랑을 나와야 했다.

그리고는 퇴근무렵 의현이 다니는 회사로 차를 몰아가면서 전화를 하였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나 오늘 야근'이라는 것이었고 '그럼 밥만 먹자'라는 경원의 말에 '넌 허구한날 먹기만 하냐'며  전화를 끊어버려 가던길을 멈추기도 하였다.


"우리좀 만나"

경원은 더이상은 이 관계가 유효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마지막 결론에 도달해 그에게 연락을 했다.

지난번 같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돌아오는 차안에서 다가오는 연휴엔  부모님께 인사가자며 거의 청혼을 하다시피 해놓고는 아무 뒷말이 없어 며칠 속앓이를 해야 했단 경원은 이제는 이 관게에 넌더리가 났고 완전히 끊어내야겠다 생각했다

"무슨 일인데?"

둘이 가끔 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먼저  도착해있는 경원 앞에 와서 앉으며 그가 불쑥 던진 말이었다.

"잘 지냈어?"

"실없긴...본게 언제라고"

"왜, 아무 말이 없어?"

"응?"

하며 그가 경원앞의 물잔을 집어 물을 마시며 되물었다. 전혀 모르겠다는 낯빛으로.

"부모님께 인사가자며?"

"내가? 우리 부모님? 왜?"

이렇게 나오는 바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어 경원은 차라리 웃고 말았다.

"아냐 아무 얘기도...이젠 끝내자 우리"라고 경원이 말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너 남자 생겼냐?"라고 하였다.

경원은 이번에도 웃음이 나왔다. 

"가져간 내 돈은 꼭 갚아"라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 정말이야?"라며 그가 뒤늦게 그녀의 팔을 붙들었지만 경원은 그를 뿌리치고 레스토랑을 나와 발레 파킹돼있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뇌리엔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이 스쳐갔지만 그녀의 이성은 더이상은 가면 안된다고 그녀를 잡았다.


그렇게 집으로 차를 몰면서도 혹시나 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의현은 전화하지 않았고 그날이 다 가도록 어떤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헤어졌다구?"

pd미경이 못믿겠다는 투로 경원의 안색을 살폈다.

"응. 이젠 다 끝났어"

"그 남자가 동의했어?"

그말에 경원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자고 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의현에게서 연락이 없는걸 보면 이번엔 진짜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헛헛해지면서 쓸쓸함이 몰려왔지만 그렇다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흔한 '이별 후유증'이라고 생각하며 일에 매달리다 보면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다. 

하도 여러번 기대끝에 실망을 반복해온 터라 새삼스레 마음이 아프고 상처니 뭐니 할것도 없었다. 그냥 오래 같이 산 사람과 서로 맞지 않아 자연스레 헤어지거나 멀어진 그런 느낌일 뿐이었다...



"나야, 방송국 로비야 .  좀 내려와"라는 의현의 전화를 받은건 마침 생방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경원이 아무말도 없자 "내려올때까지 안간다"라며 그가 못을 박았고 하는수 없이 경원은 그를 봐야했다.

"무슨 일? 우리 다 끝난거 아니었어? 내 돈이라도 돌려주러 온건 아닐테고"라고 하자 그가 흰봉투를 슬쩍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야 이건?"

"돈 갚으라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시로 그녀의 돈을 가져가놓고 한번도 돌려준적이 없는 그가 이번엔 좀 다르게 나와 경원은 긴가민가하며 봉투 안을 살펴보았다. 딱 30만원이 들어있었다.

"뭐지 이게? 나한테 가져간게 30뿐인가?"라며 이번엔 그녀쪽에서 냉랭하게 말했다.

"난 분명 갚았다 니 돈"하고는 아무말 없이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

"뭐해? 줘 인제"라며 그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뭐하는거야 지금?"

"다시 달라고. 난 분명 갚았으니 다시 달라고""

그말에 경원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달라니까"하며 그가 경원이 손에서 돈봉투를 다시 가져갔다.

"이짓하려고 온거야?"

"너한테 잘할게"라며 그가 품에서 미리 준비해온 반지를 꺼냈다.

그 반지를 보는순간 그게 영원의 족쇄같아 경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지만 그런 경원의 반응따위는 전혀 아랑곳않고 의현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 그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번 주말 비워둬. 부모님한테 인사가자"라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를 고민하는데 '다시 회사 들어가봐야 한다'며 그가 돌아섰다.

아....이런식이면 다시 또 그와 이어지고 만다는 생각에 그녀는 반지를 돌려주려 따라갔지만 이미 의현의 차는 멀어지고 있었다. 

경원은 순간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자신의 왼손약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쳐다보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의 반지였다. 이걸 어쩌나...



주차된 자신의 차로 향하면서 경원은 그 반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지금 가자. 회사로 간다고 했으니 거기 가서 돌려주겠다는 마음에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거는데 앞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은데 비가 오니 안그래도 심란한 그녀의 마음은 깊은 우울감과 난데없는 환희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널뛰는 감정을 안고 그의 회사가 있는 마포에 진입했을땐 제법 거세게 비가 퍼부었다. 

이런날 이별하면 그 기억이 오래 갈거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별을 좀 미루기로 하고는 차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자신의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올 즈음엔 언제 그랬냐는듯이 비는 그쳤고 공기는 차고 맑았다. 

내일...아니, 이번 주말엔 만나서 꼭 이별하리라 마음먹고는 그녀는 자신을 11층으로  데려다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번주말...그러다, 그가 그때 자기 부모님을 뵈러 가자고 한 말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그런말을 해놓고 어겼으므로 이번에도 다 허언이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헤어져야 한다. 그래, 이번 주말엔 꼭 헤어지자...




"부모님한테 인사가자고 하지 않았어?"

기어코 그녀쪽에서 먼저 그 얘기를 꺼내자 의현은 주말이라 늦잠 자는 중이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화점에서 전날 고른 정장을 차려입고 화장까지 마친 경원은 어느정도 예상한 그의 반응에 한참을 물끄러미 화장대 거울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끝난거지 뭐...하고는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는 마음으로 로 집을 나섰다. 더이상 볼 일 없는 그의 생각따위는 여름 바람에 다 날려버리기로 하고...


"어디 간거야? 너 픽업갔더니 없네"라며 전화기 너머에서 의현이 볼멘 소리를 한다.

경원은 차를 세우고 숨을 골랐다.

"이젠 전화하지마. 다 끝났어. 나 이젠 당신 몰라"라고 하자

"야, 너 또 변덕이냐? 부모님이 음식 다 해놓으셨다고 빨리 오라는데. 어디야 거기?"라며 그가 애써 화를 누르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누가 먼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몰라도 전화는 끊겼고 경원은 다시 차를 몰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는 홀가분함과 미진하게나마 다시 이어졌다는 안도감 속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힘들게 첫결혼을 마무리하고 겨우 찾은 자유와 다시 남자와 삶을 공유한다는 무시할수 없는 설렘, 그런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저만치 유턴구역이 들어왔다. 차를 돌려야 하나...

녹음이 짙어진 여름 들녘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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