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혁은 윤서에게 이혼서류를 내민다. 보통 연속극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나올거라고 그녀는 예상하지만 주혁은 아무말이 없다.
"꼭 이래야 돼? 우리가 애낳고 산게 몇년인데"
그러자 주혁은 "니가 더 망가지기 전에 놔주고 싶어"라며 갈급한 표정을 짓는다.
주혁에게 여자가 생긴걸 안 지는 석달 조금 넘었다. 둘이 가까워진건 사내 야유회가 계기가 된듯하다. 말로는 같은 대학 후배라는데 , 같은 부서에 근무하면서 선후배로 서로 챙겨주다 생겨난 감정이리라....
"내가 영은씨 한번 만나볼까?"
이번에는 윤서가 애원하는 얼굴로 주혁에게 묻는다.
"꼭 영은이때문은 아냐. 그냥...당신하고는 이제 더는 안될거 같아. 아무 감정이...그 어떤 것도.."
윤서는 더이상 매달려봤자 소용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러자 2년의 연애기간 끝에 혼전임신을 해서 뒤늦게 서둘러 한 결혼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즈음, 주혁은 이미 서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는데 ..임신만 아니었으면 윤서도 다른 남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원망이 스멀스멀 안에서 기어 올라온다.
"하루만 줘. 내일 결정할게"
윤서가 더이상 매달리지 않자 주혁도 긴장을 풀며 그녀의 청을 들어주는 눈치다.
"그럼 내일 이 시간 여기서..."라며 주혁은 먼저 자리를 뜬다. 그리고는 출입문쪽으로 향하다 돌아서서, "운전조심해. 길 미끄러워"라며 걱정을 한다.
서영은이라는 그 후배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주혁과 윤서는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둔 다복한 부부로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출몰하면서 모든게 뒤틀렸다. 주혁은 정신없이 그녀에게 빠져드는 눈치였고 자다가도 그녀의 전화가 걸려오면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고 , 말리는 윤서를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그래, 이제 그런꼴 그만 보게 된거야'라며 윤서도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 전화컬러링이 울려댄다. 누구지?
해주 역시 결혼 1년만에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현재는 학습지 교사를 하면서 어린 딸과 근근이 살고 있다. 윤서는 그런 해주를 본 지도 한참됐다는 생각이 든다.
해주는 그날마침 저녁 수업까지 짬이 나서 연락을 했단다. 윤서는 머뭇거리다 해주라면 어디가서 떠벌리지도 않을것 같고 설령 그런다 한들 뭐 어떠랴는 심정이 돼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면 갈라서. 깨끗하게"라며 해주는 단호한 반응을 보인다.
"혼자 산다고 다 미저러블하진 않아. 좀 싱글로 지내다 다른남자 만나도 되는거고"라고 하며 해주는 윤서의 결단을 내심 기다리는 눈치다.
그래, 헤어지자...
다른것도 아니고 다른 여자가 좋다는데...더이상 내게 어떤 감정도 없다는데 헤어지자...하고 윤서는 주혁과 이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순간, 해주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따로 컬러링을 쓰지 않아 , 날것 그대로의 벨소리가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다. 해주는 민망한지 상체를 반쯤 돌려 전화를 받는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네 어머니....아...학원으로 돌리신다구요...그런데요 어머니...잠시만요"하고는 윤서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길을 보내고 해주는 아예 까페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
보아아니 학습지과외를 끊겠다는 학부모의 전환거 같고 해주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애원을 하는거 같다...유리벽 너머로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대자 해주의 가녀린 스카프가 바람에 휘날린다...생존을 위한 몸부림...그러자 대학시절 여신처럼 빛나던 해주가 떠오른다. 매사에 당당하고 나이브했던 그녀 해주.
윤서는, 주혁과 헤어지면 당장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예고편처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해주가 돌아오기도 전에 마음을 굳히고 까페를 나간다.
주혁이 이번 자기 생일날 사준 외제차를 몰면서 해주를 지나칠 즈음에야 해주는 윤서를 알아보고 , 어? 하는표정이 된다.
"나 윤주혁씨 안사람입니다"
그길로 주혁의 회사로 찾아가 '주혁의 그녀'' 서영을 만난 윤서는 여유있는 자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영은이라는 여자는 금세 풀이 죽어 어쩔줄을 몰라한다.
"아직 남편한테도 얘기 안했는데 나, 셋째 가졌어요"
그말에 영은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한다...
"당신 그거 진짜야? 임신? 요즘 같이 잔적도 없는데?"
영은에게 그 얘길 전해들은 주혁은 , 별거를 위해 구입한 오피스텔 대신 집으로 달려와서 다그치듯 윤서를 몰아세운다.
"생리가 없어...."
"그렇다고 다 임신이야? 당신 원래 불규칙하잖아"
"여보...나, 당신 애를 둘이아 낳고 셋째도 낳을 여자야"라며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내일 우리 이혼하기로..아니, 아까까지 그런 얘긴 없었잖아..."
"나도 몰랐어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야.."
그런 윤서를 한참을 쏘아보던 주혁은 방금 벗어던진 윗옷을 다시 집어들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돌아올거야..
자기 애가 들어섰다는데...하면서 윤서는 조만간 꼭 임신을 해야겠다 마음먹는다. 그리고는 뛰쳐나간 주혁의몫까지 밥상을 차리는데 문득,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학부모에게 학습지를 끊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던 해주의 모습이 스쳐간다....그러다 윤서는 고개를 저으며 주혁이 좋아하는 부대찌개 맛을 본다. 맞춤하니 칼칼하고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