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외등 아래서>

이번에 적금타면 자기 차 바꿔주려고 했는데

by 박순영


민희는 퇴근무렵이 돼서야 오늘이 형석의 서른네번째 생일이란걸 깨닫는다. 셔터가 내려진뒤 수신팀은 더 바쁘고 힘들다.그날 하루 들어온 돈을 다 세서 묶고 그날 나간 통장갯수도 체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7시를 훌쩍 넘기는 날이 많다. 그런지 그날따라 손이 무디기만 하다. 그녀는 계속 시간을 본다. 지금쯤 형석이 퇴근하리라 생각한다.

형석은 이번 시즌 신상품 런칭으로 분주하기만 하다. 만년 대리 딱지를 떼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뭔가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며칠째 야근을 하다보니 몸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자기 귀빠진 날까진 잊진 않는다.그런데 민희에게선 단 한통의 전화도 없다. 그게 못내 서운하다.

민희는 퇴근길에 근처 대형마트에서 서둘러 장을 본다. 형석이 좋아하는 낙지 볶음은 기본으로 챙겨야 하는 메뉴였다. 그렇게 양손가득 장을 본 그녀는 마침 자기를 향해 오는 택시에 오른다. 지금가면 형석이 먼저 와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은 미안해진다. 이번 적금타면 폐차직전의 형석의 차부터 바꿔주리라 마음 먹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형석인가 보다,싶다,하지만 천안 엄마의 전화다. 여동생 민선의 결혼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을 전하며 니가 좀 보태야지,라고 덧붙인다. 이렇게 해서 형석의 차 바꾸기는 또 미뤄진다.

형석은 시동조차 잘 안걸리는 차를 억지로 출발시켜 러시아워를 지나 조금은 한산한 거리로 나온다. 그러면서 민희와의 5년 연애가 어쩜 이 차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근래 와서 둘은 사소한것에서도 자주 충돌하고 어쩌다 갖는 섹스조차 양에 차질 않는다. 그녀는 예전보다 심드렁하게 그를 받아들이고 그 역시 그녀에 대한 욕구가 많이 사그러들었음을 인정해야했다. 그러다 둘은 아마 헤어지리라..그런 생각을 하는데 감빡이도 켜지않고 마구잡이로 끼어든 차 한 대때문에 그는 급브레이크를 걸고 그러자 차는 끽! 소리를 내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공업소 직원은, 고치는비용이 거의 사는 값이라고 한다.


형석의 원룸은 지난번과 다름없이 정신없이 어질러져있다. 민희는 찌개가 끓는 동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형석의 옷가지들을 정리해서 옷장에 넣고 벽에 걸고, 접어서 서랍에 넣고 한다. 그리고는 청소기를 돌리려는데,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난다. 형석이 왔나 싶어 재빨리 현관으로 가지만 들어서는건, 형석이 아닌 형석의 엄마다. 왔니?하면서 그녀는 심드렁하게 그녀를 쳐다본다.

언젠가 형석이 본가에 인사가자 했을 때 민희는 조금은 내키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결혼생각이 확실히 서지 않은 상태여서 머뭇머뭇했다. 그러자 형석이 너 나랑 안살거야?라며 토라졌고 그제서야 민희는 그를 따라 인천 그의 본가에 인사를 갔다.

처음엔 민희가 은행원이라는 말에 형석의 엄마는 반기는 눈치였지만 민희의 수입이 거의 다 시골 본가로 보내진다는걸 알고부터는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민희네 역시 형석이 대리를 단 지 한참 됐는데도 승진조차 못하고 나이 서른 넘어 아파트 한채 없다는게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그렇게 두집안 모두 그닥 반기지 않는 연애를 둘은 5년씩이나 끌고 온 것이다.

“그래서 니들 어쩔 셈이야?” 형석의 모친이 민희에게 묻는다.

“죄송해요 어머니”라고 대답하면서도 민희는 왜 자신이 그런말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른다. 빨리 형석이라도 왔음,하는 마음뿐이다.

“지금 생일상 차리니?”하고 형석의 모친은 끓고 있는 찌개며 잡채거릴 뒤적이며 묻는다. 민희가 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왠지모를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자기가 싸온 부침이며 약과를 꺼내놓는다. 이거 어머니가 다 하셨어요?라고 민희가 묻지만 형석의 엄마는 아무 대답도 않는다. 그렇게 한시간을 어색하게 있던 형석 엄마는 끙, 하며 가려는 눈치를 보인다. 늦나보다, 기다릴래? 하며 신발을 꿰어신는다.

원룸 건물 앞까지 형석모를 배웅하고 돌아서던 민희는 앞날이 막막하다. 설령 결혼한다해도 환영받지 못할거라는 생각에...

그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택시 한 대가 들어서는게 보인다. 그런가,보다 하고 유리문을 미는데, 왔어?라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면 형석이 택시에서 내리고 있다. 차는? 민희가 묻자, 갔어,라며 손으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인다.

형석역시 쥐꼬리만큼 받는 월급을 5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아버지와 동생 둘의 대학등록금에 다 쓰고 있는터라, 당분간 차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이번에 적금타면 자기 차 바꿔주려고 했는데, 라고 하자 형석은 , 차 필요없어. 대중교통이 얼마나 잘돼있는데 라며 잡채를 꾸역꾸역먹는다. 맛있어?라는 표정으로 민희가 보자, 좀 짜다,라며 그는 물을 벌컥거린다. 생일축하해,민희가 수줍게 내민 넥타이핀을 보고는 쓸데없이 이런건 왜,라며 침대위에 툭 던진다. 한번 해봐,라고 민희가 말하지만 그는 나중에,라고만 한다. 저녁을 다 먹은 둘은 TV 예능프로를 한시간쯤 같이 본다.그리고는 더 늦기 전에 가라고 형석이 민희를 채근한다. 당신이랑 자려고 했는데...민희는 그런 생각을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다. 둘이 관계를 가진지도 꽤 됐다는 생각을 한다. 민희가 주섬주섬 갈 채비를 차리자, 그제서야 형석은 자고갈래?한다. 그말에 민희는 갈래 그냥, 하고는 현관으로 향한다.




사흘후 형석은 신입 여직원 윤과 매장을 돌아보기로 하고 회사를 나온다. 윤은 이제 갓 대학 의상학과를 졸업한 새내기다. 얼굴엔 아직도 솜털이 나있고 숫기도 없어 신입사원 환영회때 노래 하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자기의 신입시절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형석은 그녀를 나름 배려해주고 가끔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다주곤 했다. 그러자 둘 사인 제법 가까워졌고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둘이 매장 현황을 체크하고 매대 정리를 다시 하라고 지시하는데 형석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면 민희다. 점심시간을 틈타 잠깐 들른 듯 하다. 웬일?하는 표정으로 형석이 민희를 쳐다보자 민희는 형석옆에서 어정쩡히 서있는 윤에게 시선이 간다. 요즘 와서 가끔 언급하는 그 새내긴가본다,라는 생각에 민희는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지나가다...하고 옷을 둘러보는척 하다 민희는 서둘러 매장을 나간다. 윤이 애인?하고 묻자, 형석은 대답대신 애매하게 웃는다.


퇴근하는 민희를 대출담당 최가 굳이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라며. 그는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고 근래 들어 민희에게 틈틈이 어필을 해온 터라 그녀는 적잖이 부담을 느낀다. 그럼에도 거의 강권에 못이겨 그의 차에 오르게 되고, 그러자, 우리 어디가서 영화라도 볼까?그가 차를 빼며 묻는다. 왜 이남자와 영화를 봐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차는 이미 시내 영화관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팝콘과 음료를 사들고 영화를 본다. 지독한 치정 멜러였고 낯뜨거운 장면이 많아 민희는 거의 눈을 감고 보다시피 한다. 그러다 어느순간, 윤이 자기손을 매만지는걸 느기고 그녀는 화들짝 놀라 먼저 상영관을 나온다. 뒤따라 그가 나오고 그렇게 둘은 실랑이를 하는데 저만치 다른 상영관에서 나란히 나오는 형석과 신입 윤과 마주친다.


이 기묘한 상황에 형석과 민희 둘다 해명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채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다 형석이 먼저 침묵을 깬다. 니가 왜 여기 이러고 있냐고.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최는 붙잡고 있는 민희의 팔을 놓는다.


우리 헤어져, 민희가 먼저 말을 꺼낸다. 지난 5년간 한두번 결별을 한 적도 있고 해서 형석은 이번에도 그런 그녀의 말을 그저 응석정도로 받아들이는 눈치다. 걘그냥 부하직원이라니까,형석이 말하자, 영화만 봤겠어? 라며 민희가 쏘아붙인다. 그러자 형석도 발끈해, 그 자식 뭐야, 니 팔 붙들고 있던데. 그자식이랑 영화만 봤어?라고 벌컥 화를 낸다. 아무사이도 아니라고 민희가 아무리 해명하려해도 형석은 받아들이질 않는다.

우리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민희가 드디어 폭탄발언을 한다. 그말에 형석은 왜 못해,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자기들 처지로 결혼은 어림없다는 사실에 그저 침묵하기로 한다. 지쳤어,라고 민희가 웅얼대는걸 들은것도 같다.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둘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그럭저럭 살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둘다 피붙이들에게 돈을 죄다 갖다바치다 보니 정작 자신들에게 돌아오는건 마이너스통장 뿐인 현실을 둘다 인정하는 눈치다.

그럼 헤어지든가! 라며 형석이 거칠게 내뱉고 원룸을 나가버린다. 쾅,하고 닫히는 현관문 소리를 들으며 민희는 정말 끝을 내야겠다,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후 최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바로 그날 퇴근 무렵, 최가 민희에게 그 사실을 직접 알린다. 민희는 그에 대한 마음이 없는터라 그러는 그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아이는 와이프가 맡기로 했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하며 민희를 또 바래다 주겠다고 고집한다.

지난번 형석의 원룸에서 서로 다툰 뒤 그는 전화한통, 문자 하나 없다. 이번엔 정말 끝난건가보다,하며 민희는 최의 차에 탄다. 그러자 우리 오랜만에 북악스카이웨이나 한번 돌까?하면서 그가 방향을 잡아 차를 틀기 시작한다. 형석과 헤어졌다고 최와 엮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대안 하나쯤은 있는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민희는 그와 소소한 농담까지 나누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형석도 윤과 이러고 있겠지,하며.

36개월 장기 할부로 새로 뽑은 경차에 형석은 윤을 시승시키기로 한다. 우리 외곽으로 빠져볼까? 그가묻자 윤은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지난번 매장에서 분명 그의 여자로 보이는 민희를 보고 난 뒤 윤은 더더욱 형석에게 어필해왔고 형석도 그리 싫은 눈치는 주지않았다. 민희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뭐가 어떠랴 싶어 윤은 그에게 욕심을 낸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모르지 않는 형석은, 언젠가 야근을 하다 그녀의 이력서를 들여다본적이 있다. 아버지가 강남에서 크게 정형외가를 개원하고 있는 의사집안 딸이었다. 그리고 하나 있는 오빠는 대학 조교수였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형석은 판단했다. 부양해야 할 동생과 모친이 있는 민희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이 윤의 배경은 윤택했고 속된말로 빵빵했다. 뭐 죄짓는것도 아니고. 헤어지자는 말도 민희 입에서 먼저 나왔으니, 자기도 나중에 원망못하겠지, 정도의 심정이다.


그렇게 형석은 그날 윤을 태우고 양평으로 차를 몬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당일치기는 무리라 생각했고 근처 호텔까지 미리 검색하고 나온 터였다. 윤도 은근 같이 밤을 보내는걸 바라는 눈치다.

북악스카이웨이를 돈 최는 민희의 집앞에 차를 대며 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형석외에 남자라고는 들여보지 않은 민희로선 여간 당황스러운게 아니었다. 지난번 그 친군가? 최가 극장 로비에서 마주쳤던 형석을 의식하며 묻는다. 기다 아니다, 대답하기도 뭐한 상황이어서, 민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최는 내켜하지 않는 민희 뒤를 따라 그녀의 방까지 들어선다. 그리고는 그녀가 문을 닫자마자 그녀를 안으려 한다. 순간 민희는 강한 거부감에 그를 밀쳐버린다. 침대에 나동그라진 그가 히죽 웃는다. 어차피 다 끝난 사이같던데,라며 다시 그녀에게 달려든다. 이런 상황을 예견못한 것도 아니지만 민희는 상대가 형석이 아니라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해서 그녀는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도망치기로 한다.

호텔에 숙박부를 작성하고 형석과 윤은 승강기로 향한다. 룸에 들어서자 형석은 언젠가 유원지 펜션에 함께 들어서던 민희가 떠올라 마음이 복잡하다.윤은 그런 그의 목에 자기 두팔을 감는다. 키스를 바라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형석은 눈한번 질끈 감으면 된다는 생각에 자기 얼굴을 그녀에게 가져간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자기안의 그 무엇이 자기를 제지한다. 그러면 안된다고. 주춤하는 그에게 윤이 달려들어 강제로 키스를 하지만 이내 그에게서 내쳐진다. 윤의 얼굴이 그순간 험상궂게 일그러진다. 나 여자 있어. 알잖아. 하자 그녀가 그럼 왜 여기까지 자길 데려왔냐며 그를 비난한다. 미안,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하곤 그는 서둘러 룸을 나간다. 한남동 윤의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둘은 아무말도 않는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또다시 서로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윤을 내려주고 부암동 자기 집으로 향하는데 차창위에 한두방울 비가 떨어진다. 민희와 헤어진다 해도 한동안 다른 여자를 만난다거나 그여자를 안는다거하 하는 일은 못할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형석은 빗길이라 더욱 심한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는 지난 5년 둘의 시간들을 반추한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그가 대출을 받기 위해 처음 찾았던 은행 대출 창구에서 처음 본 민희는 앳되고 풋풋했다. 그뒤 형석이 먼저 점심을 내겠다고 연락했고 전화너머로 망설이던 그녀가 자긴 파스타를 좋아한다고 했던것까지...그리고는 시내 싸구려 모텔에서 보낸 첫날까지...20대 후반을 온통 자기와 함께 보낸 민희에게 형석은 미안해진다. 우린 정말 끝난걸까,라며 부암동 언덕길을 애써 오르는데, 저만치 누군가 내려오는게 보인다. 앞치마를 두른 민희가 자기를 마중나온 것이다. 오는비에 다 젖으면서 우산도 없이.


그걸 본 순간 형석은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는다. 바보야 뭐할러 나와,하자 민희가 어떻게 집에 우산 하나도 없니,라며 타박을 한다. 품에 안긴 그녀가 이렇게 귀하고 애틋한적이 없다고 형석은 생각한다. 우리, 내일 하자, 그가 말한다. 뭘?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쳐다보자, 혼인신고,라고 그가 대답한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찬다. 빗방울은 금세 굵어지고 둘은 깜빡거리는 외등밑에서 끝나지 않을 입맞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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