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해수였다. 성민은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도 분명 저 앞에 가는 여자가 해수임을 확신했다.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른 그녀가 어떻게 버젓이....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상상을 해본다. 자기가 모르는 해수의 쌍둥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성민은 걸음을 빨리 해서 해수, 아니 앞서가는 그녀를 따라잡는다
"해수?"
그 말에 해수, 아니 그녀가 돌아다본다. 그러나 그 눈빛엔 그 어떤 동요도 담겨있지 않다. 멀뚱하니 성민을 쳐다보는게 영낙없는 무연의 얼굴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분인가 해서요"하고 성민은 오던 방향 반대로 몸을 틀었다.
분명 해순데....해수가 딱 저랬는데...하면서 그는 공업사에 맡긴 자기 차를 찾으러 갔다.
그렇게 해수, 아니 그녀로 추정되는 여자와 거리해서 해후한 이후, 성민은 혼돈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둘은 3년 넘게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 결국 결혼날짜를 잡았고 상견례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드레스와 턱시도를 맞추러 가던날, 운전중인 성민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벨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고인의 최근 발신번호여서 전화를 했노라는...
그렇게 병원으로 달려간 성민은 이미 하얀 시트가 머리끝까지 덮여있는 해수를 보았고 그래도 믿기지 않아 시트를 젖혀 보았다. 분명 해수였다. 그녀는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져 행인의 신고로 실려오는 도중 심정지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성민은 믿기질 않아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어어....하다가 실신하였고 눈을 떴을때는 이미 해수의 장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을 하거나 운전을 하는 내내 성민은 분명 3년전 생을 마감한 해수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러다 며칠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해수의 예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 ars가 흘러나오려니 한게, "여보세요"라는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해수, 그녀의 목소리였다.
순간 숨이 멎을듯한 답답함에 성민은 전화를 이내 끊었다. 그녀가 ...그녀가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예전 그 번호 그대로.....그리고 "여보세요"라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것은, 그녀 해수가 맞다면, 왜 발신인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민은 장례를 치르고 3년만에 해수의 본가가 있는 후암동으로 차를 몰았다.
아니 정확히는 2년만이었다. 해수가 생을 마감한 후 드문드문 그녀가 그리워 찾아가서는 밥을 얻어먹곤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구, 김서방 왔나"하며 그야말로 버선발로 나와 마중을 해주던 해수의 홀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만난 해수의 모친은 매우 뜨악하게 그를 맞았다. 왜 왔냐는 눈빛이 역력했다
"저 혹시 해수가 쌍둥이였나요?"
그말에 해수의 모친은 아무 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성민을 혼돈속으로 몰아넣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될것을 그녀는 침묵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한참만에 모친이 입을 열었다.
" 애아빠가 사업을 하다 계속 부도를 내서 둘 중에 하나는 언니집에 맡겨야 했어."
그말에 성민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렇다면 며칠전 거리에서 마주친 그녀는 해수의 쌍둥이라는 얘기였다.
해수의 모친은 마지못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였지만 성민은 회사일이 밀려 다시 가봐야 한다며 그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마지막인듯, 녹색 철대문의 아담한 단층인 그 집을 일별하고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의문이 남았다. 예전 해수의 폰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 번호로 그녀의 쌍둥이 동생인지 언니가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후 1년이 지나고 성민은 대학 선배의 소개로 유치원교사를 하는 연경을 소개 받아 짧은 연애를 거쳐 결혼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해수는 그리 쉽게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연경을 안을때도 상대가 해수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혼 석달만에 연경은 임신소식을 알려왔다...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성민은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는 한달후, 연경과 함께 여성과를 방문했을때 거기서 그는 또다시 해수의 쌍둥이를 만났다. 그렇다고 그녀의 배가 부르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 진료를 받으러 온듯 했다.
성민의 호흡은 다시 빨라지고 가슴 언저리에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왜 ....왜 이렇게 이 여자와 만나지는 걸까? 그러고 있는데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열고 연경을 호출했다. 성민은 같이 들어가야 했으므로 마지못해 연경을 따라 자리를 떴고 다시 나왔을때 해수의 쌍둥이는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는 연경이 임신 막달이 다 돼, 아기 용품을 사러 백화점에 간 날, 성민은 먼발치에서 어떤 남자와 양복을 고르는 해수의 쌍둥이를 또 보았다. 성민은 이번엔 완전 매듭을 짓기로 하고 연경에게는 화장실에 간다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윤해수!"라고 불렀다. 그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성민은 분명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 잘못 보셨어요"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 서있던 남자도 의아해서 성민을 쏘아보며 여자에게 다가서는 성민을 제지하였다.
"말도 안돼...."라며 성민이 중얼거렸다.
그즈음, 저만치서 아기 용품을 다 고른 연경이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지만 성민은 그 자릴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안....당신이 좋았어. 너무 좋았어. 근데,정혼자가 있었어"
며칠후 대학로 모 까페에서 만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그래서!"
"어떻게든 당신을 평생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그러려면 "
"그래서 니 동생, 아니 니 언니로 바꿔쳐서 날 사귀게 만든거야?"
"동생이었어 . 해연이..."
"정혼자가 있었으면 지금 남자는 뭐야? 니 남편이야?"
"아니...이혼했어. 그리고 새로 만나는..."
"대답한 집안 놈이겠지"
그말에 해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같은 이유로 성민을 배반했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평소 심장이 안 좋은건 알았지만 해연이가 그렇게 가버릴줄은 정말 몰랐어.."
"니들, 집안끼리 다 한통속이 돼서 날 기만한거야. 이건 사기야!"
"내가 어리석었어. 다른 남자가 있었으면 당신을 놔줬어야 하는데..."라며 해수가 손수건도 없이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성민은 마주 앉은 해수가 가엾기까지 했다. 하지만 집에선 아내 연경이 아기방을 꾸미고 있을것을 생각하니 결심이 섰다.
"다신 너 길거리에서 아니 어디서 봐도 아는척 하지 않을거야!"
라고 소리치고 그는 까페 유리문을 박차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바깥은 초여름의 햇살이 눈이 부시게 내리 쬐고 있고 손양산을 한 여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렇게 해수에게 자신이 손양산을 해주던 기억이 성민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 해연이라는 동생이었을수도 있다....
문제는 두 여자 모두와 잠을 잤다는 것이다..
어차피 안될 인연이었다 생각하고 그는 자기를 향해 미끄러져 오는 빈 택시를 잡았다.
"올 여름 대단하답니다"
기사가 말했으나 그는 들리질 않았다.
그러자 기사가 슬그머니 에어컨을 틀었다...
그렇게 택시는 대학로를 벗어나 체증 심한 도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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