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 일상

여행과 연애라는 멀티버스

by EJ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를 봤다. 취향의 영화를 만나는 기쁨은 없었으나, 모든 면에서 훌륭한 영화였다. 아주 사소한 선택이 인생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은 많은 창작자들이 즐겨 표현해온 아이디어다. 그리고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는 결국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로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멀티버스로 엮어낸 것이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하다고 느꼈다. 영화를 보고 나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주에 대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건 영화 자체에 대한 감흥이라기보다는 영화가 일으킨 연쇄작용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고 처음에는 느꼈으나, 생각할수록 그 자체가 영화의 의도여서 끝내 취향을 뛰어넘어 감격의 박수를 짝짝 쳤다.


우주를 줄게


너에게 우주를 주겠다는 고백의 말이 딱히 로맨틱한 과장법이 아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주적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라고, 관계에 대한 수다를 떨 때에 종종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보통 살아온 세계관이 충돌하고 갈등이 일어나 어떤 실패를 맞이하는 경우 혹은 세계관 대통합이라는 기적적인 일이 생기는 경우 튀어나오곤 한다. 빅뱅이 일어나고 온갖 진화의 역사와 종들의 전쟁, 기후 변화와 성간 충돌을 거쳐 필연적인 종말까지 모든 과정이 관계의 역사와 얼마나 닮았는가 한다. 각 상대방과 우주적 맥락을 이루는 각각의 나를 알파, 베타, 감마의 나라고 할 때, 전 우주와 후 우주 사이: 즉 전 연인과 후 연인 사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나는 얼마나 많은 급발진을 행하고 당했는가, 를 생각해보라. 멀티버스 사이에서 점프하기 위해 별의별 생뚱맞은 행동을 해야 하는 <E E A>의 룰 세팅까지, 이 멀티버스가 실제 인생과 이렇게까지 비유적으로 맞아떨어지다니, 하고 소름이 돋았다. ‘와 이 영화, 이 정도였어…?’ 하고 각성됐다.


여행 멀티버스

긴 여행을 다녀와서 현생을 산지 이제 열흘. 여행지에서의 나는, 이름도 EJ라고 처음 불린 나는(Jude라는 이름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이런 영어 이름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이니셜로 불러달라고 하게 된-) 돌아보면 한국에서의 나와는 다른 세계관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이었다.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오세아니아로 먼 길 여행을 떠났던 그 모든 Jude 혹은 EJ가 속한 하나의 다른 세계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심지어 리스본에서 만난 친구 S와는 생각했던 것보다 꾸준히 연락을 나누고 있는데, 그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를 한번 더 생각하고 알려주는 것을 보면 현생에서의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생성되고 있는 고유의 세계관을 인지하고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여행지에서의 인연들과 다시 만날 날을 상상하곤 하는데, 이건 단순히 또 다른 홀리데이를 계획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해보는 것에 가깝다. 이 같은 과정을 우리는 연인과 헤어지고 새로운 연인을 만날 때 가장 흔히 겪곤 한다. 이번에는 다르고 싶어, 정말 좋은 것을 만들어나가고 싶어, 더 나은 내가 되어 더 나은 우리가 되고 싶어, 와 같은 생각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이 내 세계관 전체가 흔들리는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세계관과 합쳐지고 감응하면서 다른 멀티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되겠다. 이때 ‘우주를 준다’는 말은 성립할 수 있는 거다. 세계는 이때 융합되거나 확장되기도 하지만, 때로 좀 더 작아져도 함께니까 괜찮아의 경우도 있다. 그리고 잘못하면 오히려 부서져 우주의 먼지가 되는듯한 끝없는 우울의 진공상태를 겪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멀티버스의 묘미를 보여주는 끝판왕의 관계성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연애

요즘 <환승연애2>를 보면서도 가는 자리마다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도대체 왜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들의 감정과 만남에 이렇게들 과몰입하고 있는지, 이것이 무슨 시간낭비인지가 시리즈 초반부를 볼 때 우리가 흔히 나누던 한탄이었다고 한다면, 최종화를 앞두고 있는 지금은 그때와는 좀 다른 대화를 한다. 출연자들이 데이트와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심각한 수준의 인지왜곡: 상대방의 감정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결론 내리고 그에 맞추어서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보는 것이 결국 그 인물을 흥미로운 극적 사건을 계속해서 일으키는 훌륭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 같다는 류의 이야기를 한다. 리얼리티가 아닌 허구의 스토리를 다루는 우리는, 연출자는 연출자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제작자는 제작자대로 이 리얼리티 예능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에 가슴을 쳤다. 출연자들이 회마다 욕을 먹고 사랑을 받고 하고 있지만 그들을 캐릭터로만 보자면 하나하나가 욕할 수 없이 일관된 세계관과 우주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모든 선택들의 결과로써의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것만 같은 어떤 상태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닌 다 내가 선택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때로 우리는 힘들다.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은 시점은 생각보다 인생에서 꽤나 자주 그리고 쉽게 온다. 어릴 때는 어려서, 나이 들어서는 나이 들어서, 뭘 시작하지 않았을 때는 시작하지 않아서, 뭘 시작했을 때는 시작해버려서…. 내가 지금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온다. 그럴 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도, 오히려 지금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도 쉽게 긍정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그래서 아니야, 넌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을 거는 것이나, 뭐 그냥 이대로 살면 어때 하는 힐링의 태도가 항상 베스트셀링 콘텐츠로 유행한다.


최악의 멀티버스라고 할지라도

그러니 안다. 현생 버전의 은정으로 거의 돌아온 이 시점에 모든 점프에 열려있는 나는 뭐든 할 수 있고, 그냥 이대로 살아도 충분히 괜찮다는 걸. 어제는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스스로를 얼마나 인지왜곡의 상태에 빠뜨리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뭔가에 취해서 살았는데 (그래서 그간의 나는 아마 훌륭한 캐릭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이상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것만이 분명한 지금, 취하지 않고 살면서.. 하지만 전과 똑같은 것, 곧 순수한 것 좋은 것 건강한 것을 추구하고 싶다고. 주제에 관해 아무런 내적 갈등을 느끼지 않고 있던 대화 상대에게 왠지 인색해지는 나의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스스로 노력해서 이룩한 것이 분명한 그 내적 평화를 바라보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고 물끄러미 생각했다. 이게 맞아? 하는 물음을 자꾸 던지고 혼자 노력하는 것보다, 이런 사람을 이렇게 계속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게 더 살고자 하는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도. 이쯤 되면 점프를 위해 개연성 없는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럴 용기보다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는 걸 차츰 인정하고 있다. 무언가에 취하고 싶지 않은 만큼이나, 지금보다 더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나를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조금 후의 미래에 알게 되겠지. 그러니 오늘은, 혼자 평화로운 수준의 노력을 행하는 삶과 더불어 이런 존재들과 마주칠 때를 위한 다짐을 한다. 무심하게 그냥 그들을 스쳐버리지 않고 잘 발견해낼 수 있기를. 그렇게 때때로 마주친 이들을 멈춰 세우고, 우리에게 자연스레 주어진 시간만큼씩만 고요히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그렇게 살게 되겠지. 하고 슬쩍 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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