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희진을 보며 잠시 휘청거렸다. 삼면에 둘러처진 안전바를 움켜쥐고 그는 자기 옆의 아내 원미의 눈치를 살폈다.
희진도 분명 양우를 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했다. 잊은걸까? 설마...
그날 양우는 아내와 어떻게 아침 조깅을 마쳤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내달렸고 아내가 옆에서 하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리질 않았다. 설마 희진이 이사온걸까...그렇다면 건물에 단 한대뿐인 엘리베이터에서 줄곧 마주칠텐데..내가 이사를 가야 하나, 그는 별의별 생각들에 치여 하마터면 조깅을 끝내고 건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도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려 하였다. 아내 원미가 그를 붙들어 그나마 달려오던 트럭에 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당신 왜 그래?"
"어...속이 좀 안좋네"
"속? 아침 먹은것도 없으면서"
하기사, 생각해보니 뭘 먹고 나온것도 아니었다. 요즘들어 한참 올라가는 혈당수치를 걱정한 의사가 아침 조깅이라도 하라는 말에 그는 얼마전부터 아내와 함께 조깅을 시작했고 집에 가서야 간단히 토스트로 아침을 먹는게 관행이 되었다.
"어제 술먹어서 탈났구나"
아내는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대꾸하고는 보행자 신호로 바뀌자 성큼성큼 앞서 길을 건넜다.
희진.. 그녀와 헤어진게 햇수로 벌써 5년이 돼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가 잊었다 말하면 그건 영낙없는 거짓말이었다. 죽도록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꽤 깊은 관계를 유지하던 그녀가 어느날 돌연 결별을 선언하고 돌아서던날 하필 양우의 안주머니엔 그녀에게 청혼하려던 반지가 들어있었다.
희진은 둘이 함께 한 시간들이 잠시의 놀이라도 된다는듯 아무렇지 않게 "그만 만나 우리"라고 담담하게 발했다. 우연히 대학동문회에 참석했다 학과선배를 만났고 예전에도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상대여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기업에 들어갔고 입사동기와 결혼, 딸을 하나 뒀는데 어느날, 그녀가 아이 예방주사를 맞추고 오는 길에 마주오던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으면서 정면 충돌, 아이는 기적적으로 단순한 찰과상만 입었지만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죽었노라 말했다고 한다.
"너 그거, 동정이야 사랑 아냐"
"그게 그거 아냐? 자꾸 그 사람 말이 떠올라서 잠도 못자겠어. 그렇다고 양우씨 몰래 만나긴 싫고..."
그말에 양우 자신이 제안한게 지금 생각해도 우스웠던게
"그럼 둘다 만나보고 정하든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말을 들은 희진은 한참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양우를 응시하더니 아무말 없이 까페를 나갔다.
그렇게 희진과 헤어진 양우는 설마,하는 마음에 그날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고 그 다음날은 차단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거의 결혼한거나 다름없다 여긴 상대가 이렇게 돌아설수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철벽방어했고 결국 양우는 그녀를 '그'에게 뺏기고 말았다. 애딸린 사별남에게.
그때 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같은 마케팅과 신입이었던 지금의 아내 원미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날밤 둘은 밤을 같이 보낸 뒤 사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돌아보면 남녀관계만큼 우스꽝스럽고 기괴한것도 세상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진이 양우의 가슴에 내고 난 커다란 블랙홀을 원미가 어느정도 메꿔준것도 사실이어서 그는 희진에게 주려했던 반지를 원미에게 내놓으며 청혼을 하였다. 기다렸다는듯이 원미는 흔쾌히 그의 청혼을 받아 들였고 그렇게 결혼한 뒤 원미는 자연스레 사직을 하고 집안일에 몰두하였다.
이러다 아이가 생기면 희진 따위는 까맣게 잊으려니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둘 사이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시험관시술을 세차례나 해봤지만 허사였다.
"요즘 일부러도 애 안낳고 사는데 뭐"라며 아내를 다독였지만 아내는 요즘 여자 답지 않게 너무나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 그러면 입양이라도 하든가"라는 말에 아내는 "그건 안돼!"라며 정색을 하였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를 낳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역력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원미의 나이도 이제 적지 않았고 그녀의 임신 확률은 점점 더 낮아졌다.
희진을 또다시 마주친건 사흘후, 저녁을 먹은 양우가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오던 길이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떡하니 희진이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도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고 그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렇게 양우는 쓰레기를 버린 뒤 그녀와 나란히 오피스텔 건너편 저가커피점으로 향했다.
"언제 이사왔어?"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양우가 먼저 물었다.
"지난달...우리 좀 우습다. 어떻게 같은 오피스텔에...나때문에 불편해?" 하고 그녀가 두눈을 크게 떴다.
"남편은?"
"아....그 사람이랑 이혼했어 작년에"
그말에 양우는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뻔 했다.
"그럴걸 뭐할러!"라고 거의 윽박지르다 보니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우습기도 해서 양우는 애써 자제했다.
"쉬운게 아니더라고. 남의 아이 키우는게.."
"그거야? 이유가 그거였어?"
"그러다보니 남편하고도 자꾸 다투게 되고 뭐....그렇지"
그렇게 둘은 한동안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내가...이사가야겠지? 당신이 먼저 살았으니까?"
희진은 다시 시선을 거두어 그를 보며 말했다.
"뭐할러..우리가 무슨 사이나 되나? 그냥 살아" 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뇌리엔 아내 원미가 스쳐갔다. 아내에게 이건 못할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이제 어리지 않잖아...별일 다 겪는게 사는거고...니 좋을대로 하는거지"하고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땐 미안했어"라며 희진이 낮게 말했다. 거의 속삭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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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는 희진이 몇호에 사는지도 몰랐지만 엘리베이터를 탈때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불안이 동시에 스치곤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한달이 넘도록 한번도 양우는 희진과 마주치는 일이 없어 더러는 실망하기도 하였다.
"우리, 수영하는게 어때? 조깅보다도 그게 더 좋다는데"라며 아침 먹는 자리에서 아내 원미가 슬쩍 운을 뗐다.
"하긴 수영은 전신 운동이니...근데 근처에 실내풀이 있나?"
"새로 생겼대 여기서 10분 거리"
"그럼 거기서 하자"
양우는 그닥 반대하거나 싫어할 이유도 없고 조깅을 해도 혈당엔 변함이 없어 안그래도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부부는 그날저녁 수영강습에 등록을 했고 다음날부터 다니기로 하였다.
원미는 잠수단계에서 계속 고전했지만 양우는 빠르게 진도를 뺐고 결국 원미는 포기를 선언, 양우 혼자 새벽반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수영을 나온 첫날, 희진과 풀에서 마주친 그는 귀에 잔뜩 들어간 물을 빼내며 시간을 벌었다. 희진은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닦으며 생긋 웃었다. 살다보면 이럴수도 있다는 듯이.
"나잇살은 어쩔수 없는거 같아. 체중이 자꾸 불어서"라며 그녀는 그와 마주앉은 인근 까페에서 운을 뗐다.
"나는 혈당이.."
"당신 여전히 고혈당이구나. "
누가보면 여지없는 부부간의 대화였다.
"그런데 당신 와이프는 ?"
"그사람이 하자고 한건데 영 안되더라구. 해서 그냥 나 혼자...나중에 내가 차근차근 가르치려고"
"애기는?"
그말에 양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 임신이래!"
라며 좋아하는 아내 원미는 임신테스터에 선명하게 그려진 두줄을 양우에게 내밀었다. 번번히 실패하는 시험관 시술은 돈도 돈이지만 아내 몸에 무수한 주사자국을 남겨 양우가 먼저 그만하자고 했고 그렇게 둘은 아이를 거의 포기한 시점에 임신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우는 뛸듯이 기뻐하기는 커녕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병원가서 확인해야지"
"당신은...안좋은가보네?"
"그게 아니고"
하고 그날밤, 양우는 아내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희진과는 정말 끊어졌음을 인정한다는게 내심 그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그녀에 대한 뜨거운 욕구나 열정이 남은것도 아니지만, 가끔 엘리베이터나 수영장에서 마주치는 정도의 만남은 기대했는데 그리 돼도 이젠 어쩔수 없다는게 그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 잠깐 바람좀 쐬고 올게"
자다말고 주섬주섬 덧옷을 걸쳐입는 그를 아내 원미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오피스텔을 나와 어둠속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예전 새벽이면 조깅하던 그 코스였다. 가로등 하나가 점멸하고 있는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옮길게"라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희진의 음성이었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그에게 희진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렇게 살수는 없잖아. 같은 건물에서. 자기 와이프한테도 못할 짓이고"
"바보...허구한날 그렇게 도망다니면서 어떻게 살아? 우리 전세야. 이제 곧 만기니까 그냥 있어. 우리가 옮길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라며 그녀가 돌아섰다. 그순간 양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희진의 집은 1103호였다. 창너머 신도시의 어설픈 야경이 펼쳐졌다.
5년만에 그녀를 안은 양우는 임신한 아내에게 못할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잠에서 깬뒤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었다.
"다신 만나지 말자"
그의 뒤에 대고 알몸인채로 누워있는 희진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을 했다.
"너 울어?"하고 뒤를 돌아보았을때,그녀는 등을 보이고 모로 돌아누웠다."
의사는 원미에게 상상임신이라며 일단 심신의 안정부터 취하라고 하였다. 그말을 듣는 순간 양우는 다시 희진과 이어질수도 있다는 희망이 솟구쳐 올랐지만 내색할수는 없었다. 그렇게 보름여가 흐를동안 양우는 양극의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어느날 일찍 퇴근한 그가 차를 몰고 오피스텥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웬 사다리차 하나가 짐을 내리고 있었다. 누가 저녁에 이사를 할까? 하다 그는 혹시, 하는 마음에 사다리 끝부분이 가 닿은 층수를 세기 시작했다. 11층이었고 정확히 3호에서 짐이 내려오고 있었다. 안돼...이렇게 또 가버리면....하고 양우는 그날따라 더디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비상구 계단으로 11층까지 헉헉거리며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문이 열려있는 3호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아내 원미가 팔을 걷어부치고 이잣짐 인부들을 부리고 있었다.
"여보..."하는 양우의 소리에 그녀가 힐끔 돌아보았다.
"또 당신이예요?"하고 그녀는금방 얼굴이 굳어졌다.
"자꾸 이러심 정말 신고합니다. 당신 지겨워서 이사까지 하는데"라며 그녀는 한손에 쥐고 있는 폰을 조작하려하였다.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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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대기 환자가 많아서 양우는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차례가 돼서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도 여자들이 자주 보입니까"
의사는 조곤조곤 물었고 양우는 곰곰이 며칠전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옛여자의 집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있더라는...
"허양우씨는 아직도 실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 그게 망상을 만들어낸거고요. 당신은 여전히 실연 시점에 머물러 있어요. 당신은 결혼한 적이 없어요. 그녀를 대체할 또다른 여자를 만들어낸 거죠. 그리고는 두 여자를 동일시한겁니다. 좀더 안정적 삶을 살도록 해요. 약을 좀 바꿔줄게요"라며 의사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때 양우의 두눈에 의사 뒤의 창밖 풍경이 들어왔다. 사람으로치면 갓 스물이 된 어리지도 그렇다고 성인도 아직 아닌 어설픈 중간지대를 지나고 있는 서툴고 황량한 신도시의 그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