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과 비슷해서, 헤어진 그녀가 그리워 세영을 잡은걸 그는 인정하고 또 인정했다. 삶이라는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으로 지속된다는 것도.
만난 지 한달째 되던날 느닷없이 민석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세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가벼운 터치 외에는 키스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남자가 선뜻 결혼을 운운했으니...
"민석씬 나에 대해 얼마나 아나요?"
"결혼하고 알아가도 되지 않나요?"
그 말에 세영은 키득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 엉뚱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초고속으로 진행된 결혼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둘은 신혼을 즐기기 위해 6개월동안 피임을 하기로 약속했다. 소윤과 살려고 마련해놓은 25평 아파트에 이제는 세영과 살게 된 민석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일이 밀려 한참 바쁜 오전시간, 세영이 전화를 걸아왔다. 임신이라고...
그말에 민석은 발끈 화가 치밀어 옆에서 동료가 듣는 것도 아랑곳않고 "그러게 조심하랬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불퉁하게 통화를 끝내버렸다.
그리고는 저녁에 집에 들어서자 세영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런 세영을 보자 민석은 자신이 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신혼좀 보내고"
"아는데...조심했는데..."
라며 세영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세영을 민석은 가만히 품에 안았다.
"미안..근데 애는 내년에 갖자"
그말에 세영이 그에게서 떨어지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아이를..."
"지워"
그리고 민석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세영은 어린 나무가 쓰러지듯 그자리에 폭삭 주저 앉고 말았다.
"당신 내게 왜 청혼했던거야?"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세영은 잠에 푹 빠져있는 민석을 흔들어깨웠다.
"새삼..."
"말해줘. 그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못했잖아. 왜 , 왜 나한테.."
그말에 민석은 하마터면 소윤의 이야기를 할뻔 했지만 겨우겨우 참아냈다.
"너랑 살면...보통의 행복 정도는 누릴거라고 생각했어. 퇴근해 들어오면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는 와이프, 꼬물꼬물 커가는 아이, 그리고.."
"보통의 행복?"
"난 살면서 크게 바라는거 없어. 너라면, 너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어"
"좋아...그 보통의 행복 누리게 해줄테니 이 아이, 우리 첫애로 낳자"
그 순간 민석은 저도 모르게 세영이 아닌 소윤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그건 나중에라도...제발 소윤아!"
그런 남편의 반응에 세영은 연애시절 그가 언급했던 '좀 힘들었던 연애'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소윤이니?"
"아...그게..."
그 뒤 둘은 각방을 썼고 세영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세영은 이혼을 요구했고 아이 낳으면 양육비를 달라는 얘기까지 했지만 민석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세영이 싫은건 아니었고, 몇달만 있으면 세상 빛을 보게 될 둘의 아이도 궁금했다...
"우리 다시 잘 지내보자"
어느날밤 민석은 세영이 쓰고 있는 작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말에 세영은 한참을 물끄러미 민석을 보더니 말없이 그의 목에 두팔을 둘렀다.
"과거가 어떻든 우리 다 잊고 사는거야. 약속. 알았지?"
"응..."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지만 분명 소윤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과 도톰한 입술과 갸름한 하관.. 이 모든게 소윤을 떠올리게 했다.
"완이, 누굴 닮은거지? 당신도 나도 아닌거 같아"
어느날 세영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민석에게 그리 물어왔다.
"아직 아인데 좀더 크면 드러나겠지...우리 둘이 만든 앤데 닮았으면 우릴 닮는거지..."라고 대답은 했지만 민석 역시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다.
을왕리.
언젠가 선거일이라 임시공휴일이던 어느날 소윤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고... 그것도 동해가...
"야...동해가 여기서 거리가 얼만데.."
"답답해서 그래...지금 떠났다 내일 새벽에 올라와서 출근하면 안될까?"
그말에 민석은 곰곰 동해까지의 여정을 머릿속에 그렸지만 ,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 소윤이 장롱면허라 번갈아 운전을 할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서해는 안돼? 금방 갔다 올수 있는데. 거기서 하루 자도 되고"
그말에 소윤은 전화너머 한참을 침묵하더니
"그럴까 그럼?"
그렇게 민석은 소윤을 픽업해 영종대교를 지나 을왕리로 차를 몰았다..
"치....파도가 요만해..."하면서도 소윤은 좋아라 했다.
"다음에 꼭 동해 데려다줄게"
"됐어.."하며 소윤은 신발을 벗고 바지를 접어 올린 뒤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워!"하며 활짝 웃던 소윤. 정소윤. 그녀를 잊을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자기를 배반할줄은 꿈에도...
제 아무리 오랜 연애도 한순간에 꺾이던 날 민석은 인사불성이 되다시피 술을 퍼마셨고 그대로 거리에 쓰러졌다. 눈을 떴을땐 낯선 병원 천장과 의료진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나오던 순간의 그 참혹함을 민석은 잊을수가 없었다.
갑자기 바다타령을 한 소윤의 본심은 그에게 이별을 고하기 위함이었고, 배경만 서해로 바뀌었을뿐 소윤은 기어코 결별을 통보했다.다른 남자를 알게 됐다고...
그렇게 그녀를 놓치고 온통 엉망으로 지내던 그에게 고교동창 하나가 세영을 소개시켜주었다. 첫인상이 소윤과 같아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다른 이름을 쓰고 있었고 찬찬이 뜯어보면 소윤이 아니었다. 그점이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한 결혼.
아들 완이는 커갈수록 더더욱 소윤을 닮아갔다. 눈망울은 좀 더 깊어지고 웃을땐 몇개 안되는 고른 치아가,아마도 소윤의 어릴적 모습이 저랬으려니 하는 느낌을 주었다.
소윤이 웃는 모습에서 , 고른 치열에서,그녀의 자라온 내력, 자기와는 판이하게 달리 컸을 성장기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소윤의 집안은 고위공직자를 조부로 둔 이른바 '명문가'였고 그런 집안의 여식과 자신이 맺어질 확률은 거의 없다고 판단해 그는 애써 그녀를 멀리했지만 그렇다고 잊히는게 아니어서 다시 보고, 그러길 여러번, 결국엔 어렵게 소윤 집안의 허락을 얻어내 결혼까지 약속했건만....소윤은 정치에 막 입문하는 다른 놈에게로 가버린것이다.
아들 완이는 식성도 소윤을 떠올리게 했다. 굴을 먹으면 아이는 알러지 반응을 보였다. 호흡곤란에 두드러기가 돋아 응급실을 찾아야했다. 어느날 세영이 깜박하고 해물전에 굴을 넣은 걸 알고 민석은 자기도 모르게 세영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이내 후회했다. 그래도 완이를 낳은 여잔데....잠시 잊은 것 뿐인데..
그에게 뺨을 맞은 세영은 벌겋게 부어오르는 한쪽 뺨에 손을 얹고는 말없이 민석을 쳐다보았다.
"미안....완이가 굴 못먹는데"
"....내가 깜박했어..."
하고 그녀는 빠르게 파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민석은 그녀 뒤로 가서 안아주려했지만 이번엔 세영인 매몰차게 그를 뿌리쳤다. 그렇게 보통의 행복도 끝이 나는 느낌이었다.
장기 미제로 남아있는 소윤의 실종이 어느날tv에서 보도되었고 함께 tv를 보던 민석과 세영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 언젠가 내게 소윤이라고 부른적 있어"
라며 세영이 그를 응시했다.
민석은 그 눈길을 참아내지 못해 고개를 돌렸고 이내 회한이 밀려왔다.
"저 여자 ,완이를 닮았어 친엄마라고 해도 믿을만큼"
을왕리에서 결별 통보를 받은 민석은 매일밤 소윤에게 전화를 했다.
소윤은 울기도 했고 읍소도 했고 빌기까지 했다.. 하지만 민석을 만나주진 않았다...
"우리 그럼 마지막으로 니가 보고 싶다는 동해로 가자"라는 민석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소윤이 "그럼 마지막이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렇게 둘은 새벽을 가르며 동해로 향했다.
그리고는 함께 해변을 거닐었고 입을 맞췄고 펜션에선 마지막 섹스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민석은 아직 잠에 빠져있는 소윤의 얼굴을 찬찬이 들여다보았다. 큰걸 바란게 아냐, 그냥 보통의 행복을 너와 누리고 싶었을뿐인데...라며 그는 두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그 민석의 손을 느낀 그녀가 눈을 뜨자 그는 두손에 한껏 힘을 주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이해한다고....
그리고는 그녀의 시신을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동해에 유기하고 서울로 돌아오며 그는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몇번이나 차를 세워야했다.
"지금이라도 자수해"
세영이 민석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기다릴게 완이랑. 언제가 되든. 그렇게 당신 나오면 정말 보통의 행복으로, 그 정도에 만족하면서 살자"
다음날 아침, 경찰서로 향한다며 집을 나선 민석은 동해로 차를 몰았다...
마치 영원속을 달리는것처럼...그리고 차가 물에 거의 잠길때쯤 소윤이 그랬던것처럼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이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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