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번째 이별>

다친만큼 자유로워진거라고.

by 박순영

그날은 g대 동문회가 열리는 날이고 유경은 단 한사람 동찬을 보기 위해 가려고 한다. 그렇게 서둘러 홍보자료작성을 마치고 유경은 일단 집에 들러 옷을 바꿔입고 화장을 다시한다. 오늘 동찬이 올까,그녀는 그것만 궁금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그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유경은 자꾸만 시간을 확인한다. 동문회는 6시30분에 열리기로 돼있고 차는 이제 겨우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다. 아저씨 좀 빨리요, 했더니 기사가 짜증스레 그녀를 돌아본다. 동찬이 와야 하는데...하면서 그녀는 화장을 다듬는다.그러자 기사가 , 안에서 화장하면 안되는거 몰라요? 라며 타박을 한다.

그렇게 30여분을 더 달려 t 호텔 앞에 택시는 서고 유경은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로비에서 그녀는 아는 얼굴 몇과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게 들린다. 정유경! 그 소리에 돌아보면, 지운이다. 어? 너 못온다더니?라며 유경이 의아해한다. 왜, 나 기다렸냐? 지운이 씩웃으며 다가온다.지운과는 대학 1학년 교내 소개팅에서 만나 계속 가깝게 지냈지만 친구이상이 된 적은 한번도 없다.


오늘 동찬 선배 올까? 유경이 지운에게 묻자, 너 흑심 있어 왔구나 지운이 말한다. 유경이 동찬을 좋아한다는 걸 지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고 유경도 다른 사람들과 연애라는걸 했지만 번번이 깨진 원인중 하나가 그녀 마음 깊이 뿌리내린 동찬 때문이라는걸.

동찬과 유경은 교양과목을 같이 들은 인연이 있다. 동찬은 거의 한학기 내내 유경의 뒷자리에 앉아 자주 그녀의 필기노트를 빌리곤 했다. 처음에는 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다 그러지 않는 날은 유경은 은근히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 유경이 용기를 내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러자 동찬은 당황해하면서도 그동안 자기가 노트를 빌렸으니 이번참에 식사대접을 하겠노라 했다. 그렇게 둘은 학교앞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든가....유경은 그와 함께 먹은게 고기였는지 뭐였는지 가물거리지만, 그의 친절하고 댄디한 말투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동찬이 먼저, 우리 태능쪽으로 바쪄볼까? 라며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안그래도 밥을 먹은 다음엔 헤어져야 한다는게 못내 서운했던 유경은 그러자며 동의했고 그렇게 둘은 태능행 버스에 올랐다. 가는 동안 동찬은 자기 이야기를 해줬다. 자기는 제주도 태생이며 타대학 학부 출신인데 이번에 g 대학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고. 알고보니 동찬은 유경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다. 여태 학부생인줄 알고 있던 유경은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대수랴 싶어, 자기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자기는 외동이고 방송사 취업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그러자, 잘 될거야,라며 그가 유경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태능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동찬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렇게 돌아서 가는 동찬의 뒷모습을 보며 유경은 자신의 삶이 오늘을 기점으로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음 강의시간을 기다리지만 여느때와는 달리 그는 자기 뒤에 앉지 않고 저만치 가서 자리를 잡는다.순간 유경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걸 느끼고 수업이 끝난뒤 그에게 가서 제가 커피 살게요 하자, 그가 머뭇거린다. 대학원 발제문이 밀려있다며 그녀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다. 그걸 본 지운이, 너 차였구나,하면서 배시시 웃었든가.

이후로도 동찬은 더 이상 유경의 뒷자리에 앉지 않고 어쩌다 복도를 지나다 마주쳐도 그녀를 아는체 하지 않았다.

너 진짜 좋아하는구나,지운이 아는척을 하면 ,그런거 아냐,라며 타박을 주면서도 유경은 동찬의 달라진 행동에 적잖이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는 시험기간, 유경은 보게 된다. 동찬이 어느 여자와 나란히 자리잡고 공부하는 걸.

여자가 있었구나...하면서 유경의 직진심리는 한풀 꺾인다. 하지만 분명 태능에서 자기들이 한건 데이트였다고 그녀는고집한다. 걸으며 서로의 손이 스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동찬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졸업반이 돼서 유경은 방송사 시험을 치르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차선으로 들어간게 영상물 수입 업체였다. 해외 드라마는 물론 예능, 다큐등을 수입하는 회사였고 유경은 언젠가 방송사 pd가 되겠노라 다짐하며 꿋꿋이 일했다. 다국어를 요하는 직업의 특성상 영어 외에 일어 중국어까지 배우느라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쁜나날이었다.

그러다 동문회알림 문자를받고 문득 동찬이 떠올랐다. 흐른세월이 있건만 그의 모습은 생생하게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다. 동문회 내내 그를 기다린 유경이 지쳐 포기할때쯤 동찬이 허겁지겁 입구에 들어서는게 보였다. 그는 아는 얼굴들과 악수를 나누다 유경과 눈이 마주친다. 순간 유경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그녀는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동찬은 그녀에게 엷은 미소만 지어보이고 그녀를 지나쳐 멀찍이 자릴 잡고 앉는다. 또 날 외면하는구나...유경은 더이상 그의 냉대를 견디지못하고 동문회장을 빠져나온다.


그런 동찬이 그 다음주 유경에게 연락을 해온다. 동문회에선 내내 자신을 무시한 그가 왜...하는 생각에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그가 한번 보자고 한다. 그렇게 둘은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만에 다시 만나 차를 나눠마신다.

“결혼은?” 유경이 조심스레 묻자, 그가 아직, 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때 도서관에서 같이 있던 그녀와는 틀어졌나보다,유경은 그리 생각하며 그럼 만나는 여자라도 있냐고 묻고 싶지만, 이미 다 지난일이라 생각돼 그만둔다. 그러자, 유경인 결혼했나? 동찬이 물어온다. 아뇨,라고 대답하려다 문득 며칠전 같이 술을 마신 지운이떠올라 ,친구는 있어요. 그냥 남사친이 하나 있다고 대답한다.

가끔 생각이 나드라구 ,하며 그가 웃는다. 도대체 이남자 속을 알수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태능에서의 일을 언급하고 싶어진다. 다음을 기약한건 아니었지만 둘이 한건 분명 데이트 아니었냐고 따지고싶다.하지만 이미 몇 년전 일인가, 유경은 구차하다는 생각에 그냥 덮기로 한다.

다음에 또 보자,는 예의 그렇고 그런 인사를 나누며 유경은 귀가하는 전철에 오른다. 러시아워를 살짝 지나 전철은 그닥 붐비지 않았고 그래서 자리도 드문드문 나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유경은 동찬을 생각한다. 가끔 생각난다구? 그는 정말 내게 책임질만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걸까...그러다 그녀는 피곤해서 잠에 빠진다.그리고는 얼핏 태능꿈을꾼거 같다. 그덕에 내릴 정거장을 놓쳐 한정거장을 되돌아가야했다.

다시 동찬으로부터 연락이 온건 수입한 영화들을 모니터하고 있을때였다. 지난번 동찬에게 회사를 알려준 탓인가, 그는 유경의 회사 근처라고 한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 유경은,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가,라고 생각하며 그와의 약속장소로 향한다.

그는 먼저 와있다 저만치서 손을 들어보인다. 언제나 해맑은 모습...교육대학원을 나와 한동안 교편을 잡았지만 적성에 맞지않아 지금은 친구와 it 회사를 차렸다고 지난번 그가 말했다.

사업은 잘돼요?라고 그녀가 스테이크를 썰며 묻자, 그냥 그래....지금 그 회사, 맘에 들어?하고 그가 되묻는다. 그냥 나름, 이라고 유경이 대답하자, 아니, 만약 그만두면 우리 회사는 어떨까 싶어서,라고 그가 채용할 마음이 있음을 내비친다. 그리고는 얼마전 본가가 있는 제주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다. 제주도는 지금 유채꽃이 한창이라는 말에 유경은 그와 나란히 유채밭을 걷는 자신을 상상한다. 조금 늦게 이루어지는 사랑도 있는거라생각하자 실종되었던 연애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걸 느낀다.

언제 시간되면 제주도 같이 갈까? 그가 말한다. 더 이상의 그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싶어 유경은 순간 자기 스케줄을 확인한다. 마침 다음주말이 비어서 그때가 어떻겠냐고 하자, 괜찮다며 그가 환하게 웃는다.

그 이야기를 며칠후 만난 지운에게 털어놓자, 야, 대박. 몇 년만에 이루는 사랑이냐,라며 덩달아 좋아하면서도, 근데 잘 보고 사귀어,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유경에게 동찬은 더 이상 보고말고 할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이미 대학시절의 그를 알고 있고 지금은 it회사를 하는 건실한 사람, 살짝 연애사가 있었지만 잘 안된 그런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는 제주행에 들떠 있는 그녀에게 어느밤,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갑자기 일이 생겨 여행을 미뤄야겠다고. 그말에 유경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다. 그러면서 그가 말한다. 언젠가 꼭 같이 가자고. 그렇게 제주행은 일단 캔슬되고 유경은 대신 밤새 제주맛집이며 둘러보기좋은 곳들을 검색해 자신의 sns에 올린다. 그걸 봤는지 곧바로 지운으로부터 문자가 온다. 왜, 까였냐?

이후로 동찬으로부터는 연락이 끊기고 유경은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상황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런 유경에게 동창 미경이 레지던트 의대생을 소개한다. 그만하면 조건도 나쁘지 않고 인물도, 매너도 좋았다. 댄디하고 세련된 그런 사람이었지만 유경의 머릿속은 온통 동찬으로 가득차 있어 그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 그후로 한번 더 만난뒤 그만 보자는 이야기를 한다. 상대는 적잖이 실망하면서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고 가끔 메시지 보내도 되죠?라며 결별을 받아 들인다. 이후로 물론 그에게선 그 어떤 메시지나 문자도 오지 않았다.


유경은 용기내서 동찬에게 연락을 한다. 그러자 동찬은 오랜만이네?라며 그녀를 반긴다. 밥 사줄까? 하며 예의 다정함을 보이며 약속을 잡는다.

오늘은 물어보리라... 우리가 어떤 사인가를, 다짐하며 유경은 호텔 라운지로 향한다. 동찬과 마주앉아 바라보는 서울 야경은 그야말로 불야성 그자체였다. 저만치 보이는 남산타워에 언젠가 동찬과 올라가리라, 그녀는 다짐한다. 서울사람치고 남산 가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걸 상기하면서....

“안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라며 동찬이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그래, 이사람도 내가 보고 싶었던거야,유경은 그동안 속앓이를 한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좀 진득하게 기다렸더라면 다 풀릴 일이었는데...

“우리 제주도 가요”그녀가 말한다. 그러기로 하지 않았냐며. 그러자 “그럴까? 가서 인사시킬 사람도 있고”라며 그가 답한다. 그의 부모를 이야기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게 둘은 럭셔리한 저녁을 마치고 고속으로 내려오는 승강기에서 살짝 손이 스치기도 한다.

연락할게,라며 그가 손을 흔들고 자기 차에 오른다. 아직 차를 사지 않은 유경은 뚜벅뚜벅 버스정류장까지 그냥 걷기로 한다. 밤바람이 감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는 동찬에게서 이틀후 다시 연락이 온다. 소개시킬 사람이 서울에 올라왔다며 볼텐가?하고. 부모님이 올라왔다고 생각한 유경은 옷이며 화장에 잔뜩 신경을 쓰고 강남 약속장소로 향한다. 그리고는 동찬옆에 다정히 앉아있는 '그녀'를 보게 된다.

내 약혼자,동찬이 그녀를 소개한다. 황미나예요,라며 그녀가 해맑게 웃는다. 유경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안간다. 그럼 여자가 있으면서 자신에게 연락을 한건가, 이남자 나쁜남잔가보다...하는데, 동찬이 유경을 미나에게 소개한다. 오랜 친구,라고...학교때 필기노트를 자주 빌려준 친구라고.

그날 셋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기억도 못한채 유경은 먼저 자리를 떠 택시에 오른다. 집에 오는내내 ,그는 과연 무죄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가 자신을 농락한 부분은 없는가, 하면서.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보면 지운이다. 야, 너 어떻게 돼가?라고 물어온다. 잘됐다 싶어 중간에 택시를 돌려 신림동 지운에게로 향한다.

지운의 집 근처 까페에서 그를 만나 유경은 조금전 상황을 다 털어놓자, 그사람이 잘한것도 없지만 딱히 잘못한것도 없는데?라고 말한다. 그럼 나한테 제주도 가자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하자 그 부분은 좀 애매해...근데 유경아, 사랑은 숨길수 없다고 하잖아.

이어질 말이 유경이 궁금해진다. 잠시 뜸을 들였다 지운이 이야기한다. 사랑하지 않는것도 숨길수 없다고. 그말에 유경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많이 좋아했구나 너,라며 지운이 테이블 위의 냅킨을 집어서 준다. 이상황에 이런말 그렇지만, 난 안되겠니?그가 조심스레 물어온다.그말에 그녀는 울다가 웃는다.

빈택시들을 여러대 그냥 보내고 그녀는 지하철역까지 걷기로 한다. 봄밤은 마술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이제 사랑이 , 어쩌면 혼자만의 사랑이 끝났으니, 다친만큼 자유로워진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한사람이 기다리고 있음도 그녀는 기억하기로 한다. 지운.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그렇게 한참을 걷다 그녀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