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은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괜히 자기 일도 아닌것에 휘둘려 시간과 마음을 낭비한다는 생각에 정말 오늘은 정리해야 겠다고 마음 먹고 s기획사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한다.
"이제 확정적 답을 주셨음 합니다"
라는 그녀의 문자에 1,2분이 흐른뒤 담당자 k가 답을 해왔다,
"시나리오는 전반적으로 좋아요. 현장에서 상황에 따라 조금씩 손을 보면 되는데 아무래도 투자 받기가..."
"그럼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라는 그녀의 인지성 멘트에 k는 기다렸다는 듯이 후딱 답을 달았다
"죄송합니다"
우영은 그즉시 그의 번호를 차단하고 후, 한숨을 내쉬었다.
강혁이 우영에게 자신의 소설 매출이 형편없다고 느닷없이 시나리오를 쓰라고 졸라댄건 벌써 1년 전부터였다. 잠시 방송일을 하긴 하였지만 그바닥 생리를 견디지 못해 그만 둔게 10년도 다 다돼가는 마당에 인맥 하나 없이 다시 그쪽 일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 내지는 어불성설이어서, 우영은 여러번 강혁에게 '할수 없다'라는 뜻을 전했지만 그는 자기 소설이 안 팔리는 것이 마치 우영의 탓으로 여기는 사람같아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로만 만들어지면 모든게 해결된다는 듯이.
"그거 원작료 한 1억 주냐"라는 강혁의 물음에 우영은 어이가 없었다. 모 만화가가 원작료를 1억 받고 드라마를 만들었다고 기사가 났을때도 실은 200만원으로 밝혀진건 아닌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일종의 '언론플레이'를 한것을 사람들은 가감멊이 믿는다는 것에 우영은 모든게 '사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획사 k와의 문자를 끝내고 이제는 원작자인 강혁에게 알리는 일이 남았다. 소설이 영상화되는게 그리 쉬운게 아니라는 얘기를 여러번 했음에도 강혁은 새겨듣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영이 예단한것처럼 됐다는걸 알려야 하는 시점이 되자 그녀는 막막하면서도 한편 후련했다. 이럴땐 문자보다도 직접 통화를 하는게 낫다 싶은 생각에 그녀는 강혁에게 전화를 돌렸다 .
"영화..."
"뭐래?"
그가 대뜸 되물었다.
"안되겠대. 예산문제로"
"..."
"미안해"
그말을 해놓고 우영은 왜 자기가 미안해해야 하는지를 알수가 없었다. 분명 투고작을 보고 '시나리오가 좋았다'는 말을 여러번 들은 탓에 자기도 강혁을 위해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엔 물거품이 되었으니 미안해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럼 이제 어뜩하라는거야!"라며 전화너머에서 강혁이 잔뜩 화가난 소리로 물어왔다.
"잠시 쉬면서 다음을 생각하자"
"그건 니 책이 아니니 그런 말이 나오지"하며 그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오로지 처음부터 강혁을 위해 한 일임에도 그는 일이 얼그러졌다고 그 책임을 우경에게 전가하는 모양새다.
그렇게 우영은 한참을 허공을 보다 다시 문자판을 두드린다.
"자기도 시나리오 쓰고 싶어했잖아 이참에 내거를 초고로 해서 개작을 해보는게 어때?"
라는 그녀의 물음은 하루를 꼬박 아무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그래도 어제부터 그러고 있다. 보니까 군데군데 허술한게 보여. .그러니 안되지"
"그래?"
우영은 꼭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수 없었지만 평소 불퉁하고 이기적인 성격의 강혁에게는 어찌보면 자연스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그거 마치고 나면 지난봄 가기로 했던 여행 가자"라는 말을 우영은 매우 힘들게 꺼냈다
"에이씨! 지금 글이 안되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와!"라며 그는 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강혁을 만난건 우영이 저가 커피점 w를 차리고 얼마 안돼서였다.
짧았던 회사생활, 이어서 방송작가로서의 몇년, 그리고는 탈진해서 그동안 번돈에 융자를 얻어 간신히 차린 w커피점이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녀는 따로 아르바이트생을 둘 여력이 안돼 직접 커피를 내렸고 그렇게 혼자 바쁘게 가게를 운형하고 있던 터에 강혁이 어느날 창밖 키오스크 옆에서 얼쩡거리는게 보였다.
"손님, 뭐 도와드려요?"
그말에 강혁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이거 꼭 기계로 해야 돼요?"라며 만원짜리 한장을 우영에게 내밀었다.
"아뇨. 제가 해드릴게요. 뭐, 드실건가요?"
"아메리카논데 넘 쓰지 않게"
그렇게 해서 우영은 시럽을 아주 조금만 넣은 블랙커피를 강혁에게 전했다. 그자리에서 한모금 맛을 본 강혁은 "나쁘지 않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 후로 하루 걸러 그는 커피점 w를 찾았고 그렇게 단골이 된 그는 어느날밤 그녀가 퇴근하려고 도어락을 잠그는데 저만치 어둠속에서 다가왔다.
"오다 보니까 요앞에 포장마차 있던데..."라며 그가 조금 수줍어하며 말을 꺼냈다.
당시 강혁은 입시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치면서 소설을 쓰는 무영작가였다. 그 얘기를 들은 우영은 '이 사람의 삶도 어지간히 척박하겠구나'싶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서 만난 첫날 이후 그는 거의 매일 커피점으로 출근하다시피 했고 어느날은 아예 노트북을 들고와서 글을 쓰기도 하였다.
"오늘은 학원 안가세요?"
라며 그가 즐겨 마시는 '덜 쓴 아메리카노"를 그의 앞에 놓으며 우영이 묻자
" 거기 그만뒀어요. 급여도 제때 안주고..글만 쓰려고요"하며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커피를 마셔댔다.
그리고는 며칠후, 난데없이 커피점에 들이닥쳐서는 5만원을 줄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주 낯선, 초면의 손님은 아니어도 그렇다고 딱이 사귀는 것도 아닌 사이에 돈 얘기를 하는 그에게 경계의 마음이 들었지만 우영의 손은 어느새 5만원짜리 두장을 건네고 있었다. 아....내가 이 남자한테 끌리고 있구나...
그런뒤 그는 시도때도 없이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글을 쓰거나 동문회모임, 경조사 명목으로 적지않은 돈을 가져갔다. 그렇게 돈을 줘서 당장 망하는건 아니어도 우영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장사가 잘되는 상권도 아닌 후미진곳에 자리를 잡아 단골 아니면 가게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은 터에 그렇게 하루걸러, 이틀걸러 수십, 어떤때는 돈 100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는 우영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어느새 '돈'을 매개로 '연인'이 다 돼버린 사이에 뭐라 할수도 없었다.
"우리 무슨 사이야?"
어느날밤 퇴근뒤 그를 불러낸 우영이 둘이 자주 가는 포장마창에서 이렇게 물었다.
"남녀간에 꼭 섹스가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나?"
우영은 이 말에 신중한 답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그런건 아니어도"
"그럼 됐어"
하고 그는 아무말 없이 소주 반병을 마신뒤 이번에도 계산을 우영에게 미루가 포장마차를 나가버렸다.
그뒤 그와 전혀 잠자리를 하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우영도 남자 경험이 아주 없는건 아니어서 강혁의 몸짓이 전혀 '애정없는 '말뿐인, 행동뿐인 섹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수 있었다.
이후 여러번 그녀는 관계를 정리하려 했지만 강혁이 동의하지 않았다. 설령 동의했다 해도 사흘을 넘기지 않고 커피점에 나타나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다시 그의 품을 찾게 만들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그때마다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어느날 그는 "너 예전에 드라마 썼다며. 내 책 이거 영화로 좀 써봐"라며 그녀에게 자신의 책 "두소녀"를 내밀었다. 난데없이 각색이라니, 게다가 전쟁이 개입된 일종의 역사소설이어서 제작비가 만만찮을듯 싶었다. 그래도 울며겨자먹기로 우영은 각색에 들어갔고 퇴고를 마친뒤 영화사 여러군데 넣어 한군데로부처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는 작업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2주가 넘도록 진행상황을 알려주지 않아 우영쪽에서 매듭을 지은것이다.
강혁에게 미뤄둔 여행 이야기를 하고 타박을 당한뒤 우영은 애써 그를 이해하려 하였지만 그게 되질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탓을 우영에게 전가하고 그 다음엔 동정을 구하는 의미로 돈을 타 가는 것이 아예 관례가 되다시피하였다.
주위에서 다들 말리는 그와의 관계를 이제 더는 끌고 갈 수 없다는 생각과 , 가진거 하나 없는 강혁을 이 차디찬 세파에 던져버릴수 없다는 '같잖은' 휴머니즘' 사이에서 그녀는 매번 갈팡거려야했다.
"그럼 한번 봐. 우리 안 본 지 거의 한달이"라는 그녀의 말에 전화너머 그가 꽥! 소리를 질러왔다.
"넌 그게 문제야. 이번에 영화된다고 니가 설레발을 쳐대서 내가 얼마나 기대를 했고 그게 무산됐으면 지금 내 심정을 헤아려서 그런 말은 안해야지 씨발"
아.....이게 연인사이의 대환가 싶어 우영은 더이상 말을 못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 있는데 늦는다던 첫눈이 가게 유리 너머로 흩날리는게 보였다.
그가 보고 싶다 라는 단한가지 생각이 파도가 돼서 그녀를 덮쳐왔다. 아직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아니고, 혹여 단골들이 첫눈을 핑계로 들를수도 있는데 그녀는 서둘러 가게문을 닫고 큰길로 나왔다 . 마침 빈택시 하나가 그녀를 향해 미끄러져 오고 있다. 그녀는 얼른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요 손님?"
기사의 말에 그녀는 하마터면 강혁의 원룸을 말할뻔 한다...
하지만 조금전 그가 내뱉은 욕설이 떠올라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기사님 죄송해요. 지갑을 안 갖고 왔네요"하고 다시 택시에서 내렸다.
그녀가 내린 뒤에도 기사는 한참을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다른 손님을 태우고 갔다.
올 첫눈은 늦는대신 폭설로 올거라는 기상예보가 떠올라 우영은 가게앞 눈쓸기가 시급하다는 생각에 발길을 다시 가게로 돌린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속엔 우영도 그의 욕설도 그와의 좋고 나빴던 모든 시간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는데 띠링, 하고 메시지 알람이 들려왔다.
"내가 오늘밤 내로 죄다 고쳐줄테니 니가 손봐서 다시 투고해"라는 강혁의 명령조 문자가 와있다.
그문장을 한참 보던 그녀는 결국 문자를 삭제하고 그의 연락처도 차단했다....
이런다고 되는게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가게를 알고 있는 한.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라도 작은 의식이나마 치뤄야 할거 같았다. 첫눈 오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