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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별

by 박순영

동훈이 자다 깬 얼굴로 부스스 오피스텔 문을 열자 세희가 파리한 얼굴로 서 있다. 그녀의 한손엔 딱 보기에도 찬합으로 보이는 짐이 들려있었다.

"세희씨가 어떻게 여길..."

"이것좀"하며 그녀가 보자기로 곱게 싼 찬합을 내밀었다.

"아..."

"들어가도 돼요?"라며 그녀가 주저했다.

그녀를 안으로 들이며 이제 더이상은 이런 관계를 유지할수 없노라 판단했다.



동훈이 대학 졸업후에도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제 밥벌이도 하지 못할때 적지 않은 용돈을 대준건 미진이었다. 그렇게 둘은 연애에 들어갔고 속초에서 첫밤을 함께 보낸뒤 미진은 '임신'을 알려왔지만 동훈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중절을 원해 결국 아이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애 낳은 거랑 똑같다고 했어"라며 동훈은 3평이 채 안되는 미진의 방에서 연이틀을 꼬박 함께 했다. 직접 미역국을 끓여주며.

"자기 너무 미안해하지마"라고 미진은 오히려 동훈을 위로했다.

그렇게 덜컥 임신을 한 뒤에 동훈은 자연스레 미진과의 잠자리를 피하게 됐다. 어쩌다 그녀를 안을때도 그는 극히 조심을 했다.

비록 아이는 지웠지만 분명 '자신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고 자기가 제일 힘들때 곁을 지키고 지원해준 여자여서 그는 결혼이란걸 하게 되면 당연히 그 상대는 미진이 될것이라 생각했고 미진도 같은 생각인듯 했다.


그러다 세희를 만나게 되었다. 3수끝에 들어간 대기업의 입사동기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연예프로에서나 나옴직한 '후광'을 느끼기까지 했다. 희디흰 피부에 가녀린 팔다리, 작고 갸름한 얼굴에 옅은 화장, 그리고 입사 1등으로 들어온 재원이어서 그녀를 탐내는 남자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동훈에게는 미진이 있어 내색을 할수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같은 '천출'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거란 생각해 그녀앞에서 그닥 긴장하지도 않았다.


"저를 진짜 몰라요?"어느날 회사식당에서 우연히 겸상을 한뒤 자판기 커피를 나눠마시며 세희가 빙긋이 웃었다.

"입사동기라는 거 외에는..."

"저 진짜 몰라요?"

나중에 안바로 그녀는 모 케이블 tv에서 아나운서로 근무하다 이직을 한것이라 하였다. 워낙 tv를 안보는 동훈이었지만 세희정도의 지성과 미모면 아나운서 정도는 당연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와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여자 이뻐?"

어느날 미진의 방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뒤 미진이 상을 물리며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못생기지 않은 정도?"

하고 시큰둥하게 말할때 잠시 미진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지만 그건 잠깐의 기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기우는 며칠후 현실로 다가왔다.


"비 오는데 타세요"하며 퇴근후 동훈이 우산도 없이 회사를 나서는데 뒤에서 살짝 경적을 울리며 한눈에 봐도 외제차가 분명한 작은 세단이 자신을 향해 미끄러져왔다. 세희였다. 그녀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얼른 타라고 하였다. 순간 동훈은 그녀의 차를 타는 순간 모든것이 얼그러질것 같아 극구 사양했지만 세희의 채근을 당해내지 못해 결국 타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비내리는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라운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나운서는 왜 그만뒀어요?"

"앵커도 아니고...앵무새 노릇하기 싫어서"라며 그녀가 샐쭉해했다.

"그래도 안정된 직장인데..."

"돈만으로 살아요 동훈씨는?"

그녀의 이 질문에 동훈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을 해야 했지만 차마 그말은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사귀는 사람 있어요?"라며 디저트가 세팅되자 그녀가 운을 뗐다.

그순간 동훈은 말대신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자 세희가 활짝 웃으며 "정말?"하고 되물었다.


그리고는 그 주말 동훈은 세희와 부산 여생을 떠났고 칠성 호텔에서 첫밤을 보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폰은 계속 꺼둔채...

그렇게 동훈은 미진을 배반하기 시작했고 오래 끌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게 벌써 1년을 넘겼다. 미진이 둔한 편이 아니라면 동훈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걸 알만도 한데 모르는건지 모른척 하는건지, 잠시 불고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눈감아주는건지 그녀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어서 동훈은 더더욱 적극적으로 세희에게 대쉬할수도 없었다. 그러자 세희는 몸이 달았다.

"왜 나 초대 안해요?"

어느날 세희가 동훈의 오피스텔에 오고 싶어했다.하지만 동훈은 그것만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미진이 제집 드나들듯 하는 그 공간을 세희에게 오픈할 수는 없었다. 그의 대답은 궁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너무 어질러져서

'가 고작 할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치..."하고 샐쭉해서 돌아서는 세희를 돌려세우며 깊은 입맞춤을 할때도 희열보다는 미진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집에서 한번 내려오래 같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미진을 피하다 어느날 힘들게 마주한 동훈은 드디어 올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기 이상하다? 가기 싫어?"

"아니 갑자기 그러니까..."

"가서 우리 날도 잡고"

날, 이란 말에 동훈은 그만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기 이상하다?"

"나 바쁜거 지나면 가자"하고는 서둘러 미진의 방을 나오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못할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온통 자신을 비웃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랜 세월, 자기 하나 바라보고 뒷바라지 해온 미진을 저버리고 가문좋고 인물좋고 능력까지 갖춘 세희를 택한다면 그 이유는 빤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럴수 없다고 생각하며 동훈은 얼마전 할부 500에 산 중고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다다른 곳은 세희의 오피스텔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녀를 불러낼수가 없어 한참 그녀의 방을 쳐다보다 차를 돌려 다시 자신의 집으로 왔다. 미진을 버릴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세희를 포기할수도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며칠후 임시 공휴일에 세희가 음식을 잔뜩 담은 찬합을 들고 동훈의 오피스텔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실평 5평 정도의 작은 그의 방을 돌아보며 '아늑해서 좋다'라고 말을 했다. 그순간 동훈의 눈에 저멀리 자그마한 사진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미진과 속초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희가 그 액자를 보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몸을 돌린 세희는 특휴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두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동훈은 이제 말해야 한다 생각한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더이상 두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는 자신이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입을 세희는 자신의 입으로 막고 있었다. 그렇게 키스가 깊어지는데 컬러링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둘은 살짝 떨어졌다.

"동훈씨 폰인가봐. 내거 아냐"라는 세희의 말에 동훈은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미진이라면...그녀라면 오늘로 이 부조리한 연극도 막을 내릴 것이다.

잠시만, 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저만치 1인용 회전의자에 놓인 자신의 폰을 확인한 순간 그는 올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진이었다...그는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세희를 돌아보았다. 둘이 눈이 부딪쳤다...그녀에게 모든걸 들켜버렸다는 당혹감이 동훈을 휩쓸고 갔다. 그는 휘청거렸다. 최소한 상상속에선. 그러나 세희는 자신이 싸온 보자기를 천천히 풀었다. 3단 찬합 가득 먹을게 가득 담겨있었다...컬러링은 계속 울리고 동훈은 받지 못하고 세희는 자신의 음식으로 식탁을 차렸다...

세상이 금한 것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동훈은 일단 수신거절을 하고 세희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 모든걸 털어놔야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들이 분주히 식탁을 차리는걸 보면서는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 자주 와도 되지?"

밥을 먹은뒤 동훈이 내려준 커피까지 마시고 현관을 나서며 세희가 당연하다는듯이 물어왔다.

동훈은 자기도 모르게 "그럼"이라고 대답하며 그녀를 문밖으로 에스코트했다..


"어제 내 전화 왜 안받았어?"

점심때 회사로 찾아온 미진에게 동훈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 세희가 다른 입사동기와 이야기하며 지나가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바람에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자판기 커피를 동훈은 놓칠뻔했다.

"동훈씨, 오늘 이상하다...언제, 내려간다고 할까 집에는? "

"응?...어...그거...내려가야지. 날도 잡고..."

그말에 미진의 얼굴에 드리워있던 그림자가 순간 모두 사라졌다

"우리, 결혼하면 진짜 잘 살자"하고 그녀가 그의 손을 잡는 순간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세희가 힐끔 동훈을 본듯하다. 하필 미진이 자신의 손을 잡는 바로 그 순간에...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동훈을 스쳐갔다. 이런게 운명이고 순리려니 했다. 오랜시간 자신을 도와준 여자를 버리지 말라는 신의 계시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쥐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미진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 둘이 그렇게 양손을 서로에게 맡기고 있는 그 순간은 마치 영원과 같았다....이제 올라가 세희에게 모든걸 털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떠나간 첫 아이에 대한 뭉클함이 그제야 동훈에게 밀려왔고 그는 죄스러웠다.

"잠깐만 있을래? 금방 올게"라고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올거지?"하는데 갑자기 미진의 두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동훈은 헤아릴수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미진의 저 눈물....세희에게 빨리 털어놓고 이 부조리하고 말도 안되는 관계를 정리하라는 재촉의 눈물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는 조금전 세희가 타고 올라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렇게 10층에 다다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마침 서류를 들고 그앞을 지나치던 세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를 보는 순간 세희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했다...두여자 다 알고 있다는 얘길까 싶어 동훈은 뭐라 입을 뗄수가 없었다. 한참을 젖은 눈으로 그를 보던 세희는 시선을 거두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이후로 동훈의 오피스텔은 그 누구도 찾는 이가 없었다.

미진은 그의 전화와 메시지를 차단했고 그러지 않은 세희마저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어쩌다 회사에서 마주쳐도 세희는 사무적으로 그를 대할뿐이었다.

그렇게 한계절이 가고 겨울바람이 불었다...

그러는 동안 계엄이라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지고 이어진 납득 안되는 사과를 내세운 담화가 세상을 어지럽혔다. 모든걸 '당'에 맡긴다는 '그'의 무책임함에 동훈은 끌끌 혀를 차면서도 왠지 뜨끔했다. 자신이 저지른것을 남에게 치우게 하는 그 파렴치함이 혹시나 자기안에도 있는건 아닐까 하고. 그래도 다행인것은 두여자 다 스스로 떠나줬다는 것, 그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밤, 자고 있는 그의 폰으로 사진 한장이 전송돼왔다. 메시지 알람에 눈을 뜬 그의 눈에 들어온건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보낸이는 미진이었다....

잠결에 받은거라 그는 더더욱 현실 파악이 안됐고 자기 기억엔 미진과 마지막 잠자리를 언제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않아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 고마웠다. 두번씩이나 자신의 아이를 품어준 미진이야말로 자신의 영원한 반려라고 생각이 들어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하였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도어락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잠시후, 현관이 열리며 세희가, 거짓말처럼 세희가 들어섰다. 잔뜩 젖은 모습으로. 그는 창밖을 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지난밤 퇴근무렵에 비를 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던 기억이 난다. 열을 품은 습한 바람....비나 눈이 올거라던 예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침대에 걸터 앉으며 세희가 젖은 손을 내밀었다..

동훈은 그 손을 잡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인다...

그러는데 미진의 전화가 걸려온다...


세희는 울먹이며 그의 투신을 진술했다. 자신이 말릴 사이도 없이 창밖 7층 밑으로 몸을 날린 동훈의 마지막 모습을. 세희를 의심하던 경찰도 결국엔 동훈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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