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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17. 2023

소설리뷰 <파트릭모디아노 ,혈통>기억과 상처

흔히들 , 어떻게 인두껍을 쓰고 그런짓을 하냐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벌어진다.

이 소설속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다. 그는 아내를 버리고 재혼해서  전처와 아들이 사는 윗층에 새살림을 차린다.


꼭 그곳밖에 없었을까,하는 의구심은 인간의 잔인성이라는 지점에 이르게 한다. 졸지에 무일푼이 돼버린 전처와 아들 모디아노는 거의 구걸과 좀도둑질로 생을 연명한다.


"어머니 아파트는 4층이었는데 푹 꺼진 소파 이외에 가구라곤 전혀 없다. 아버지는 밀렌 드몽조처럼 생긴 여자와 5층에 산다"



이렇게 자신의 혈육을 내팽개친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든 눈앞에서 치워버리려 입영연기를 철회하라고 닦달까지 한다.


오늘의 소크라테스가 있기까지는 악처의 역할이 컸다는 농담을 흔히들 하는데 그렇다면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까지 안겨 준건 어찌보면 이런 난봉꾼에 한량이었던 부친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만큼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하지만 모디아노의 소설은 한마디로 요악되기에는 너무나 무질서하고 플롯이 복잡하며 거기에 의식의 흐름까지 가미돼 어찌보면 '조금은' 난해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주된 스토리를 잡아가며 읽는다는게 그리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두번 모디아노의 호흡에 적응을 하며 그 다음엔 그 나름 읽는데 속도가 붙기도 한다.


그는 평생을 , 거의 전작을 연작형식으로 비슷한 주제와 이미지에 천착해온 작가라 할수 있다. 바로 '기억'이 그것인데,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심리는 무얼까? 너무나 아름다워서? 혹은 너무나 참담했기에? 아마 둘중 하나일 것이고 모디아노의 기억속 과거는 곧잘 상처 trauma와 연결된다.


언젠가 <메모리레인>을 리뷰할때도 쓴것처럼 그는 지나간 시절 잠시 모였다  흩어진  '소그룹'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수십년이 흐른뒤까지 간직하고 복기하며 무상에 젖는다.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들의 변주에 대해 읽는 이들의 호불호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에테르는 나에게 고통을 떠올리면서 또한 이내 그 고통을 지우는 묘한 속성을 지니게 된다. 기억과 망각..."


이렇게 '기억과 망각' 두가지가 모디아노를 평생 관통하는 주제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리운 감정없이 빠른 목소리로 그 연도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리라. 말이 엉킨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1962년 가을이었지만 19세기이기도 했고 어쩌면 훨씬 더 오래전이었는지도 모른다...1963년, 1964년. 연도가 혼동된다. 느릿느릿한 나날들. 비오는 날들...그렇지만 하얗게 밤을 지운 후 봄날의 거리를 걸을때 느끼는 도취와 불면이 뒤섞인 무미건조함을 간혹 벗어나 나는 또다른 상태를 겪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내린다.

"나는 혈통있는 척 하는 한마리의 개다"



모디아노의 글은 우리를 몽환의 세계로 이끌어 그곳에서 처절한 아픔을 맛보게 한다. 그는 일견 그것을 즐기는 새티스트면서도 그 과정에서 지독히 자신을 괴롭히는 메저키스트라 할수 있다. 바로 윗층에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는 결국 두층을 연결하던 통로를 차단해버린다.

이것은 부자간의 단절을 의미하면서도 아버지로부터의 벗어남과 작가라는 제 2의 삶이 열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모디아노를 쓰면서 에릭사티가 떠올랐다. 두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아파했다.. 그러나 모디아노는 그것을 끝없이 반추함으로 아픔과 친해지려했다면  사티는 지독한 실연 뒤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했다.

얼핏, 반대의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 두사람이 하나인것처럼 생각된다. 내 사고의 비논리성에 기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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