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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26. 2022

        <중세대학>

자유를 기조로하는 대학이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면 중세는 다시 도래한다

   중세라는 용어는 다분히 서양적 개념이고 대개 AD 5-AD 15의 1000년간을  말하는데 이어지는 르네상스시기를 13세기부터 잡는 이도 있다. 그전에 잠깐 12세기경에 이미 르네상스가 있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 1000년동안 중세의 지배종교이자 철학은 기독교였고 이것에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성을 가미한 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다.

 현재 서구의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유럽의 대학들이 거의가 이 무렵에 세워졌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도 처음엔 거의 대등하거나 오히려 학생이 우월했다. 그러다 14,5세기에 들어 중세가 쇠퇴하면서 대학도 빛을 발하고 파리대학은 스콜라주의를 옥스퍼드로 넘기게된다.           

  중세지성사를 논하기 위해서는 스콜라철학이 기본적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요약하면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융합을 시도한 철학이자 신학이해방법이라 할수 있다. 스콜라티시즘의 어원은 라틴어의 schola부터 시작된다. 이 말은 원래 식자간의 대화나 토론을 의미했지만 후에는 학교나 배움터를 가리키게 된다. 고대에도 이런 스콜라적 개념이 존재하지만 중세에서는 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를 sholasticus라 부른데서 이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대표자로 흔히 토마스 아퀴나스를 꼽지만 그 외에도 여러명의 논자들이 등장한다.      



  이 스콜라철학은 13세기경 중세 서방 라틴세계에서 널리 취해진 학문하는 태도나 신념으로도 정의되는데 중세인들에게 교육이란 새로운것을 찾아내는것이 아니라 원래,  또는 옛것의 발견을 재현해서 주석을 다는것,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주 대상이었다.      

 스콜라적 방법은 강의와 토론으로  나뉜다. 모든 중세교육의 기초는 권위있는 정전들을 강의하고 주석하는 일이었다.  수업은 강의, 특강,연습으로 분류되었다. 정규강의는 말 그대로 정규교재에 대한 되풀이되는 학습이고 특강은 정해진 커리큘럼 외의 것을 공부하는것이고 연습은 정전 텍스트와 연관된 주요문제들을 간략하게 논평하는 학습법을 말한다.

  중세사상에 영향을 끼친이는 교부철학의 대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최후의 로마인이자 최초의 스콜라학자’라 불리우는 보에티우스이다. 그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저작들이 번역되고 주석 붙여졌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의 거의 전부를 라틴어로 번역한것은, 스콜라적 방법의 토대를 쌓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밖의 신학적 저술들을 통해 중세 초기 스콜라적 방법의 토대를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150년을 전후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재발견된다. 그래서 13세기에 이르러 교과과정에 편입되는데, 이때 비로소 철학이 기존의  인문학과에 추가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서들, 형이상학, 도덕철학이 포함되고 이것을 ‘세 철학’이라 명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12세기는 위대한 번역의 시기로 불리우는데 이때 아랍어로 된 서적들이 다량 라틴어로 중역, 번역된다. 당시 이슬람철학역시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고, 이븐시나의 <공중인간설>은 존재의 선험적 지각설을 주장해 이는 스콜라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은 대략 다음처럼 구분된다. 그것이 존재하느냐?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어떠한 성질의 것이냐?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느냐, 이다.

 중세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인간의 이성과 기독교의 양자 모두에게 부합되는 것을 뜻한다. 즉 “중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계시된 진리와 그리스의 철학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사상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혹은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로 표현되며, 여기서의 원칙은 ’은총은 자연을 전제로 하고 완전하게 하며 고양하는’ 것을 말한다.

  신이 모든 것의 주관자이며 인간의 그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고  인간의 이성은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신적인 지성에 참여하므로, 계시된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서로를 보충한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곧 스콜라적 방법의 하나인 이념, 즉 외견상 상충되는 권위들의 조화라는 방법론을 낳게 된다. 하지만 점점 교수들은 상충되는 것들의 억지스런 조화에서 탈피하는 모습을 보이게 돼서 결국 아퀴나스와 대립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작 <신학대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충되는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의 조화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과학적 방법을 신학에 적용하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이 <신학대전>은 하나의 주제,  신학을 다루고 있는데, 각 문제는 주제의 존재, 본성, 방법의 세가지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신학대전> 제 1문은 제 1절에서 신학의 존재를 묻고, 2절부터 7절까지는 신학의 정의를 구하고, 8절에서 10절까지는 신학의 방법을 논하는 식이다. 이런 각 절은 토론의 구조에 따라 질문, 찬론, 반론, 필자의 입장, 반대 입장을 위해 제시된 논변들에 대한 답변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상 간락하게 중세 철학으로 요약되는 스콜라철학, 스콜라적 학문방법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중세 대학형성의 또다른 배경이 되었던 도시의 모습이다.     

  중세도시는 7세기부터 증가한 유럽의 인구증가에서 비롯되었다. 인구증가로 토지개간이 가능해지자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술이 향상되었고 향상된 경영방식에 의한 농업의 집약화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유럽 중세도시의 시장경제와 교환경제는, 농업경제의 배후에서 그 상호간의 영향을 살펴봐야 한다. 인구 증가로 농촌 인구는 도시로 유출되게 된다.



 중세의 전 기간을 통해서 도시는 농촌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의 증가를 통해 성장한다. 소농들의 상황도 향상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교류는 늘어나고 그래서 시장취락지들이 늘어나고  수공업자들은 도시로 이주한다.

 이탈리아는 많은 도시들이 일찍부터 상업활동에 눈을 돌려 대토지소유자를 포함한 도시적 속성을 간직한 도시민들이 존재했다. 특히 신흥도시 베네치아는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비옥한 평원중심지고 해안에 접해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소비중심지역할을 했다. 당시 소비의 가장 큰 주체는 역시 교황청이었다. 교황청은 기독교인의 위대한 순례성지 가운데 하나였고 이 순례자들 속에 상인들이 많았다.

  도시발전의 근간은 주변 농촌지대의 발전에 기인하는데, 프랑스에서는 보르도가 좋은 예이다. 보르도의 부상은, 농촌의 비약적발전과 도시주변에 위치한 농촌 인구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10세기부터는 도시의 성벽을 건설하면서 중세도시의 전형적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보호벽 역할을 했는데 중세는 늘 보복전쟁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석조성벽의 축조로 인해 도시는 이제 정주지로서 그를 둘러싸고 있던 농촌과 확연히 구별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안의 주민들을 지역을 초월해 ‘자아의식을 가진 시민’으로 하나로 묶었다. 도시의 재정측면에서도 성벽축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성벽축조의 물결은 12세기에 가장 강했지만 선구적 도시들은 이미 10세기경에 시작했다.  

   도시의 발전은 도시와 관련 용어들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도시라는 뜻의 라틴어 ‘키비타스’는 중세 초기에는 더 이상 축성된 정주지를 뜻하지 않았고 축성된 수도원을 ‘돌로 만든 키비타스’라 불렀다. 이것은 또한 성채와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 도시에 관한 중요한 독일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 Burg이다. 그리고 12세기초, ‘도시 stat'라는 말이 등장한다.  키비스 civis는 단순히 주민을 뜻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직자와 구별되는 평신도를 의미했다.           

  중세  최초의 대학들로 불리우는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 프랑스의 파리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이집트의 알아즈하르 대학, 그리고 조선의 성균관대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대부분의 유럽대학의 기원은  12세기라 할 수 있다.  대학의 전신은 교구학교였다. 그것을 기반으로 이후 교회법과 로마법과 신학을 연구한 불로냐 대학과 파리대학이 설립된다. 그리고 대학은 국가별 학자단체라는 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학생중심대학도 있고 교수중심 대학도 있다.

  볼로냐대학과 그 유형을 따른 대학들은 학생연합이 중심이 되었고 파리대학과 그 후의 대학들은 교수연합중심의 대학이 되었다. 이 두 대학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대학붐을 일으키게 된다. 12-13세기에 이루어진 학자의 이동에 의해 영국에 다양한 대학이 설립되는데 특히 파리대학 학자들이 영국에 가서 옥스퍼드를 설립한다. 독일은 이에 비해 다소 늦게 대학이 설립된다. 초기 대학 시절, 학생들은 국경을 초월해 자유롭게 이동했고 라틴어와 라틴문학은 신성시됐고 라틴교회는 로마의 중심을 이루었다.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처럼 볼로냐 대학도 11,12세기에  융성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조건은 파리대학과 달랐다. 이탈리아에서는 교회가 교육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즉, 자유학교, 세속학교가 있었다. 사람들은 문자해독률이 높았고 변증법과 신학대신 문법과 웅변을 선호했다. 특히 세속학교들은 로마법과 롬바르디법을 가르쳤다.

 AD 1100년경, 볼로냐의  Irnerius가 인문학교를 설립하고 백작부인 마틸다의 제의에 따라 로마 시민법을 가르치기 시작한 곳이 바로 볼로냐대학이었다. Irnerius는 고대 로마 법률가들이 법적 질의에 대해 대답한 내용을 가르쳤고 이 내용에 관련된 법정신과 원칙, 로마법철학을 가르쳤다. 또한 로마시민법을 재조직하고 분류했으며 볼로냐의 법류연구 방식도 재조직하였다.  이처럼 볼로냐대학은 법학으로 유명했고 그것은, 볼로냐 연구소에서 신학부를 배제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신학부는 교구학교에만 두도록 하였고 나중에 이 학교가 수도승의 연구소로 바뀐다.

 이 수도승 교수들은 볼로냐 고수와 연합하지 못했다. 14세기에 신학부가 설립되지만 볼로냐학제 자체에는큰 변화가 일지 않는다. 또한 문법과 수사학도 점차 소멸돼갔다. 이탈리아에서 학자들은 성직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볼로냐 대학의 학문적 조직은 파리대학교나 옥스퍼드대학과 유사했으나 학생들이 주가 되었다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런 자유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귀족층과 부유층이었고 파리나 옥스퍼드 대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높은 지위에 있거나 권위가 있거나 교회성직자면서 보다 높은 학문을 추구하는 3,40대가 주를 이루었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 (교수)는 강의를 위해 고용한 강의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들은 교육과정의 일정부분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대학은 점차 교회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파리대학

  Universite de Paris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대학으로 1180년 루이 7세의 인가를 받고 1215년 로마 교황에게 자치권을 얻어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학교를 모체로 한 교수와 학생의 동업조합으로 시작해서 교황의 지원을 얻어 발전해서 13세기말∼14세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설립 당시에는 신학·교회법·의학과·예과의 4개 학부가 있었으며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많은 단과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파리는 까페 왕조의 성립 (987)과 더불어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립 2세 (1180-1223)의 적극적 도시화정책에 힘입어 성벽축조, 상공인의 길드조성, 시 행정에서 시민이 기용되었다. 프랑스문화는 카롤링거 왕조 특히 그 르네상스 운동에 의해 싹텄는데 12세기초 프랑스의 저명한 3대 학교로는 랑, 파리 및 샤르트르 학교였다.

  파리의 학문과 교육의 중심은 노틀담 주교좌 성당학교였다.  교육활동이 수도승(수도원 학교)에서 재속승 (대성당학교)로 옮겨진 11세기 변혁기간 동안에 이미 대학의 기운이 엿보였고 파리대학의 창건은 이 대성당 학교가 성장발전해서 이루어진것이다. 파리대학의 핵심은 신학연구였다.      


파리대학


  1219-1231의 대혼란을 야기시킨 폭동에서 국왕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시민군대를 파견한다. 1200년 국왕의 보호로 우월권을 가졌던 master들은 강의를 중단하고 그래도 소용이 없자, 6년간 대학교를 해체하겠다는 결의를 한다. 이렇게 해서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영국, 렝스, 오를레아, 뚤르즈를 비롯한 여타 프랑스 지역으로 이주한다.  교황의 노력으로 1231년 그들은 다시 파리 교구로 돌아온다.  

  그리고 교황의 칙서에 따라 많은 권한을 회복하는데 이렇게 해서, 파리대학교 대헌장이라고 불리우는 대학정관이 탄생한다.  그후 교황 (그레고리우 4세)이 규정에서 학자들을 성직자처럼 대우하겠다는 것과 세속기관은 학자들을 존경할것을 권유한다. 불로냐의 경우처럼 파리대학에도 다양한 외국학생들이 취학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수진은 자율권을 갖게 된다.

 12세기말, 파리학교에서는 신학이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문학, 교회법, 법학 (로마법)등이 발전했고 의학도 그러했다. 그러나 교황 오노리우스 3세는 1219년, 파리에서의 로마법 연구에  통제를 가한다. 의학에 대해서도 교황은 거부반응을 보였고 파리학파가 제 2의 볼로냐로 성장하길 원치 않았다. 그에 따라 파리대학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마지막 신학교로 남게 된다.

   1200년 직후 파리대학엔 다신론적 입장과 철학적 회의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이교도들을 배척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통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자연철학을 금지시켰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윤리학은 이미 근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1231년 이후아베로에스의 라틴 번역물에 대한 출판도 활기를 찾는다.

  한편 문학교수진과 신학교수진은 서로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수도사들이 출현해 학교에서 순수신학을 강의하게 된다.  그러나 스콜라철학의 대부인 아퀴나스가 바로 이 파리대학출신이었고 중세말 스콜라철학을 옥스퍼드로 넘기기 전까지 파리대학은 유럽지성사의 중심역할을 한다.


    

 -옥스포드․케임브리지 대학     

  중세에 건립된 옥스퍼드는 현대에 와서도 그 특징들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사는 영국사와 궤를 같이하고 파리대학과 다른점은, 파리대학은 신학과 철학이 강했고 파리와 볼로냐는 두 대학 모두 구성원들이  다양한 국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옥스퍼드는 보다 지역적이고 고립된 섬나라적 성격을 띄었다. 또한 기독교의 영향도 파리에 비해 강하지 않았다. 대신 왕들이 대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파리대학이 형성의 근거를 대주교 성당학교 cathedral에 두고 있는 반면 옥스퍼드 대학은 이와는 무관하게 전개되었다.  옥스퍼드의 chancellor의 존재는 처음부터 대학권익의 대변자, 옹호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옥스퍼드는 칼리지도 유명했다.     



옥스포드대학



  도시 옥스퍼드는 지정학적 위치나 종교적, 또는 산업면에서 영국내에서 그리 경쟁적인 곳이 아니었다. 이런 옥스퍼드 타운에서 선생이라는 존재가 나타난것은 대강 1095년부터 1125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시기에 영국은 이미 교육의 열기가 보이고 있었고 이 최초의 선생은 시어볼드였다.  그러다 1180년에 접어들면서 옥스퍼드는 종교적 송사 訟事의 중심지가 되었고  법학교수들이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먼곳에서 옥스퍼드로 많은 학생들이 이동해왔다. 이어서 12세기 말, 옥스퍼드와 엑서터에서 시민법과 교회법이 강의되었고 옥스퍼드는 대학으로서 확실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옥스퍼드에 교수학생 조합의 형체가 나타난것은  13세기 초반이었다.  1208년 겨울, 옥스퍼드 어느 학생이 한 여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당시 존 왕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불화관계에 있어 학생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학생, 교수들이 강의를 정지하고 학교를 떠나 파리나 케임브리, 레딩으로 이주하고 이것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시초가 된다.

  그러다 1214년 존왕과 교황이 화해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서 옥스퍼드대학으로서는 최초의 대학특전을 얻게 된다. 이 제정서에서 학생들은 다방면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 제정서는 1200년 필립왕이 파리대학에 대해 취했던 자유헌장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면서 학교가 자치적으로 chancellor를 선출할 권한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챈슬러의 권한은 타운의 거의 모든 부분에 까지 확대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면 곧바로 왕권이 개입돼 대학의 편을 들었다.  파리대학이 왕권과 교황의 도움을 동시에 받았다면 영국대학은 거의 일방적으로 왕권에 의존했다. 옥스퍼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홀, 호스텔, 칼리지의 개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칼리지가 모여 대학을 이루는 칼리지-유니버시티의 관계, 즉 칼리지 연합체의 성격을 띄었다.     

 칼리지는 독자적 예산권과 교수, 학생 선발권까지 가졌고 칼리지-유니버시티 구조에서는 칼리지가 가르치는 곳과 기숙사를 겸했다. 처음엔 주로 학부졸업생들을 수용하던 칼리지가 학부생들을 수용하면서 홀들은 차츰 쇠퇴해간다.   칼리지의 학문적 관심도 시기에 따라 변해가는데  13세기 무렵에는 인문학과 신학이 주를 이루었고 14,5세기에는 시민법과 교회법으로 기울게 된다. 100년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는 인문분야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 대학

  십자군 전쟁 이후 , 발전된 이슬람의 학문이 유럽에 전래되어 중세 대학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수학, 의학, 천문학 등의 모든 학문들이 발달하였고 이것이 중세에 들어와 유럽 대학들에 전해진다.   ‘빛나는 꽃들’이라는 뜻을 가진 알아즈하르의 역사는 서기 971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 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시아파 교리를 신봉했던 파티마 왕조는 선교를 목적으로 알아즈하르 사원을 건립했고, 988년 사원 안에 전문적인 선교요원 양성을 위한 기구로서  대학을 세웠다. 볼로냐대학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 할 수 있다. 파티마왕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한 알아즈하르는 12세기 말 이후 수니파 교리를 따르는 새로운 지배층에 의해 시아파 교육기관에서 수니파 교육기관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때 이슬람 문화 중심지였던 바그다드와 안달루시아의 쇠퇴로 13세기 중반 이후엔 이슬람 문화와 학문 중심이 이집트 카이로가 되었고 그 덕에 알아즈하르는 명실상부한 이슬람권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주목받았다.            



     -조선의 성균관대학     

  한국 최초의 대학은   372년에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다. 이곳에서는 경전읽기를 비롯하여 활쏘기 등의 교육과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 후 백제에서도 유교를 가르치고 그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유교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992년,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설립돼 유교 경전을 단계별로 교육하였다. 국자감에서는 경전교육과 더불어 공자를 추모하는 다양한 의식을 거행했다. 국자감은 이후 국학(國學) 또는 성균감(成均監)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어오다가 공민왕 11년(1356)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으로 정해졌다.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태조 7년 (1398) 한양 성균관이 준공을 보게 되고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이 즉위하면서 교육을 장려한다. 태종의 학문적 배경은 성균관이었다. 그는 성균관 활성화를 위해 몇가지 정책을 실시했는데 우선 성균관 시설의 복구와 체제의 완비를 서둘렀고 우수교관의 확보와 문신의 교관직 겸임을 제도화했다. 그러면서 경학교육을 강화한다. 또한  성균관 운영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권근을 기용해 성균관 교육에 전념케 하였는데, 권근은  경학과 제술의 조화를 꾀했다. 그러나 과거 때문에 제술이 강세를 띄면서 성균관에서의 경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일게 되자 태종 17년 과거법이 개정된다.이것은 성균관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한것이었고 과거에서 강경법을 부활시켜 제술위주의 학풍을 지양하였다. 과거응시자는 누구든 성균관 원점300점을 필수규정으로 이수하게 하였다.     




   이상 대표적인 중세대학들을 살펴보았고,  14,15세기 유럽에서 대학들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도시문화의 태동과 ‘12세기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성립됐던 대학은 당시 유럽사의 변화에 따라 굴곡을 겪게 되는데, 14,5세기 로마 교황권의 실추가 우선 그 원인이다. 그리고 여러나라에서의 절대주의와 민족주의의 태동 역시 그 원인이 되었다.

  페스트의 창궐은 기독교 세계에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이제  세속권력이  교황을 대신하게 되면서, 그 뿌리를 카톨릭적 중세에 두고 있던 대학도 필연적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14세기, 절대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 대학은 예속되기에 이른다. 이런 현상은 특히 독일에서  두드러졌다. 이런 국가화의 바람은 파리대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파리대학은 이제 국제대학이 아닌  '프랑스의‘대학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교황의 가장 강력한 하수인들인 탁발수도회 교사와 재속 교사들 사이의 대립도 대학의 와해를 가져온 원인이 된다. 탁발수도회의 대학진출은 중세말 대학의 지적 저하를 가져왔으며  이것은 반 反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즉, 성서와 그리스 철학의 짧았던 화해의 시간이 종말을 맞은 것이다.

  그러면서 신학은 ,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신을 인식할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으로 복귀한다.  파리대학의 근간이 된 자연철학은 이제 정지된다.  이런 파리대학의 지적 퇴화는 결국 14세기에 이르러 스콜라학의 중심을 옥스퍼드로 넘기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이제 신학대신 법학이 유력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국가는 대학의 탈종교화를 추진하면서 대학출신자들이 성직이 아닌 국가 관료가 될것을 권했다.      



   이러한 중세말의 현상은 도시민들 간의 간극을 벌여놓았고 그에 따라 교수라는 직업세계에도 변화가 인다. 그들은 이제 노동계급과 특권계급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14,5세기 교수들은 부의 축재에 관심을 보였다. 한때 학생들에 비해 열악하던 교수들의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400년경, 학생보다 교수에게 유리한 학칙들이 제정된다. 마침내  교수직을 세습하는 경향까지 일게 된다. 이제 그들은 귀족이 된것이다. 이런 것은 교사를  지칭하는 명칭의 변화에서도 엿보이는데  12세기에 magister, maitre는 작업장의 우두머리를 의미했다. 이처럼 교사 (교수)도 다른 장인들과 같이 한낱 직능인으로 이해되던것이  이제는 ‘영예로운 신분’으로 변화된 것이다.     

  요약하면 중세대학은 무엇보다도 도시형성과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속에서 형성되었고 스콜라주의가 주를 이루었다. 파리대학과 볼로냐대학은 국경을 초월한  국제적 대학으로서  법학과 신학의 선두에서 명성을 유지해갔으며 후발주자인 옥스퍼드는 많은 컬리지들을 거느리면서 볼로냐, 파리대학을 따라잡는다.

   그러나 중세말에  흑사병과 절대주의왕권의 등장으로 대학도 이제 교황청이 아닌 왕권에 예속되고 그런 변화에 발맞추어 그동안 학생들에 견주어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교사(교수)들의 신분도 신성한 것으로 변했다. 이런것은 결국 중세대학들의 학문열 즉, 신학을 논증적으로 해석하려는 스콜라티시즘의 퇴보를 가져온다.

   그리고 당시 이슬람을 비롯한 아랍권의 문화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고 그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되면서 그것이 유럽으로 넘어온것은 특기할 사항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은 논쟁의 장이다.  이런것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 억압되면 중세는 또다시 도래한다. 그래서 대학정신은 ‘자유’로 집약되는 것이다.          



               

  참고자료-   박우석지음, 『중세철학의 유혹』, 서울:철학과 현실사,1997. /   김동구 지음, 『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서울:문음사, 2003./   이광주지음, 『大學史』, 서울:민음사, 1997/  ,이석우 지음, 『대학의 역사』,서울:한길사, 1998./   자크 르고프 지음․․최애리 옮김, 『중세의 지식인들』, 서울:東文選, 1999/   신천식 지음, 『조선전기 교육개혁과 과거운영』, 서울:경인문화사, 1998/   하병주 엮음, 『이슬람 사상과 문화』, 부산: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3/ 에티엔느 질송 지음․ 김기찬 옮김, 『중세철학사』.서울:현대지성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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