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원은 저런 아파트 단지가 우리동네에 있었나 의아해하며 쳐다본다. 바로 개천 뒤에 저런 두동짜리 아파트가 있었다는게 신기했다. 아파트 브랜드는 굵은 눈발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언제 생겼지?
희원은 용기를 내서 눈때문에 미끌미끌한 개천 징검다리를 건넌다. 그러다 한두번 미끌거려 휘청이기도 했지만 설마 빠져 죽으랴 싶어 온몸에 힘을 실어 개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자잘한 계단을 타고 그 아파트로 향한다.
단지 입구는 별다른 펜스나 벽도 없이 개방돼있다. 그만큼 보안에 허술하기도, 그리 신경 써 지킬게 없는 사람들의 아지트처럼 여겨졌다.
이곳에 이사온 지도 여러해가 흘렀지만 이쪽은 1년에 한두번 올까말까 하고 희원이 주로 이용하는 산책로는 자신의 아파트 단지 바로 뒤에 인접한 야산이었다. 그리고는 개천길...
그러다 보니 갑자기 '두둥'하고 서있는 이 단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희원은 자기 멋대로, 무명브랜드에서 지은 신축 아파트라고 단정짓는다. 그리고는 입구에 외부인을 차단하는 경비실이 있는가를 본다. 그러나 그런 기미나 가건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도애체 이곳은 뭘까...
그러는데 한 동에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오는 젊은 여자가 눈에 띈다. 희원은 용기내서 그녀에게 다가간다.
"이 아파트, 언제 지어졌나요?"
그말에 여자는 잠시 경계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아마 4,5년 됐을거예요..저도 잘 몰라요 세든 지 얼마 안돼서"
"네..."
여자는 그렇게 눈발을 가르며 아이와 함께 단지밖으로 사라져간다...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을 안겨주는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여자가 나온 바로 그 동에서 한남자가 우산을 펴들며 나오는게 보인다.
희원은 그래도 사람이 살긴 사는 단지구나, 하면서 돌아서는데
"강희원?"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희원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그다, 목소리만으로도 확연히 알수 있는 그였다...
희원이 계속 등을 보이고 있자 저벅저벅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맞지 희원이?
그말에 희원은 돌아선다.
"선배..."
"그래...야, 여기서 너를 보니. 대박이다. 너 여기 살아?"
"아니..그냥 지나가다..."
"너 결혼은 했구?"
"...갔다왔어."
"아...아이는?"
경환과의 1년도 채 안되는 그 결혼생활 동안 희원은 두번의 유산을 겪어야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그 여자를 잊을수가 없어"라던 경환의 결별 통보를 그녀는 오랫동안 곱씹어야 했다.
경환의 '그녀'는 희원이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스쳐가는 중에 한번쯤 봤을지도 모르는 얼굴이다. 경환의 마음을 오랜시간 지배하다 경환을 버리고 간...해서 경환은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서둘러 희원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는 원치 않았고 희원은 경환과의 결혼을 좀더 굳건히 하려면 아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몰래 피임약을 끊었다. 그렇게 두번의 임신. 그러나 두번 다 자연유산이라는 결과를 맞았다. 그제서야 이남자와는 아니구나,라며 받아들이고 이혼도장을 찍어주었다.
동민은 어디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넌즈시 운을 뗀다. 하지만 희원은 그럴 마음이 없다. 어쩐지 오늘 일어난 이 모든일, 즉 통 보지 못하고 인지도 못하던 아파트 단지를 발견한 것이나, 그 안에서 유모차를 끌고나온 기사감의 여자, 그리고 대학원선배며 희원을 가슴앓이시켰던 동민과의 해후...꿈이려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담에..담에 한번 먹자. 잘 지내구"라며 동민은 아무렇지 않게 희원의 어깨를 톡톡 치고 눈길을 걸어 단지밖으로 나간다.
그가 사라진 그 아파트 단지에 휑하니 찬바람이 몰아친다. 그와 동시에 희원의 머리위로 무언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손을 올려 머리를 만져보자 바로 위 나뭇가지에서 눈뭉치가 떨어져있다. 그 눈을 툭툭 털며 희원은 마지막인듯 단지를 일별한다. 여전히 브랜드 이름은 구름같은 눈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돌아서 나온다.
왠지 동민과 기시감의 그녀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세대도 얼마 되지 않고 고작해야 10층정도의 높지 않은 층고였다. 조금은 허무맹랑한 발상이라며 그녀가 단지를 걸어나올 즈음, 어디선가 끽, 하고 차가 겁정거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 기시감의 그 여자가 저만치 쓰러져있다. 그녀를 친건 지프형의 고급suv였다.
여자가 치었어...아이는....
하며 희원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사고 지점에 이르자, 쓰러진 기시감의 그 여자의 머리에서 피가 뿜어져나오는게 보인다. 다행히 아이는 반쯤 뒤집어진 유모차 안에서 무사한지 빽빽 울어댔다.
희원은 쓰러진 여자를 뒤흔든다. 여자는, 아이....우리 아기....하다 실신을 한다. 희원은 다급히 휴대전화기를꺼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른다.
그때 "여보"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도 귀에 익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희원이 돌아보자 동민이 어두운 얼굴로 쓰러진 그녀를 끌어 안는다. 그리고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이 모든게 다...하는데 동민이 스러진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지원아"
그말에 희원은 경환을 흔들어놓고 가버린 그녀의 이름이 '지원'이었음을 떠올린다. 하기사 흔한 이름이니 꼭 경환의 '그녀'라는 법은 없지만 왠지 그녀일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민...자신을 뒤흔들고는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린 남자....단 하룻밤이었지만 동민은 분명 자신의 자취방에서 희원을 안았다.그리고는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쳤을때 희원이 그 얘기를 하려하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에게 천진한 미소를 보이고는 지나쳐갔다. 이후 졸업할때까지 그는 희원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그것은 희원에게 모진 트라우마가 돼서 경환과의 짧은 연애끝에 서둘러 결혼에 이르게 한 계기가 되었다.
희원은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러다 저만치로 시선을 멀리 던져 그 아파트 단지를 찾는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아파트가 있어야 할 자리는 눈발이 휘몰아치는 공터일 뿐이다.
내가 본게 무얼까? 헛것을 본걸까...
그러고 있는데 짧게 두번 차 경적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희원은 힐끔 옆을 본다.
지프형의 고급차를 타고 있는 운전석의 남자가 길을 비키라고 손짓을 한다. 그제야 희원은 자신이 길 한복판, 차도를 막고 서있다는걸 깨닫게 된다. 동민선배...하며 동민을 찾아보지만 그와 지원이라는 그의 아내, 그리고 유모차를 탄 아이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희원은 아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