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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17. 2022

영화 < HE LOVES ME>에 나타난 애정망상

장난치듯 장미 한송이를 건넨 루이의 행동은 과연 정상이었을까?

  


  21세기는 장르간 해체와 경계모호를 특징으로 한다. 그 가운데서도 영화장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조짐을 보여왔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대중적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대중성이란 예술성에 대비되는 상업성을 뜻한다

.

  예술영화를 간략한다면  사회, 심리적, 인간에 대한 보다 복잡하고 깊은 통찰을 전제로 한다. 그에 반해 상업영화는 볼거리로서의 영화, 가부장적  패러다임을  따른 여성의 물신화에서 비롯되는 상품화된 여성을 보여주는 영화 , 자극적이고 빠른 스토리와 영상, 등으로 정의 내릴수 있다.  그러나 어느 영화든 두가지의 중첩이라 보면 타당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프랑스 영화  <HE LOVES ME>는 예술영화와 상업영화가 참으로 다행스럽게 조우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꽃잎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그가 나를 사랑할까? 아닐까?’를 점치는 아름다운 소녀적 상상력에서부터 영화는 강한 통속성을 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옆집에 사는 매력적이고 유능한 유부남이란 설정은 그런 사랑에의 환상과 동경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와 데이트를 하고 여행약속도 하는 사랑에 대한 가장 보편적 환상을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시킨다.

  그러나 돌연 어느 순간 ‘그녀’의 시점에서 ‘그’의 시점으로 옮겨가면서 지금까지 그녀가 말해온 것들이 단순히 그녀만의 착각이었음이 보여진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까지 부른다.     


 영화장르를 관음적 매체라고 한다. 여기서 관음의 주체는 관객이 되기도 하고 영화 속에선 주로 남자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자가 남자를 엿보는 방식을 취한다. 영화를 라캉의 용어를 빌어 거울 단계의 자기인식으로 보는데. 거울속 자기를 실제의 자기로, 즉 타자를 자기로 인식하는 잘못된 자기인식의 단계가 그것이다.


  시뮬라크르와 혼성의 시대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예술형태가 바로 영화다. 관객을 ‘수동적’이라 부르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그만큼 영화는 이제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띄고 있다.


  영화 <HE LOVES ME>는  멜러드라마가 주를 이루면서 팜므파탈적 요소와 느와르적 요소까지 뒤범벅된 퓨전의 형태를 보여준다.  가부장적 정신분석의 흔적이 엿보이고 그런가하면 푸코적 성담론도 드러난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한 포스트 페미니즘까지 가세해 매우 재밌으면서도 복잡다단한 영화라는 인상을 깊이 심어준다.     


  영화  <HE LOVES ME>는 2002년오드리 토투주연으로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은 92분으로 길지 않다.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미술학도인 20대의 안젤리크는 남의 집을 봐주기로 한 것이 계기가 돼서 그 옆집에 사는 심장전문의 루이를 알게 되고 어느날 그가 무심코 건넨 장미 한송이를 사랑 고백으로 여기고 집요하게 그에 대한 애정망상을 펼쳐나간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호사인 아내가 있고 더군다나 임신까지 한 상태다. 하지만 안젤리크는 그 임신이 거짓이라 믿고 그녀를 스쿠터로 치어 유산시킨다. 그 일로 루이 부부는 사이가 벌어지게 되고 그런 와중에도 안젤리크는 익명으로 루이에게 꽃과 그림 선물을 계속한다.

  그러다 어느날 그림 뒤에 적힌 그녀의 메모를 읽게 된 루이의 아내가 오해를 해서 집을 나가게 된다. 이제 루이와 약속한 (망상) 플로렌스 여행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안젤리크는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지만 루이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는 TV에서 그가 여환자를 폭행해 기소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녀 (여환자)를 찾아가 살해까지 한다.     



   그렇게 그를 위해 살인까지 서슴치 않지만 루이는 결국 아내와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그에 절망한 안젤리크는 가스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루이에 의해 안젤리크는 발견되고 그래서  겨우 단념하려 하였던 루이에 대한 마음이 다시 또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즈음, 루이는 자기를 집요하게 스토킹해 온 여자가 바로 안젤리크임을 알게 되고 이사를 하려 한다. 그러자 안젤리크는 자기도 따라가려한다.      

  그 말에 루이는 ‘우린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매몰차게 거절한다. 안젤리크는 그런 루이의 머리를 가격해 쓰러뜨리고 결국 루이를 기소했던 여환자의 살해범으로 밝혀져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그리고는 몇해가 흐르면서 루이 부부는 아이 둘을 낳아 다시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안젤리크도 , 루이에게 품었던 마음이 모두 자기만의 상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해 퇴원한다. 하지만 그녀의 병실을 치우던 청소부는 그녀가 몇 년 동안 알약들로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루이의 조각을 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안젤리크는 수용되기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가 돼서 사회로 나간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멜러드라마를 기조로 하면서도 팜므파탈적 요소와 느와르적 음산한 내용이 뒤범벅돼있다. 하지만 영화의 주된 톤은 20대 여배우 오드리 토투에 걸맞게 상큼하고 빠르고 경쾌하게 흘러간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던한 영화의 표본을 보여준다.     


 여기서 잠깐 장르영화를 살피면,

 멜러드라마는 고도의 감상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원초적이고 단순한 감정들의 극대화를 꾀하는데 이런 것을 ‘과잉’이라 한다. 이런것들은 극단적 행동과 사건들 ,우연의 일치나 운명적 엇갈림, 과장된 연기, 비사실적 조명과 세팅, 의상 같은 미장센적 요소, 음악, 등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낸다.

  멜러드라마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여성으로 그들은 행복추구나 직업, 가족문제 등 대부분 사적인 문제들로 고민한다. 그리고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 의해 희생당한다. 멜러 드라마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내세우는 도덕적 구도 내에서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다루는 장르다. 즉 보통 사람들의 욕망과 그 욕망의 실현을 막는 시대적, 환경적 금기가 강조되는 장르가 그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금기는 욕망을 억압하고 억압된 욕망은 강렬한 감정적 갈등의 형태로 분출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멜러드라마의 감정주의다. 주인공여자의 소망과 현실의 거리감 때문에 결국 그녀는 눈물을 흘리게 되고 이런 강력한 감상주의를 동반한 페이소스가 멜러물의 주요 정서다.



  정신분석학과 멜러드라마는 가족 안에서의 개인의 정체성 문제나 주관적 욕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전자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억압받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제기했고 ,   멜러드라마는 자본주의 하에서 억압된 욕망을 다루고 이러한 욕망과 갈등의 충돌현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은 팜므파탈 femme fatale 에 대한 논의다.  이젠 고전이 돼버린 이 용어는 흔히 필름느와르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지칭한다. 필름느와르는 대부분 비정한 도시를 대상으로 한 도시 영화며 현대인 내부의 억압된  무의식, 도시범죄와 타락한 욕망 등이 단골 테제가 된다.   이런 느와르 영화에서는 불안한 남성과 음탕한 악녀가 만나 파멸에 이르는 것이 코드화돼있다.  농염한 성적매력을 바탕으로 남자를 조종하다 결국 파멸시키는 여주인공이 바로  팜므파탈이다. 그녀는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고 돈에 집착한다. 하지만 결국엔 파멸을 맞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느와르 장르 역시 가부장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맹점을 갖는데, 그럼에도 팜므파탈들은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갖는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져 오던 곳으로 여성이 발을 들여놓는다. 도발적이고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그녀들이지만 가족이나 남성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결국은 죽거나 미쳐버리는 그녀들이 바로 팜므 파탈이다. HE LOVES ME에서 안젤리크의 종말이 바로 이런 것이다.

  다음은 공포영화로서,< HE LOVES ME>엔 공포영화적 요소도 들어있다. 공포영화의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한 이들은 정신분석학자들이다. 특히 융의 집단무의식이 그러했다. 공포영화에선 무의식이나 이드, 금기, 꿈, 섹슈얼리티가 곧잘 언급된다.

  이들이 전제로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안의 환상과, 어두운 신비, 어둠 속에서 생기는 두려움을 끝없이 갈구한다는 것이다. 즉, 인류에게는 내재적인 공포가 있다고 보는 것인데 공포영화는 ‘중산층의 권태와 위기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공포 horror에는 개인적 욕망과 공통체 욕망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즉, 공포 영화 속의 괴물들은 우리 속에 억압된 이드 Id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영화에서 ‘그’는 ‘그녀’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그녀의 소망(욕망)과 현실세계가 충돌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위해 두 번이나 살인을 한다.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는 ,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여자,라는 멜러드라마의 철저한 가부장적, 남근중심주의 규칙을 따른다.  결국  그녀는 버려지고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녀의 사랑의 노래는 계속된다. 여자는 남자라는 대상이 없이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남성중심적 가치관을 쓸쓸하고 멜랑콜리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것은 곧 가족과 여성, 중산층의 허위의식, 눈물속에 숨어있는 저항 등의 담론으로 -비록 그것이 실패한다 해도-읽힐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 멜러드라마가 순하고 아름답고 애절한 것만은 아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안젤리크는 남자를 위해 살인을 감행하면서 또 한편은 남자 (루이)를 스토킹해서 공포와 혼란속에 빠트리는 분명한 팜므파탈이다.      

  팜므파탈이 전통적 남성영역에 침투한 여성을 말한다는 것을 상기할 때 이 영화는 나름의 진정성을 갖는다.영화의 결말은 비록 남자의 승리로 끝난다 해도, 그리고 이런 공식이 바로 느와르 영화의 단골 결말이라 해도 그 과정에서 여자의 저항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안젤리크를 팜므파탈로 몰아간 것은 루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여성의 저항’으로 읽힐 수 있고 사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가진 자에 대한 결핍된 자의 저항’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진 자들의 눈엔 ‘왜곡된 욕망’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이런 비주류 속엔 결핍된 자와 함께 여성이 포함된다는 페미니즘적 요소가 녹아있고 애정망상증이라는 매우 애매한 광기를 소재로 하는 부조리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망상이란 것이 과연 광기로 단순히 정의될수 있는가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개인을 둘러싼 억압과 속박 기제들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현실을 떠나 환상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망상’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정신분열증의 주요 판단기준이 되는 증상이다.  객관적 증거가 없는데도 그렇다고 믿는 사고체계를 망상이라 한다.     

  이 망상에 대해  두가지 견해가 존재하는데 우선, 망상이란 외부 세계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 또 하나는 , 망상이 정상적 신념과 질적으로 다른 병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 극단화 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망상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분류되는데, 피해망상, 과대망상, 조정망상, 부정망상, 그리고 저명인사나 연예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애정망상, 외계인이나 영적 존재 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떤 생각을 주입하고 있다고 믿는 사고투입 등의 다양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 망상은 편집증과 곧잘 결합한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안젤리크는 진짜 미친걸까? 여기서 푸코의 광기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성을 권력과 연관지었다. 그에게 순진한 지식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지식은 알게 모르게 어떻게든 권력과 관계를 맺는것이라 했다.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개념이 바로 성sexuality과 권력power의 문제이다.  푸코를 논하기 전, 우선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떻게 페미니즘과 결합될수 있었는지를 보면, 반본질적이며 다양성을 테제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후기 구조주의적 사고와 결합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우선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정의를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젠더, 인정, 계층과 같은 일반적인 범주를 적용할 만한 비판적 사회이론 자체를 거부한다.




  이런 거대 담론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부는 성 정체성이나 보편적 억압이라는 페미니즘 개념에 배어있는 본질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내기에 적절했다. 하지만 이것이 동시에 페미니즘의 정치성을 약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의 권력이론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대안적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신체와 관련된 권력이론을 제시하였는데 그에게 있어 섹슈얼리티는 신체의 본성이거나 자연적 속성이 아닌 역사적으로 특정한 권력관계의 결과물로 보였다.      

 이러한, 신체가 권력을 통해 생산되고 자연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 결과물이라는 관점은 본질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평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푸코의 권력개념은 기존의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기존의 권력개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푸코가 생각한 국가는, 일련의 권력관계의 그물망 위에 존재하는 상부구조일 뿐이고, 실제로 인간의 육체를 규정하고 성이나 가족관계, 인척관계, 지식, 기술 따위를 규제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섬세한 권력의 그물망이었다.     

   그리고 권력은 한 사람에게 소유되거나 특정집단에 속한 지배체계가 아니다. 즉, 하나로 고정되거나 일정한 장소, 특정위치에 있지 않고 항상 유동적이고 그물망처럼 사회에 얽혀있고 그래서 매순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경우라면 언제든 권력은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권력이 용인될수 있는 이유는 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은폐하고 숨기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권력이 단순히 금지의 기능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 사물을 관통하고 생산하며 쾌락을 유도하고 지식을 형성하면서 담화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권력과 저항’의 두가지 측면을 모두 용인한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을 끌었다.


   푸코에게 ‘광기’의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는 광기에 대한 기존의 정의자체를 부정한다. 기존의 정의는 이성이 아닌 것, 미친 것을 광기라 했지만, 이성이라는 정의 자체가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다. 즉, 이성에 대한 정의가 변하면 광기에 대한 정의도 변한다는 것이다. 광기란 이성을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반대 테제라고 그는 보았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안젤리크가 정신병원에 수용돼있는 동안 루이는 바깥에서 아내와 아이 둘을 낳고 전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녀는 당대와 사회가 용인하지 않은 일탈된 욕망을 가진 죄로 인해 광인 취급을 당한다. 이것이 푸코의 광인론과 연결되는 대목이며 그렇다면 안젤리크를 딱히 광인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장난치듯 장미 한송이를 건넨 루이의 행동은 과연 정상이었을까, 당대가 용인하는 것은 언제나 권력층과 가진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지극히 통속적 소재를 갖고 인간의 삶을 얼마나 다각적으로 들여다보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런것들이 멜러드라마의 규칙을  따라 차근차근 전개되는것이다.  즉, 자본주의 계층의 허위의식을 감상과 눈물, 여성의 희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망상과 비슷한 개념으로 환상이 있다. 이 환상이론은  1970-80년대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스트 관점을 재 고찰한 결과였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이 환상이론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남녀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환상은 현실세계와는 반대되는 소망충족으로 가득찬 내적 세계, 상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 세계에서는 성별에 얽매임 없이 복수의 주체가 가능하다. 환상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욕망의 장면화, ’, ‘욕망의 무대화’로 표현된다. 즉, 환상이란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표현하고 전시하면서 쾌락을 얻는 욕망의 장면화를 말한다.      

  이것은 영화속 안젤리크가 현실적으로 금기된 사랑을 고집하고 실행해 나가는 그 자체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이야기는 프로이드의 ‘매맞는 아이’ 에피소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요약하면, 벌을 받는 것은 금지된 성적 관계를 소망하는것이다. 안젤리크는 사회가 금지한 로맨스를 꿈꿔 결국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벌을 받는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의 자,가학적 속성으로만 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용인하는것은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지배하는 자들이 정하는 것에 한한다는 지극히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 HE LOVES ME> 는 라캉식으로 표현한다면 바라보기에서 비롯된 그릇된 욕망을 말하고 있다. 이 ‘그릇됨’은 물론 결핍된 자의 욕망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욕망이 얼마나 현실속에서 무섭게 깨져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거세된 욕망을 채우려는 안타까운 시도가 바로 사랑이다.  그렇다면 안젤리크는 이미 그에 대한 욕망을 시작하기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그와의 현실적 사랑이 불가능할 것임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여러가지 외적인 조건들, 예를 들면 부자,  유능한 의사, 그리고 곧 아이가 태어날 유부남이며 아름다운 아내를 둔 남자 ,라는 조건이 이제 스무살을 갓넘긴 아무것도 가진 것없고 의지처도 없는 그녀에게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켰을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그녀의 죄라면 그 욕망과 상상 속에 자기를 방기했다는 것이고  금지된 욕망이기에 더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여기서 그와의 사랑이 불가능할 거라는 전제는 바로 사회가 강요하는 그 ‘조건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넘어서면 둘은 진짜 현실적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 사회가 고립시키는 개인의 문제, 거기서 비롯되는 고독과 그것이 낳는 망상체계가 보여진다. 고독이 편집증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신경질환의 기본적 패턴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상업영화차원의 그것이었다면 이 사랑이 이루어졌거나 아님 그렇지 않았다 해도 결말을 그렇게 비참하게 끌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관객으로 하여금 불편을 유발시키는 거리두기식의 두가지 시점을 제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대별되는 기준점은 바로, 거리두기/몰입 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가 강한 대중성을 갖는다면 전자는 자기인식과 비판의 두 기능을 동시에 가능케 하고 그것을 해내야 하는 관객은 고통스럽다.     

   바로 옆에 살면서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서서히 미쳐가는 여자’라는 설정은 에드워드 얼비의 희곡 <THE ZOO STORY>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는 부조리극을 닮아있다.      

   다시한번 라캉의 거울단계를 빌어 표현하자면, 고립된 인간은 거울속의 타자를 자기로 인식하고 그와 내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도착상태에 이른다. 그 출발점은 상기한 대로 ’고립감‘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기에 거울속의 타자만이라도 나의 보호자로 남겨두고 싶은 심리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담론이기 이전에 고독에 관한 , 사랑의 폭력성에 관한 ,삶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다.


■참고자료-서인숙지음,『씨네 페미니즘의 이론과 비평』.서울:책과길. 2003. l/ 서인숙지음, 『영화비평의 이론과 실제』.서울: 집문당. 1996 /원호택․이훈진 외, 『이상심리학 시리즈』. 서울:학지사. 2000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편, 『영화예술의 이해』.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0

원용진,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 한나래 2002 .  /인터넷-예술영화, 프랑스영화, 대중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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