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사랑의 확률>
헤어지는 일만 남았다고.
은선은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윤정으로부터 듣는다.그 소식에 은선은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결혼따위는 다신 안할거같던 그였기에.
준석은 사회파추리 장르에서 나름 입지를 굳힌 작가였지만 판매량은 늘 부진했다. 은선은 그의 담당기자였고 그렇게 만난 둘은 일의 특성상 자주 접촉하면서 가까워졌지만 , 최소한 그렇다고 은선은 믿고 있었지만 준석은 웬만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이른바 곁을 안주는 남자였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한번도 일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한적이 없음에도 은선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길어도 이틀에 한번씩은 메일이며 문자를 해오던 준석의 메시지 내용은 별다른게 없었다. 여름이면 에어컨을 하나 빨리 놔야지 못살겠다, 겨울이면, 외풍이 심해 아파트로 빨리 옮겨야겠다, 그게 다였다. 그러면 은선은 월급을 헐어서라도 에어컨을 놔주고 싶었고 외곽 작고 비싸지 않은 원룸이나 투룸 아파트를 검색하곤 했다.
준석은 이혼남이었다. 딸은 전처가 키우고 그 전처역시 소설가였다고. 둘의 이야기는 출판계에선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의 외도로 이혼했다는 루머가 퍼져있어 처음 그를 담당하라는 데스크의 지시에 은선은 본능적 거부감같은게 일었지만 공사를 구분하자, 다짐하고 그를 맡게 되었다.
“정기자,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언젠가 함께 점심을 먹다 그가 불쑥 물어왔다. 이마에 땀이 맺힌채....은선이 뭐라고 대답을 않자, 개 한 마리 키워요,하며 자기도 곧 입양할 생각이라고 했다. 혹시 강아지나 고양이 입양한다는 사람 있음 소개시켜달라고 덧붙였다.
은선 나름으로는 어지간히 둘 사이가 좁혀졌다 생각한 시기에 들은 말이라 적잖이 실망했다. 그건 그가 계속 싱글을 고집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언젠가는 새벽에 장문의 메일을 보내, 자신은 모든걸 초월한 삶을 추구한다고 했다. 가난도 여자도 모럴까지 초월한 그런 삶을...
그를 소재로 은선은 단편 하나를 써서 문예지에 보낸적도 있다. 채택은 안됐지만 그만큼 준석은 은선의 마음을 장악해갔고 어느날밤 은선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남자여자 사이에 섹스가 없다면? 하고. 그러자 그로부턴 한동안 답이 없어 은선은 그런 자신을 죽이고 싶을만큼 저주했고 결국은 그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갓 태어난 눈도 제대로 못뜬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했다.
그는 지난번 메일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그저 좋아서 히죽대기만 했다. 그리고는 정기자도 한 마리 키워....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은선은 그에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영국으로 석사과정을 하러 떠났고 1년짜리 과정이 있어 죽어라 노력한끝에 결국 영문학 석사를 취득해 돌아왔다.
그 1년동안 가끔 동료기자인 윤정으로부터 준석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신인 소설가 F와 사귄다는. 은선은 그가 도대체 어떻게 연애를 한다는건지 이해가 안갔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단 한번 자기의 손조차 잡지않았던 그가 어떻게....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녀는 준석만을 생각했다.
대학동창 철민이 학과장으로 있는 2년제 대학 실용영어 강의를 맡아 은선은 일주일에 세 번 서울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은선이 귀국한걸 알고 출판사에선 복직을 타진해왔지만 출판계의 현실을, 뒷이야기를 이미 익히 알고 있는터라 가끔 번역거리나 달라는걸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학교를 택했다. 실용영어라고 해봐야 은선도 현지에 가서 익힌 것이 다인만틈 틈틈이 이어폰을 끼고 취준생 버금가게 노력을 해야했다.. 이러다보면 언젠가 자신이 전공한 버지니아 울프를 강의하는 날이 오겠지,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지금쯤은 준석도 자신이 돌아온걸 알겠지, 어느날 교통 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문득 그를 떠올린다. 그렇게 차를 몰던 그녀는 인사동근처 어딘가에 차를 댄다. 언제부턴가 차량진입이 안되는 그 거리를 준석과 땡볕속에 걸은적이 있다. 물론 일이야기를 하면서. 그리고는 어느 골목에서 짧게 맞담배를 피웠던 기억까지..
전통찻집에서 차나 한잔 마시자,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인사동길을 걷기로 한다. 그러다 그 길목이 나오는 길 모퉁이가 눈에 들어오고 설마설마,하면서 그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 그도 단번에 그녀를 알아본다. 은선씨. 하고 그가 부른다.
“아내와는 지금 따로 살아요” 은선이 결혼 축하한다는 말을 하자 그가 뜸을 들였다 대답한다.. 웬만해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그인지라 은선은 잠시 당황한다.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은선씨는 싱글? 여태?”라고 그가 물어온다. 은선은 침묵한다. 그렇게 둘은 삼십분정도 차를 나눠마시고 까페를 나온다.
이제 기자일 안하면 볼일이 없겠네? 헤어지기 전에 그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린 그때 사랑했던걸까, 은선은 내내 그게 궁금하지만 묻지 않기로 한다.
학생들 과제물을 체크하느라 밤을 새고 있는 은선에게 문자 알림이 들려온다. 누구지? 하면서도 은선은 어쩜 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문자를 확인한다. 준석이었다. 왜 갑자기 그때 영국으로 갔냐고. 차마 당신 때문에 떠난다는 말을 할수 없었던 은선은 답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는 다시 과제물로 눈을 돌리는데 이번엔 전화가 걸려온다. 웬만해서는 전화를 하지 않는 그였기에 은선은 적잖이 당황한다.
“내가 방해했나?” 그는 그렇게 말을 놓는다. 은선은 울컥 그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오른다. 애써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무슨 일이냐고 하자, 그냥...그냥 생각나서, 하고는 일하나? 한다. 그렇다고 하자, 한번 볼까? 하며 그는 오랜 연인처럼 그녀에게 물어온다. 그러고보니 지난번 인사동 골목에서 그와 마주친 이후로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은선은 그를 다시 봐야 할 이유를 딱히 찾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그가 자신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 부아가 치민다. 시간 나는대로 연락드릴게요,하고 그녀는 서둘러 통화를 끝낸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과제물 체크를 다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잠을 청해보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비가 청승맞게 내리는 날, 강의를 끝낸 은선이 자기차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짧게 경적이 울린다. 순간, 그인가? 하는 기대감이 그녀를 또다시 덮쳐온다. 그였다. 준석. 지난번 까페에서 커피를 나누면서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외곽의 2년제 대학 강의를 나간다고 이야기했으리라. 어쩌면 학교이름까지...
은선이 자신을 알아본걸 확인한 그는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온다. 어떻게,라고 하는 은선에게 그는 ,대학교 오랜만이다,하며 비오는 교정을 눈으로 훑는다. 좋겠네 젊은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공기도 좋고...대학교정은 작지만 단정하고 그나름의 운치도 있었다.둘은 그렇게 주차장에 차를 버린채 비오는 교정을 함께 걷는다. 은선의 우산 하나를 나눠쓴채.. 원고 넘기고 들어가다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에 왔노라고...
은선은 용기를 내서 묻는다. 별거... 하자 그가 짧게 대답한다. 헤어지는 일만 남았다고.
그가 정말 다시 싱글이 된다면, 은선은 이후로 내내 그 생각만 한다. 그럼 우리 사랑은, 둘 사이의 이 감정이 만약 사랑이라면, 우린 가능할까, 그 사랑의 확률은 얼마나 되는걸까...그런 생각을 하다 그녀는 가로수에 차를 들이박고 결국 공업소에 가서 수리를 맡긴다.
지난번 대학에 그가 찾아온 뒤로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다 낡은 녹색 경차만 보면 그가 떠올랐고 함께 걷다 잠시 스쳤던 서로의 손의 감촉에 괴로웠다. 차를 다 고친 그녀는 이왕 시내에 나온만큼 옛동료 윤정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그렇게 얘기해? 그 사람 참....”
은선이 조심스럽게 준석의 이야기를 꺼내자 윤정은 어이없어한다. 그사람들 잘살고 와이프가 아이 가졌다는데?
그말에 은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칠뻔한다.
“정기자, 인제 마음접어” 윤정이 그렇게 말하며 자긴 지금 연애방학중이라고. 담당 작가와 썸을 타다 무참히 깨졌다며, 썸이 연애보다 더 후유증이 크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이다, 나 한심하지? 이 나이에 썸이나 타고, 하면서 시니컬하게 웃는다.
윤정과 헤어져 은선은 예의 인사동길을 다시 걷는다. 그러다 문득, 주영의 이야기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무책임하게 방치한 그라 해도 와이프가 임신까지 한 마당에 헤어질 거라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그를 원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 정도는 있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지금 잠깐 볼수 있냐고.
“그렇게 말해? 아이까지 가졌다고?” 그가 기가 찬듯 되물어온다. 아니죠? 은선의 표정은 그렇게 묻고 있다. 잠깐 집에 들어간 적은 있지만 지금은 따로 산다고. 그리고 아이이야기는 터무니 없다고 그가 해명한다. 은선은 그의 말을 믿고싶다. 설사 그가 거짓을 이야기한다 해도 믿을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당신 때문에 여길 떠났어요 그때“ 은선은 1년전 돌연 영국행을 결정한 이유를 그제야 말한다. 역시 그랬군...하며 그가 손깍지를 끼며 그녀에게로 몸을 굽힌다.
”개 키우라니까“그가 뜬금없이 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그말에 은선은 1년전 자기가 선물한 강아지가 궁금하지만 묻지 않고 대신 깍지킨 그의 손을 잡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처럼 손깍지를 끼어 테이블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그가 은선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녀의 손을 잡아온다. 손이 차네...
그날, 둘은 근처 모텔로 향했고 은선은 그의 품에 안긴다. 내내 당신을 원해왔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나도 니가 그리웠어, 그도 말한 것 같다. 사랑이었어. 자신이 그토록 오래 긴가민가했던 감정이 실은 사랑이었다고 그녀는 확신한다. 내가 너한테 상처를 주는 건 아니지? 준석이 낮게 물어온다.
그렇게 모텔을 나와 각자의 차에 오르기 전에 그가 말한다. 이따 전화할게. 그가 다음을 기약한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은선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오른다.
그날저녁, 은선이 강의준비를 하는데 메일 알람이 들려온다. 은선은 그라는걸 알아차리고 서둘러 메일을 연다. 역시 준석의 메일이었는데 파일이 하나 첨부돼있다. 뭐지? 하며 메일 내용을 읽는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바쁘면 안해도 되고...이번에 문학칼럼 하나 써야 할게 있는데 해외문학현황을 좀 알아야해서...내가 영어 까막눈이거든, 번역 되겠나 내일 새벽까지? 좀 급해서..“
은선은 불과 몇시간전에 자기를 품에 안았던 남자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오죽 급했음 그랬을까 싶어 밤새워 A4 12장의 영문을 번역해 그에게 보낸다. 그러고 침대에 드는데 문득 , 이사랑은 진짤까,하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렇게 한달을 혼란속에서 헤매던 은선은 준석으로부터 단한통의 이메일이나 문자도 받지 못한다. 최소한 번역에 대한 감사인사라도 할줄 알았으나 그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새벽녘 걸려온 전화에 윤정은 적잖이 놀란듯한다. 무슨일이야? 그녀가 물어온다. 한가지...정말, 그 와이프 임신한거 맞어? 라고 묻자, 윤정은 대답대신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뜸을 들여, 자기 충격받을까봐 이야기안했는데 며칠전에도 원고 때문에 그 와이프 만났노라 대답한다. 배가 어지간히 불러있었어..
은선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자기가 윤정으로부터 들은게 사실이냐고...그러자 한시간쯤 있다 그가 답문을 보내온다. 자네가 왜 궁금해하지 남의 부부일을? 은선은 충격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다. 안그래도 근래들어 자주 어지럼증을 느껴온 터였다.
그러다 간신히 자신을 추스린 그녀는 왠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해서, 자기가 선물한 강아지는 잘 크고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 새끼 금방 죽더만, 하고 그가 거친 답문을 보내온다. 그문자를 확인하던 은선은 방바닥에 쓰러지면서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다.
눈을 뜬건 병원 응급실이고 자기 머리에 붕대가 감긴걸 은선은 그제서야 확인한다. 전화를 끊은 뒤 왠지 불길했던 윤정이 그녀를 찾아와 쓰러져있는걸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긴것이다. 정리해 그만. 윤정이 시트를 잘 덮어주며 낮게 말한다. 차마 윤정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는 은선은 고개를 돌려 무심히 벽을 쳐다본다. 누군가 낙서를 잔뜩 해놨다. 그중엔 하트도 있다. 남녀의 이름도 써있다. 응급환자가 이럴 정신이 있다는게 그녀는 신기하기까지 하다...그, 혹은 그녀도 자기처럼 ,그 사랑의 확률을 가늠해본걸까, 그녀는 생각한다.그러고 있는데 응급의가 다가와서 검사결과 큰 이상은 없다고 하면서, 근데 아시죠? 임신초기엔 조심해야 한다는거? 라고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