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이번주 게스트로 소설가 민정재를 섭외했다는 pd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린다. 유경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pd에게 게스트를 바꾸자고 할 명분도 권한도 없다. pd와 작가는 엄연히 수직적 관계다. 그랬다가는 제대로 된 통보도 받지 못하고 잘릴수가 있다.
해서 유경은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 정재의 전화번호를 받아적는다. 지난 7년간 정재의 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하긴, 이 한번호로 일을 다 처리하고 인맥을 유지하던 그였으니 바꾸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정재는 "혹시..."하며 전화 너머에서 주저주저한다.
"예?"
"아뇨...성함이...제가 아는 사람이랑 목소리가 같아서요.."
"아...저, 김경압니다"
"아니구나..."
하필 60년대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유경은 그 상황에서도 쿡 웃음이 나온다.
"사전 인터뷰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아...예...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면 될지요"
"간단히 몇가지만 여쭐게요..."
하고는 유경은 미리 준비한 질문지를 들여다보며 그와 통화를 이어나간다. 무명기가 혹독하고 길었던걸로 아는데 어떻게 버텨냈는지, 이번 '남도문학상'에서 대상을 타게 되신 소감은 어떤지, 등등...
정재는 유경이 대강 예견한 대답들을 쏟아내었다.
쓰는 행위자체가 기쁨이고 보람이었기에 딱히 무명기라고 여긴적은 없다고, 그래서 이번 문학상도 고사할 생각이었는데 주최측의 간곡한 요청에 수락하였다, 등등...
유경은 자기 안에서 메스꺼운 무언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옴을 느낀다.
그렇게 정재와 전화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유경은 이렇게 덧붙인다.
"저희방송이 생방인건 아시죠?"
"네? 녹음 아니었나요?"
"네...수요일은 생방이예요"
"아...떨리네요"
"그냥 알아두시라고요. 지금 말씀하신거 제가 좀 다듬어서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렇게만 하심 됩니다"
라며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이메일을 물어본다.
이제 사전 인터뷰도 다 끝났고 원고도 매꼭지마다 다 채웠으니 좀 쉬면 되리라...그렇게 원고를 마무리하고나자 전날부터 느껴지던 몸살기가 본격적으로 온몸을 감싸온다. 긴장이 풀린탓이리라....유경은 전날 처방받은 약을 입에 털어넣는다. 그러자 잠시후 온몸에 나른함이 퍼져나가고 그것은 잠으로 이어진다.
꿈에서 유경은 정재와 어느 바닷가를 걷고 있다. 겨울바람이 싸늘해서 유경은 패딩속으로 얼굴을 묻는다. 그러자 정재가 유경의 패딩 지퍼를 하이넥으로 끝까지 올려준다. 그리고는 한팔로 유경의 허리를 안고 둘은 노을 내리는 겨울바다를 입김을 내뿜으며 천천히 걸어간다. 그러다 정재가 유경의 한손을 살며시 잡아온다."어? 손이 왜 이렇게 차?"라며 그는 유경의 쥔손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녹여준다.
처음 문화센터 강의가 끝나고 여럿이 빙둘러 앉은 자리에서 정재는 뚫어져라 유경만 바라보았다. 소설가가 되는게 꿈이었던 20대 후반의 유경은 자기가 흠모하던 소설가가 직접 강의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었고 잠을 다 뒤척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았다. 사람을 뚫어버릴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끝에 그녀는 가슴을 베이고 말았다.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이제 정재의 코너가 다 돼 간다. 지금쯤 복도에 와 있으리라는 생각에 유경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점심에 먹은게 올라오는 것만 같다. 정재를 이런 데서 이런식으로 마주칠줄이야...
pd가 눈짓으로 나가서 정재를 에스코트해 오라고 한다. 유경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부스문을 열고 나간다.
정재는 긴장을 많이 했는지 두손을 비비며 라디오 부스복도를 서성이고 있다.
"민작가님"
그 소리에 정재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슬로모션이라도 걸린것처럼...
그리고 7년만에 정재와 유경은 낯선 방송국 복도에서 이렇게 마주한다. 너...정재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다, 아니 쏘아보다 유경이 먼저 다가온다.
"들어가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저랑 하신것처럼만 말씀하심 돼요"
"어떻게....분명 너였어. 목소리가 너였는데...뭐? 김경아? 어이가 없어..."
"늦었어요 작가님" 하고 유경은 정재의 비난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듯이 다시 부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뜸을 들인뒤 정재도 들어선다. 무언가 결심한 눈치다...
생방을 하는 수요일은 mc를 보는 아나운서인 재희도 적잖이 긴장을 한다. 그래선지 그녀는 음악이 나가는 동안 계속 입을 풀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긴장을 풀려한다. 간단한 서로간의 인사가 끝나고 짧게 음악이 들어간 동안 재희와 정재는 소곤소곤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그러자 재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온다. 재희가 볼륨을 죽여놔서 둘의 이야기 내용은 부스까지 전해지질 않는다. pd옆에서 컴퓨터를 조작하던 유경은 정재가 도대체 어떤 얘기를 해서 재희가 저렇게 경악을 하는지가 궁금하다...설마 자기들의 이야기를 한건 아닐테고...
정재는 사전 인터뷰때 한 말 따위는 개나 줘버렸는지 자기 기분대로 이야기를 쏟아낸다. pd는 언짢은 표정을 짓지만 생방이라 잘라낼수도 없다.
"저 사람 뭐야"라며 pd가 못마땅해한다.
어떤식으로든 정재와 다시 만난다면 돈보다도 '사과'를 꼭 받아내겠노라 다짐해온 유경이었다. 그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유경의 모친이 남긴 단하나의 유산, 즉 18평 아파트를 저당까지 잡혀야 했던건 정재의 암묵적 협박과 압력때문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전형적인 '애정사기'였음에도 그렇게 단정을 내리기까지 유경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유경에게 가장 큰 협박은, 정재가 이틀, 사흘씩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원하는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런식으로 그는 그녀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와 헤어지는건 그녀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유경의 수중에 더이상 돈이 없다는걸 알아챈 정재는 정해진 수순대로 그녀를 버리고 '갈아티기'를 선택했고 상대는 유력 문학지의 편집장이었고 곧이어 둘의 동거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유경은 실연의 상처와 굴욕을 씻어낼 틈도 없이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 망연자실했고 자신에게 돌아온 쥐꼬리만한 돈으로 어떻게든 연명을 해야했다. 그리고는 이따금 정재에게 연락해서 가져간 돈의 일부라도 돌려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정재는 '나중에 다 갚는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친척집과 친구집을 전전하던 유경은 안해본 일 없이 다했고 그러다 방송국에 다니는 한 대학선배의 귀띔으로, 이곳 지방 방송국에 라디오 작가 자리가 났다는는 걸 알고는 데모원고를 써서 그 선배가 알려준 pd의 이메일로 투고, 힘겹게 일을 잡았다. 그리고는 방송국 가까운 곳에 보증금 300에 월 30짜리 월세를 얻던날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마구마구 쏟아내었다.
정재의 코너가 다 끝나고 유리너머로 환하게 웃으며 서로 악수를 나누는 아나운서 재희와 정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재는 스튜디오를 나오자마자, pd에게 인사를 하고 유경은 그자리에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부스를 나가버린다. 따라가야 한다...가서, 한마디, 잘못했다, 미안했다,는 사과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마음에 유경은 다급히 정재를 따라 나간다.
복도에 나서자 정재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다. 유경은 화다닥 기계 안으로 뛰어든다.
"뭐, 나한테 할말 있나 작가님? 김 경 아 작가님?하고 그가 배시시 웃는다.
"나한테 사과해" 유경이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입을 뗀다.
"지금 그렇게 한가한 얘길 할 때가 아닐텐데?"하고 정재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연다. 내리라는 신호다.
"사과해!"하고 소리치는데 유경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러자 정재는 가만히 유경의 한손을 쥔다. 7년전처럼. 그동안 변한건 없는것처럼...
"무슨 짓이야!" 하며 유경이 그 손을 뿌리친다. 그러자,
"여전히 손이 차네"
유경이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아나운서 재희가 pd와 이야기를 나누다 멈칫한다.
"저기..정작가,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pd가 힘겹게 말문을 연다.
"네"
뭔가 불길한것이 유경을 스치고 간다.
"작가교체를 좀 해야 할거 같아"
"왜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자 재희가 싸늘한 눈을 하고 그녀 앞으로 바투 다가선다.
"그렇게 안봤는데 민정재작가 스토커였다며? 지난 7년간 그거때문에 민작가 정신과치료에 ,다됐던 결혼까지 무산됐다던데"
"..."
유경이 전해들은 바로는 동거에 들어갔던 문학지 편집장이 실은 남편과 별거중인 유부녀였다는 것이고 결국은 남편에게로 돌아갔다고 했다. 이후에도 정재는 계속 '갈아타기'를 하며 승승장구를 한걸로 알고 있다...
"아녜요. 그게 아니고..."
그러나 재희도 pd도 더이상 유경의 말은 듣지를 않는다. 세상은 절대 약자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정리좀 부탁해요. 급여는 다음주에 정산해서 넣어줄게요"라며 pd가 서둘러 부스를 나간다. 그 뒤를 이어 재희도 나가버리자 텅빈 부스에 유경혼자 붙박이처럼 서있다...
지난 7년간 정신과치료를 받아야했던건 유경이었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부스 뒷정리를 한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핑돈다. 그나름으로 정이 든 공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정리를 마치고 외부로 나있는 유리창을 일별한다. 그너머로 싸늘히 냉기를 뿜어올리는 겨울강이 햇살에 반짝인다...유경은 조금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재에게 잡혔던 자기 손을 가만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그가 7년전 하던것처럼 그 손에 입술을 대본다. 차다...내 손은 왜 이렇게 찰까...그 생각을 하며 그녀는 부스밖으로 조용히,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내지 않고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