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이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한것은 머리맡의 자기 폰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딱 1년전 오늘 12월 첫날 그와 헤어진게 생각났는데 꿈에서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둘이 손까지 잡고 겨울숲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태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와있지 않았다. 헤어진 뒤 그는 안부문자 한번 없었다. 그렇게 흘러간 1년...
그의 화실에서 '그녀'를 본게 문제의 시초였다. 반듯한 회사를 다니던 현태가 어느날 갑자기 사직서를 냈다고 하더니 보름 후에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덕에 둘의 다된 혼사는 틀어지고 말았다. 연봉 1억이 넘는 든든한 회사를 다니는 남자에게 딸을 주고 싶었던 서영네 부모는 그가 퇴사후 화가로 전업했다는 말에 단칼에 무자르듯 둘의 파혼을 저쪽 부모에게 알렸고 그렇게 둘의 결혼은 물건너갔다. 미성년이거나 어린것도 아닌데 결혼에 있어서는 이렇게 부모들의 힘을 무시할수 없다는게 한심하고 억울하기도 하였다.
홍대 근처 자그만 오피스텔을 화실로 꾸민 현태를 다시 보자 서영은 왈칵 울음이 쏟아져나왔다
"바보야. 왜 그래.나 이걸로 성공할게"
"이게 뭐야. 회사다니면서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걸"
"그렇게 하려고 해봤는데 안되드라구..나 어릴적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어"라는 현태의 말에 그녀는 그만 눈물을 거둬야 했고 좁은 아뜰리에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같은 조각들이 여러개 놓여있는 선반을 훑어본 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그곳엔 10대 후반쯤 돼보이는 소녀의 누드스케치가 보였다.
"저건 뭐야?"
"어...그냥 상상해봤어"
하지만 그의 화실을 나와 차를 몰고 한강을 넘을때까지도 서영은 그게 상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어서, 그 어린 소녀가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현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마치 자신의 육안으로 보는 거 같아 여간 마음이 혼란스러운게 아니었다.. 해서 그녀는 차를 돌려 다시 그길로 현태의 화실로 돌아갔으나 차마 벨을 누를수가 없었다. 혹시 아닐수도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과 여기서 실기하면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는 생각에 그녀는 힘없이 그의 화실앞에서 돌아섰다. 비록 결혼은 깨졌지만 어떻게든 부모를 설득해 늦은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었기에 그를 놓친다는 건 그녀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누드소녀의 그림을 본 이상, 현태에 대한 의심은 쉽게 가시질 않았고 그 지점에서 퍼뜩 자신이 현태를 기만했던 일이 떠올라 황망했다. 둘이 처음 여행을 갔던 속초의 펜션에서 둘은 몸을 섞었다. 그리고나서 분명 자신은 '정현태의 여자'가 되었는데 어느날 거래처 회식자리에서 처음본 남자와 동침을 했던 그일이 떠올랐다. 남자는 신혼이라며 잠에서 깨자마자 서둘러 옷을 주워입고 도망치듯 모텔을 빠져나갔고 서영은 이건 취기도 무엇도 아닌 그녀 안의 저급한 육욕의 결과라고 생각돼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했다. 이후로는 현태를 배반한 적이 없지만 그 일은 오히려 현태가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낳아서 둘 사이를 힘들게 만들곤 하였다....그리고는 이제 나타난 누드소녀...
그녀가 다시 그의 화실에 들어선건 그가 남도 멀리 낚시를 갔다 온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그녀'를 찬찬히 보고 싶었던 서영은 퇴근하자마자 홍대로 차를 몰았고 그가 알려준 도어락 비번을 눌렀다. 그러자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주인도 없는 방에서?라는 회의가 들었지만 이미 '주인없는 방의 침략자'가 돼버린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 어린 소녀 앞으로 다가갔다.
"넌 누구니? 현태씨랑은 무슨 사이니?"
물론 상대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상상으로 소녀의 누드를 그릴수는 있다 치자. 그런데, 왜 그런 발상을 했을까? 그녀는 의심을 거둘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렇게 보기만 하다 돌아나왔다.
하지만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내내 그 소년의 감긴듯 살짝 뜨인 눈이 주는 무시못할 고혹스러움은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태와 끝난거 같은 , 그래서 아포칼립스의 경지에 다다른 그녀는 자기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마구마구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분풀이를 했다.
"너, 나 없을 때 여기 왔었니?"
남도 낚시를 마치고 들어온 현태가 어느날 밤에 전화를 걸어왔다
"아니...내가 거길 왜"
"아냐? 미안..자..."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고 서영은 이내 후회를 하였다. 그 누드소녀를 보러 갔다고 차라리 말할걸.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 얘기가 있었을테고 그러면 오히려 일이 쉽게 풀릴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날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할말이 있어"
"화실로 오지 왜 나오라고 했어?"
"화실에서 할 얘기가 아닌거 같아서"라며 그녀는 힘들게 입을 뗐다.
현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입이 마른듯 물을 연신 마셔댔다
"헤어지자는 건 아니지? 우린 이미 부부야.꼭 결혼을 해야 부부인건 아니잖아. 그리고 언젠가 할거고.."
"그 그림...그 어린 여자애"
"응? 무슨?"
"내가 먼저 고백할게. 나 당신을 딱한번 배반했어"
라는 그녀의 말에 현태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언제? 왜 그랬어?"
"그냥. 술에 취해서"
"..."
"이제 당신 차례야""
"뭘?"
"나도 털었으니까 당신도 "
"그래서 지금 내가 어린 여자하고 뭐라도 했단 얘기야?"
"솔직히 신경이 쓰여서 그래. 그것도 많이 "
"그 그림 자세히 봤니? 누구 닮지 않았어?"
화가중에 ,그것도 어린 소녀를 주로 그린 화가들을 서영은 손꼽아보았다.하지만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고 좋은말로 상당히 '독창적'인 그림이어서 그녀는 그게 누군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자 의혹은 더더욱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도 유책이니까 당신 한번쯤, 아니 두번쯤 그랬다 해도 나도 어쩔수 없어. 앞으로 서로 잘하면 되지"
그말에 현태가 주머니에서 자기 폰을 꺼내더니 앨범을 뒤적였다.
드디어 '그녀'의 실체를 만나는 순간이 온것을 직감한 서영은 손이 떨려 찿잔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따.
그리고 다음순간, 자신에게 들이밀어진 현태의 사진속 소녀는 다름아닌 서영 자신의 사춘기 사진이었다.
"넌 코가 못생겼어"
"안그래도 살짝 들창코라 수술할까 어쩔까"
"아냐, 지금이 이뻐"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라며 그때 자신의 어린시절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고는 그자리에서 전송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날 배반했다고?"
그말에 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래를 떨궜다.
"우리 잠시 시간을 갖자"하고 그가 일어나는데 그녀가 살짝 그의 외투깃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미리 알아차리기라도 한것처럼 서둘러 까페를 나갔다.
"현태씨..."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그를 따라 나갔지만 밖에는 어느새 겨울 안개가 자욱했다.
올때만 해도 맑았는데 언제 안개가...하면서 그녀는 현태부터 찾았지만 1미터 앞을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안개는 짙개 깔려있었다.
현태는 물론 자기 차를 어디다 세워뒀는지도 분간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회한이 밀물듯 밀려왔다. 아무리 단한번이었다 해도, 그 단한번에 상처를 저리 받았다면 현태는 그동안 자신을 배반한 적이 없다는 말일텐데...그의 말을 먼저 듣고, 솔직히 물어본뒤 말을 해도 했어야 한다는 후회....
간신히 자기 차를 찾아 시동을 거는데 저만치 현태의 뒷모습을 닮은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차를 몰았고 그대로 가로수를 들이받고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한달을 입원한 뒤 퇴원해서 그의 화실을 찾았지만 그의 도어락 비번은 바뀌어있었다.
그리고는 1년만에 그와 손을 잡고 겨울숲을 걷는 꿈을 꾼것이다..그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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