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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by 박순영

"미안, 아직 준비가 덜 된거 같아."

"또? 또 미루자는 거야?"

그말에 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까페를 나갔다.

계속 결혼을 미루자는 말에 주혁은 힘이 쏙 빠진다.


5년의 연애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도 인혜는 벌써 세번째 결혼을 미루고 있다.

조용히 끝내자...

주혁은 이제 인혜를 보지 않기로 하고 카모마일을 한잔 더 시켜 마시고는 까페를 나왔다.

그리고는 두어걸음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어? 너 이주혁"하는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지만 분명 친숙한 목소리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데 바로 자기 뒤에서 대학동창 가은이 햇살에 눈부셔 미간을 찡그린채 서 있었다.



가은과 주혁은 대학시절 방송반 활동을 했다.

가은이 pd였고 주혁은 아니운서를 했다.

"넌 그럼 나중에 방송국 들어가겠네?"

어느날 방송을 마치고 나란히 부스를 나오며 주혁이 가은에게 물었다.

"맘대로 되니? 되면야 뭐..."라며 말끝을 흐리던 그녀였다.

그정도면 서로 사랑의 기운이 싹틀만도 한데 둘의 사이는 너무도 담백했다. 주위에서 뭐라 놀리든 둘은 꿋꿋이 우정의 펜스를 지켜나갔다.

그리고 졸업후, 가은은 케이블 tv입사를 알리는 문자를 보내왔고 주혁은 은행원이 되었다.

처음엔 거의 매일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으레 그렇듯 그 텀이 벌어지면서 매일에서 한달, 그것이 반년, 그리고 1년으로 벌어졌다.. 그리고는 몇년째 서로의 소식을 모른채 지내오다 이렇게 대낮 도심에서 마주친것이다.


"야, 너 그대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라며 둘은 인근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서 정식을 시키고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고마운데, 아니네요.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라며 가은이 살짝 눈을 흘겼다.

"결혼했냐? 야, 대박. 너 좋다는 남자가 다 있었어?"

"계속해라 계속!"하며 가은이 으름장을 놓았다.

곧이어 음식이 세팅되고 둘은 격의없이 먹던 걸 흘리기도 하고 트림도 해가면서 그릇을 싹 다 비웠다.

"넌 아직이야? 여자 없어?"

"그게...없어 아직"

"이상하다? 너 작년인가 결혼한다는 얘기 들었는데"

"실은...여자가 자꾸 결혼을 미루네"

"그걸 기다리고 있는거야? 아유.....관둬라 관둬. 내가 소개시켜줄까? 나랑 일하는 스크립터 괜찮은데"

"됐다...연애 방학 할란다"


그렇게 둘은 그날 격의없고 그닥 의미도 의미는 없지만 분명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간을 보내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헤어지기 전, 가은은 불쑥 명함을 내밀었다.

"너두 줘야지"

"난 그런거 없어"라는 말에

"거짓말. 은행원이 명함이 없다구?"

"실은 그만뒀다. 나하고 안맞아...그래서 사촌형이 하는 가구일 해. "

"그래? 그렇구나..."

"나, 만드는것도 해. 물론 파는건 아니고 그냥 취미로...나중에 너한테 뭐하나 만들어줄까?"

"어련하시겠어"

이렇게 둘은 담백하게 만나고 헤어졌다.


가은과 시간을 보내면서 인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게 미안하긴 했지만 계속 자기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넣는 상대다보니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로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인혜쪽에서 몸이 달아 문자나 전화를 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례적인 안부따위를 묻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일도 지겨워져 주혁은 아예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마 차단을 할수는 없었지만...지난 5년 연애의 기억을 한순간에 망가뜨린 장본인에게 더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와함께 그동안 계속 트라이를 해온 중국과의 거래가 성사돼 사촌형의 가구업은 조금씩 규모를 키웠고 그와함께 직원도 증원하며 무난히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주혁의 직함도 어느새 전무로 승격되었다. 그래봐야 월급의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왠지 그럴듯해보였다. 그리고 주혁은 명함을 박았다.

몀함을 택배로 받던날, 오랜만에 가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근처를 지나다 생각이 났다고.



"실은 아이는 전남편이 키워"

"그럼 너...헤어졌구나"

"응...너무 안맞았어. 모든게 자기 위주고...모르지, 저쪽에서는 모든게 내 위주였다고 기억할지"

"그럴수도 있지. 요즘 세상 , 한번 갔다온게 뭔 흠이라고"

그말에 가은의 눈이 반짝였다.

"나 다음주에 상하이 출장인데 같이 갈래?"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주혁 자신도 얼떨떨했다.

"나 일 안하고 너 따라가리?"

"아참.너도 회사 다니지."

"가자 같이. 휴가좀 미리 내지 뭐"



그렇게 둘은 함께 상하이로 그 다음주 출발했고 호텔에서 자연스레 동침을 했다....

"왜 우린 대학때 가까워지지 못했을까?"

벗은 몸위로 얇은 이불을 끌어올리며 가은이 물었다.

"나도 그게 신기해.."

"우리 인제 뭐지? 친구? 연인? 뭘까?"

"결혼하자"

그말에 가은의 귀가 쫑긋 서는 환영을 주혁은 본듯 했다.

"겨우 한번 잔 걸로 결혼? 그리구 너 여자 있잖아"

"그걸 있다고 해야 하는건지...결혼 미루는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확신이 없다는거지....그러고보니 은행 나오고부터 그런거 같아. 조금씩.....뭐랄까? 거리를 두는. 그리고는 날이 잡히면 미루고 또 미루고.."

"애인 관리를 그렇게 못하면 어떡해?"

그날 가은은 청혼에 대해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분명 관계를 업그레이드시켰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하루 걸러 만나기를 계속했다.



"나야 인혜"

그날따라 야근을 하고 늦게 귀가해 씻지도 못한채 침대에 쓰러진 주혁에게 인혜가 전화를 걸어왔다.

주혁은 뭐라 응대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 한번 보자고 하였다.

인혜는 그동안 수척해져서 그 나름의 속앓이를 한 티가 나보였다.

"왜 한번도 연락 안했어?"

"어...바빴지 뭐..."

"솔직히 말할게. 집에서 자기 처음 은행원이라고 했을땐 반기는 눈치셨어 그런데,"

"말 안해도 알아...우리, 이제 편하게 보자"

"편하게? 무슨 뜻이야?"

"나, 여자 생겼어...아니, 오래 전에 알던 친구한테 청혼했다"

그말에 까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인혜의 야윈손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고 더는 우인혜라는 여자에게 휘둘리기도 싫었다...

"축하해"

인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자존심을 챙기고 까페를 나갔다.

그렇게 인혜가 가버려도 주혁은 더는 마음이 아리거나 쓰리지 않았다. 이게 다 가은 덕분이라 생각하니 어서 그녀를 보고 싶어 그는 그녀가 다니는 방송국으로 차를 몰았다.



"이렇게 불쑥 오면 어떡해. 나 오늘 심야방송 잡혔는데"

"아...미안"

"내가 내일 자기 오피스텔로 갈게"

하면서도 그녀는 싫은건 아닌듯했다.

"그래 그럼..."

그리고 그 다음날 가은은 정말 퇴근후 주혁의 오피스텔을 찾아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실은 인혜...그러니까 그 "

"자기 골탕먹인 여자?"

"뭐...그렇지....한번 연락이 와서 만났어. 나 결혼할 여자 있다고 얘기했어"

"내가 한다고 했어?"

하며 그녀가 불퉁하게 대답을 했다.

"안해 그럼?"

"해도 일은 계속할거야. 알았지?"

그말에 주혁은 와락 가은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 내 사업 하려구"

그 말에 가은이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형밑에 있을순 없잖아.'

가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이후로 가은의 연락은 뜸해졌고 주혁이 방송국으로 찾아가면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우리, 그럼 그만 둘까?"라고 주혁이 물으면 그건 아니라며,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가은과도 멀어지며 주혁은 어느새 비혼주의가 돼가는 듯했다..

굳이 이별을 고할 필요도 없이 그는 솔로의 삶으로 돌아갔다.. 가끔 여자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 연애의 기억은 그리도 알량한 거짓이어서 그닥 괴롭거나 아프지도 않았다..



한밤중, 현관문을 열자 비에 잔뜩 젖은 인혜가 냉기에 떨며 서 있었다.

주혁은 일단 인혜를 들였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게 했고 그동안 자신은 커피를 내렸다.

"그날 이후로 한잠도 잘수가 없었어"

"그날? 무슨?"

"당신 다른 여자한테 청혼했다던"

"아..."

그말에 주혁은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언젠데? 갈게 결혼식에"

그말에 주혁은 물끄러미 인혜의 두눈을 보았다. 샤워를 했어도 눈은 촉촉히 젖어있었다...

"우리 다음달에 결혼할까?"

주혁이 툭 내뱉은 말에 인혜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더니 애써 웃으며 말을 했다.

"장난하지 마."

"그 여자랑은 끝났어"

"정말?"

"그리고 나, 이제 형 밑에 안 있어. 백수야 지금. 물론 내 사업은 할거지만 "

"상관없어. 주혁씨로 충분해..."


그리고는 한달후 인혜는 신부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주혁을 기다렸다.

식장 안에선 어떻게든 식을 지연시켜야 하는 사회자의 어슬픈 애드립이 계속됐지만 하객들은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바다낚시가 주혁에겐 꿈만 같았다.

드넓은 바다위로 떨어져내리는 햇살에 홀려 자기도 모르게 물속으로 뛰어들것도 같았다.

그순간 그에겐 인혜든 가은이든, 그따위 연애의 기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낚싯줄로부터 둔중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는 힘주어 낚싯대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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