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은 답답한 마음에 윤서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쯤 배가 꽤 불렀겠다 생각하면서. 윤서는 결혼 3년만에 어렵게 아이를가졌다. 그 일로 시댁과 불화도 적지 않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강촌? 좋지...”
“근데 너 임신해서..괜찮아?”
“그럼 내차로 갈까?”
그렇게 해서 둘은 예전 대학시절 자주 가던 강촌으로 떠난다. 대학 바로 옆이 기차역이라 둘은 시험이 끝나면 곧잘 경춘선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정작 종착지인 춘천을 가기보다는 중간의 청평이나 강촌에 내리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는 한겨울 강촌의 꽁꽁 얼어붙은 강가에 앉아 덜덜 떨며 사온 도시락을 먹다가 체하기까지 했다.
“너 운전 잘하네?” 윤서가 예진이 유턴하는걸 보며 말한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덧붙인다. 무슨 일 있는거야? 무슨일은...예진이 속내를 털어놓지 않자, 기집애. 나한테까지 비밀 있기야?하면서 윤서가 삐진다.
원우에게서 연락이 온건 졸업후 근 10년만이다. 그와는 대학 연극 동아리에서의 잠깐의 인연이 다였다. 원우는 연출을 맡고 있었고 제대한 복학생이었다. 처음엔 동아리의 프리한 분위기가 좋았지만 언제부턴가는 좀 질펀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예진은 동아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취직준비에 매달렸다.
학교에서 그런 예진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원우는 쥐어박으며 야, 어린놈이 돈독이 올라서,라며 핀잔을 주며 다시 연극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예진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원우가 10년만에어떻게 연락처를 알아냈는지 전화를 해왔고 그때 예진은 퇴근을 서두르던 참이었다.
“짜샤, 너 많이 늙었다”라며 원우는 과일 주스를 홀짝인다. 처음 그의 전화를 받았을땔 예진은 그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원우가 연극, 에드워드 알비, 어쩌구하면서 그시절을 되살려줬고 그제서야 예진은 아....하면서 그를 기억해냈다. 당장 만나자는 그가 달갑지 않고 왠지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미 예진의 회사 근처까지 와서 하는 전화라는 말에 더 이상 빼도박도 할수 없어 그와의 약속장소에 나갔다.
“그래, 돈은 많이 버냐?” 그가 히죽거린다. 이사람은 여전하구나,예진은 생각한다. 10년이란 세월은 그역시 빗겨가지 않아서 그는 몸이 좀 나있고 목소리도 걸걸해진 느낌이었다. 식사를 다 한뒤 대놓고 이를 쑤시는걸 보면서 예진은 적잖이 실망하지만 어차피 연애할 사이도 아니잖은가,한다.
“연락은 왜...”하자 “야, 선배가 후배한테 연락하면 안되냐?”그가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10년이면 예진이 충분히 결혼을 했을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런 예민한 부분들을 일부런지 무신경해선지 원우는 묻지도 감안하지도 않고 그렇게 예진의 삶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어느날밤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의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윤서는 누구지? 하고 받았고 그건 원우의 전화였다. 아는 후배가 이번에 연극을 하나 연출했다며 같이 보자고 했다. 예진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원우는 “짜샤”를 연발하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예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잡힌 약속이기에 일단은 나가기로하고 오랜만에 대학로를 찾는다. 버스킹을 좀 구경하다 약속시간에 맞춰 까페에 들어서자 원우는 이미 전작 뒤라 술이 불콰하게 올라있다. 그걸 본 예진은 화가 났지만 애써 누르면서, 미안하지만 연극은 못보겠다,며 일어났다. 그러자 ,너 왜 이렇게 까탈스러, 그가 말하며 그녀를 다시 앉힌다. 스스럼없는 그의 태도에 우리가 언제 연애라도 했던 사인가, 예진은 기분이 상한다. 무심결에 자신이 감정이라도 흘렸나 되짚어보지만 그런일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예진이 다시 자리를 뜨려하자, 그가 잡으며,나 오늘 지갑을 안갖고 나왔거든,한다. 결국그의 커피값을 예진이 계산하고 이 인간을 다신 안보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원우는 하루가 멀다하고 알맹이도 없는 문자를 계속 보내오고 예진이 답을 안하면 전화를 해왔다. 할수없이 예진은 원우의 번호를 차단한다.
“그런 일이 있었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윤서가 예진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차단을 해도 차단문자함에 문자가 남는다는걸 아는지 원우는 계속 문자를 보내다 얼마전부터 뚝 끊은것이다. 막상 그와 단절됐다 생각하니 예진은 헛헛했다.
예진과 윤서는 10년전처럼 강가에 차를 대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도 달라진거 같아,윤서가 아쉬운 듯 말한다. 우리 발좀 적실까? 윤서가 먼저 양말을 벗기 시작한다. 초가을이라 물이 찰거같아, 예진은 말리지만 윤서는 괜찮아, 하며 한발을 넣는다. 야, 차긴 차다! 하며 꽥 소리를 지른다. 예진도 발을 담그고 둘은 10년전을 추억하며 물장구를 친다. 그러고나서 둘은 근처 막국숫집에서 닭갈비와 치츠퐁듀 그리고 막국수를 시켜 먹는다. 음,맛나...윤서는 모처럼 가사에서 해방된만큼 그 하루를 한껏 만끽하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이번엔 내가 운전할게,라며 윤서가 운전석에 앉는다. 너 괜찮겠어? 예진이 윤서의 부른배를 보고 말한다. 금방인데 뭐..그리고 나, 운전하고싶어. 임신전엔 남편하고 싸우면 밤새 강릉까지 갔다오고 그랬어,라며 윤서가 털어놓으며 시동을 건다. 그렇게 둘은 구곡 폭포로 향한다. 그순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진은 차단문자를 클릭한다. 그러나 새로온 문자는 없다. 그는 단념한걸까.
오랜만에 구곡폭포 정상에서 냇물같은 폭포를 흉보며 둘은 또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문배마을을 둘러보고 둘은 다 저녁이 돼서야 서울로 올라온다. 이번엔 장거리라 예진이 핸들을 잡는다. 우리 자주 보자, 윤서의 집앞에 예진이 차를 대자 윤서가 예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해온다. 우리 또 가 애낳음.
평일날 월차를 썼다고 팀장은 잔뜩 못마땅해했고 예진이 올린 기획안을 두 번이나 퇴짜놓는 심술을 부렸다. 그렇게 세 번째 기획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누군가, 하던 예진은 그가 바로 원우임을 확인하고 당황한다. 그가 회사까지 찾아온 것이다. 원우는 예진과 눈이 마주치자 손짓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걸 본 동료 김.이 누구야?하고 입모양으로 물어오고 예진은 빨리 사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원우를 뒤따라 사무실을 나온다.
“무슨일이야 선배?”
“너 왜 내 전화 막어?”
“...요즘 잠잠해서 포기했나 싶었는데..”
“기다렸냐?” 그가 쿡 웃는다.
그럴수도 있다고 예진은 생각한다.
그날저녁 그렇게 둘은 다시 차를 나눠마신다. 원우는 선박회사에 다니다가 얼마전 부도가 나서 지금은 백수라고 한다. 그에 대해 세세히 알아할 필요가 없는지라 예진은 그런가보다, 이 커피값도 내가 내야겠구나, 생각만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날 커피값은 원우가 계산하려한다. 선배 백수라며, 예진쪽에서 오히려 말린다.
그날, 예진은 큰 거부감없이 대학로에서 아직도 하고 있는 원우의 후배가 연출했다는 그 연극을 함께 본다. 그러다 힐끔 옆을 보자 자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원우와 눈이 마주친다. 원우는 손잡아도 돼? 라며 그녀의 심중을 떠본다. 그리고는 그녀가 대답도 하기전에 손을 잡는다. 그녀는 이 애매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손에 잡힌 자기 손을 빼지 못한다. 그렇게 둘은 손을 잡은채 연극을 다 봤고 그날밤 원우는 예진을 오피스텔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내 번호 풀어,라며 그녀를 닦달한다. 그렇게 그의 번호는 예진의 차단에서 해방된다. 그리고는 사흘후 그가 오피스텔로 찾아와 둘은 함께 밤을 보낸다.
그러나 그 이후 예진이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도 그에게선 답이 없다. 취직이라도 한걸까,싶어 물어보지만 그는 문자 확인만 할뿐 답을 안한다. 예진은 괜히 그와 잤다는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렵게 그와 약속을 잡는다.
“선배 왜 답 안해?”하자 “우리 안맞는거 같아”라며 그가 예진의 눈을 피하며 답한다. 그런게 어딨어,라고 소리치고 싶은걸 예진은 간신히 참는다.
“뭐가 안맞어?”라고 그녀가 묻자, “그냥 이것저것”이라고 답하고 그가 고개를 돌려 바깥을 보는척한다. 그리고는 오늘 커피값은 니가 좀 내라,하고 먼저 까페를 나간다.
집에 온 예진은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윤서에게 원우의 이야기를 하자, 윤서는 당장 끊으라고 한다. 질이 안좋은거 같다며. 하지만 예진은 이미 그와 밤까지 보냈다는 생각에, 자기몸을 어루만지던 그의 부드럽던 손길에 그를 차단하지 못하고 기약없는 기다림을 이어간다. 어느날 새벽, 예진은 문자알림을 듣고 눈을 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자를 보면 원우다. 너를 봐야겠어,라고 그가 말하고 있다.
그 순간 예진은 자기가 얼마나 그의 연락을 기다려왔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는 다음날 퇴근하자마자 예진은 그와의 약속장소로 달려간다. 더 이상 자기의 속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원우는 먼저 나와있다. 예진이 자리에 앉자, 어떻게 지냈어?라며 안부를 물어온다. 그의 얼굴이 전보다 핼쓱하다고 예진은 생각한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는다. 얼마나 보고팠던 얼굴인가 , 예진은 그의 눈코입을 하나씩 자기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는 둘은 예진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나 취직하면 우리 결혼하자,그가 말하며 그녀를 안는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 예진이 그를 배웅하고 들어서는데 방금 보낸 원우로부터 링크 하나를 받게 된다. 요즘 반복해서 듣는 노래야,라는 코멘트가 달려있다.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예진은 링크를 클릭한다. 그러자 비트있는 발라드곡이 나온다...어느 드라마 ost로 쓰여 익히 알려진 곡이었지만 제목까진 모르는 노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당시 인기스타가 조금은 서툴게 부른, 그래서 더더욱 따스하게 와닿는 노래였다...모닝커피를 내리던 예진은 “널 내품에 안고 말할거야”라는 대목에서 감정이 복받친다. 이 부분을 들으라는 거였어...라며 방금 떠난 원우가 벌써 그립다.
“청혼하면 받을거야”예진이 말하자 전화너머로 윤서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그 사람 뭘 믿고, 하면서도, 그래, 니 선택 존중할게 ,라며 통화를 마무리한다.
예진은 원우가 보낸 그 노래를 수십, 수백번을 반복해 들으며 그가 하루빨리 취직하기만을 기다린다. 그 이후 원우는 하루 한두번씩 규칙적으로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왔고 연애란 다름 아닌 규칙성에서 출발한다는 생각까지 예진은 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가 드디어 또다른 선박회사에 경력직으로 취직됐다는 문자를 받는다. 그러나 그 말뿐 ,그녀를 만나자는 내용은 없다. 점점 문자 간격이 늘어나자 예진은 불안해진다. 이따금 오는 문자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되다는 내용,회식에서 과음을 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만 쓰여있다.
불안해진 예진은 일단 그를 만나기로 한다. 그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가며 몇 번이나 만남을 회피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그를 보고싶다. 어렵게 약속을 정해 만난 그가 말한다.
널 보면 좀 어색해,라고 . 이게 무슨 이야긴가 싶다 예진은. 두 번이나 함께 잠을 잔 남자 입에서 나올 소린가싶어, 선배 장난해?하고 쏘아붙인다. 그러자, 그가 시간을 달라고 한다. 시간가면 어색한게 없어져요? 예진이 발끈해하자, 이런거...바로 이런게 싫다는, 아니 , 안맞는거야. 넌 진득한게 없어. 남자가 기다리라면 다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하고 수더분하게,까지 그가 말했을때, 예진은, 나쁜자식, 하고 자리를 박차고 까페를 나온다. 그런 예진을 그는 잡지도 않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예진은 한참을 침대에 쓰러져있다. 차단을 푸는게 아니었다고 그녀는 후회한다. 그순간의 본능적 거부감을 믿어야 했다고 . 사정없이 유린당한 자신의 삶을 복원시킬 자신이 없다...그러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청소기를 돌린다. 구석구석 그의 흔적이라도 없애려는것처럼...그러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래 후렴구가 들려온다. 그렇게 생각한다. 너를 내품에 안고...그러나 전화는 배터리가 다 돼 꺼져있고 TV도 틀어놓지 않았다. 어디서 들리는 걸까...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지만 원우는 그 자리에 없다. 미쳤구나 내가...
갓태어난 윤서의 딸은 4킬로의 우량아였다. 아이는 신생아처럼 보이지 않을만큼 머리숱이 많았고 이목구비는 윤서 부부를 공평하게 닮아 나왔다 . 우리 언제 강촌갈까? 윤서가 유리벽 너머로 아이를 주시하면서 옆의 예진에게 묻는다. 너 회복돼야지,하자, 너는 이제 괜찮구? 하며 윤서가 지난번처럼 예진의 손을 꼭 잡아온다. 고맙다 친구...
얼마전 뽑은 경차를 몰아 회사로 돌아가면서 예진은 생각한다. 그래, 강촌에 가면...그곳에 가면 그가 잊힐지도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