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은 바이어와의 미팅을 마치고 곧바로 예은과의 약속장소인 회사 근처 까페로 향한다. 민혁이 들어서자 예은은 늘 앉는 구석자리에서 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미안. 미팅이 좀 길어졌어"하며 민혁은 예은의 망고쥬스를 한모금 마신다.
"뭐야. 따로 시켜" 하며 예은이 싫어하는 내색을 한다.
"화났어? 미안" 하고 민혁은 넥타이를 헐겁게 하는데,
"할 얘기가 있어"라며 예은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뭐 이렇게 심각해? 나 뭐좀 시키고.."하고 그가 까페 주인을 부르려 하는데 예은이 "저기.."하며 그의 행동을 제지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뚫어지게 본다.
"...잘했지 드레스 가봉은?"
"민혁씨, 우리 헤어져"
그말에 민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결혼을 코앞에 둔 예비 신부가 지금 헤어지자는 통보를 하고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왜? 하고 음이 소거된 채로 민혁은 묻는다. 왜라니...미쳤니,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민혁은 고교 동창 수철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측 하객으로 온 예은을 만났고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민혁은 용기를 내서 예은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는 보름후 처음 만난 그날밤 민혁은 예은을 품에 안았다. 예은은 그때도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만 민혁은 과거따위는 묻어두자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후 둘은 본격적인 연애를 했고 상견례를 마치고 그 어떤 반대도 받지 않고 무난히 결혼문턱까지 왔다.
"다시 말해봐. 헤어지자구? 농담이지? 너 화난거지? 요즘 내가 못챙겨줘서..미안, 바빠서 그랬다니까"
"그사람이 돌아왔어..."
그사람....예은의 그사람이란 독립영화를 주로 만든다는 k를 말함일 것이다. 민혁이 과거따위는 묻어두자고 해도 어느날 예은은 기습적으로 k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예은은 아동교재를 주로 만드는 출판사에 근무하지만 그 전에 잠깐 라디오 작가를 한 적이 있고 그때 게스트로 출연한 k와 사귄 적이 있다고 했다. 둘은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k의 상업영화로의 진출이 계속 딜레이되면서 그는 꺼떡하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고 성격파탄자처럼 변덕을 부리더니 어느날 헤어지자는 통보를 해왔다고 한다. 그런일이 처음이 아니어서 예은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안돼서 헤어졌노라고 민혁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를 잊을 수가 없다고.....이 상태로 당신한테 가도 돼?라며 예은은 눈믈을 그렁이며 묻기까지 하였다.
이후로 민혁은 이따금 k이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하는 습관이 생겼고 그가 동유럽 영화제에서 '젊은작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역시 독립영화로 받긴 하였지만 그래도 해외에서 상까지 탔으니 무명에서는 벗어난 셈이고 그걸 빌미로 다시 예은에게 연락해올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예은은 이후로도 아무말이 없었고 언제나처럼 당연하단듯이 민혁의 품에 안겼다. 그러던 그녀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드니? 우리 결혼 코앞인데."
라며 민혁이 테이블의 냅킨을 집어 이마의 땀을 닦아낸다.
"이 상태로는 당신한테 갈수가 없어. 가더라도 내 마음이 확실해 진 다음..."
"장난해!"
그 소리에 다른 손님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예은은 입을 앙 다물고 그 어떤 얘기도 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나중에...나중에 얘기해"하고 민혁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는 서둘러 까페를 나선다.
k가 앞에 있다면 이미 민혁의 주먹이 날아가도 열댓번은 날아갔으리라...민혁은 마치 낮술이라도 한 사람처럼 회사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간다.
그가 자리에 앉는데 마침 메일 알람이 온다. 이탈리아 거래처에서 온 업무메일이다. 민혁은 기계적으로 이메일을 열어본다. 담당자 소피아의 영어메일이다. 하지만 읽히질 않는다. 그녀는 뭐라고 빼곡히 적어보냈지만 그날따라 그녀의 영어문장이 낯설기만 하다. 앞뒤 문맥이 맞질 않고 무슨 얘긴지 이해가 안된다. 아무래도 조금전 예은으로부터 받은 결별 통보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는 잠시 컴퓨터에서 떨어져 앉는다. 그리고는 빙그르 의자를 돌려앉는다. 그러자 서울 대낮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던 그는 소피아의 이메일을 인쇄해서 한손에 들고 커피를 뽑아 옥상으로 향한다.
일이 안풀리거나 구조조정 바람이 불 때면 동료돌과 자주 올라와서 이야기를 나누며 머리를 식히는 그만의, 아니, 어쩌면 거의 모든 샐러리맨들의 아지트인 옥상에 이르자 그는 여지껏 급체라도 한 양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훈풍이 불어온다. 그의 느슨해진 넥타이가 그 바람에 살랑인다. 예은이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준 넥타이다. 그는 그 넥타이를 한참을 어루만진다....
그리고는 저만치 난간에 기대어 소피아의 이메일을 읽는다. 다시 읽어보니 소피아 역시 무언가 다급한 일에 쫓기며 작성한 메일같다. 간간이 틀린 철자며 모호한 문장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전체적 맥락은 감지된다. 민혁은 커피를 홀짝이며 그 메일에 대한 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전에도 예은은 헤어지자고 했다. 하지만 하루가 채 되지 않아 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 오늘 저녁엔 그녀가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한다. 그러면서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펜스에서 몸을 뗀다. 그 순간 그가 들고있던 소피아의 인쇄된 메일이 바람에 날아간다. 그가 공중에 떠버린 종이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그의 몸이 펜스를 넘고 만다.
하늘에서 종이 한장이 나풀나풀 원을 그리며 내려오고 그보다 앞서 한남자가 건물에서 추락한다. 남자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맨바다에 떨어진다. 남자의 온몸에서 다량의 피가 뿜어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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