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반에 50명이었다.

by 몽접

나 때는 한 반에 50명이었다. 많을 때는 60명까지였다. 그래서 3학년때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하곤 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딱 한 번. 학교에 애들이 많아서 수업할 반은 적어서 우리는 그 빈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서 놀기도 했고 종이 치면 들어가야 하지만 재미가 있어서 때로는 꾀를 써서 놀았다.


정규과목에 영어는 없었지만 미술선생님은 계셔서 나같이 그림 못 그리는 학생은 선생님께서 아주 자세하게 알려 주셔서 그나마 그림이라고 하는 작품을 하나 완성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 시간은 담임 선생님께서 풍금을 치셨는데 반에서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이 음악시간에는 풍금을 연주했는데 내심 나는 그게 부러워서 알려 달라고 해서 몇 번 연주했고 가난했던 우리 집에 피아노가 없었기에 피아노가 있는 친구집에 가서 또 따로 연습을 해서 한 번은 담임 선생님께서 "오늘은 다른 친구가 연주해 보자, 하고 싶은 사람?" 하고 물어보시면 아주 소심하게 손을 들어서 고개를 숙이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내심 연습한 걸 뽐내고 싶었던 나는 그렇게 하루를 풍금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동회를 하면 학생이 많았기에 줄을 서는 내가 기억해야 하는 줄이 3번은 있어야 했다.

첫 번째는 무용할 때 줄이었다. 여학생들은 무용을 했는데 부채춤이었다. 양쪽으로 부채를 흔들어서 모양을 내는 거였는데 단상에서 체육 선생님께서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쉽지 않았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에 뭔가를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맞았다 싶으면 틀리고 다른 애들과 호흡을 하면서 하는 무용은 정말 힘들었지만 운동회 꽃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그렇게 또 열심히 했다.


두 번째는 달리기 줄이었다. 누구나 하는 달리기 줄에서는 3등까지는 공책 한 권씩을 받을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열심히 뛰어서 3등을 바랐지만 늘 4등. 내가 받은 공책 한 권은 6학년 때 앞에서 열심히 뛰던 학생이 넘어져서 3등으로 들어가 손등에 도장을 받아서 공책을 받았다. 정말 기뻐서 엄마에게 자랑을 했었다. 평소에 엄마는 상장에 무심하셨는데 운동회에서 받은 공책은 정말 좋아하셨다. 체육에 기질이 없어서 늘 섭섭함이 있으셨던 거지, 아니면 본인의 한을 푸셨는지 모르겠지만 , 아 그리고 우리 때는 손님 찾기라는 게 있었다.

나도 다르지 않게 쪽지를 찾아서 뛰었는데 다행히도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뛰기가 걸려서 엄마를 찾아서 뛰었는데 엄마가 더 빨라서 거의 쫓아가는 수준으로 뛰어서 그때 2등을 하고 받은 공책이 너무 기뻐서 엄마는 저녁 식탁에서 그 순간을 아빠에게 스포츠 중계처럼 말씀을 하셨다.


세 번째는 청팀 백팀이었는데 나는 무슨 운인지 거의 청팀이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라 치어리더가 되고 싶었다. 치어리더라고 해봐야, 스케치 북을 들고 같은 옷을 맞춰서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하면서 같이 응원을 하는 거였는데 5학년때 같이 치어리더 하는 사람을 뽑아서 난 손을 들어서 딱 한 번 치어리더를 하고서 재미를 느끼고 6학년 때 또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무슨 용기로 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이렇게 줄을 서고 청팀 백팀 박터지기를 하면 먼저 박이 터진 팀에게는 점수가 가고 응원 점수도 주시고 점심을 먹고 나면 마지막 하이라이트 계주가 있었다. 계주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가 50명이었으니 우유 배달도 했었다. 흰 우유가 매일 나왔는데 나는 유당 불리증으로 우유를 마시면 늘 배가 아파서 가방에 넣었다가 터지기가 일반 그래서 포기를 하고 집에 들고 가면 엄마나 아빠가 드셨고 우유배달하는 사람은 지정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했다. 학교는 미닫이에 바닥은 나무 바닥이어서 늘 닦고 쓰는 일이 일상이라 재미는 있었다.


남자 반 여자 반 학교 생활은 활극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여자 아이들 놀리고 그 놀림에 화가 난 여자 아이들은 청소 도구를 들고서 복도를 활보하고 다니고 그러다 다치면 울기도 했지만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 그렇구나 한다.


몇 주 전 졸업한 초등학교를 다녀왔다. 너무 운동장이 작다. 그리고 한 학년에 3반이 최대이다.

이런 우리 때는 8반까지였는데, 이렇게 작으니 섭섭하고 쓸쓸했다.


우리 때는 아이들이 많으니 정글짐부터 그네까지 학교에서 늘 손을 봐주셔서 아이들 보호에도 적극적이셨다.

그런데 그런 놀이기구는 없고 그냥 텅 빈 운동장으로 있었고 학교 앞 분식집도 우리 때는 3곳이 있어서 3파전이었다. 제일 왼쪽은 불량식품이 잘 팔렸고 중간집은 핫도그가 제일 큰 집이었고 맨 끝쪽은 떡볶이를 많이 주는 집이어서 우리는 나눠서 사서 모여서 먹었다. 그런 재미도 이제는 사라졌는지 한 곳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고 문구점은 다행히도 아버지를 이어받아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요즘 저출산을 넘어서 출산을 거의 하지 않고 그리고 지방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나 너무 아쉬워서 이러다 학교 없어지겠다 ,라는 생각을 하니 추억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씁쓸했다.

운동회가 끝나고 졸업을 할 때 즈음 나는 친구와 함께 타임캡슐을 학교 운동장 끝에 묻었다.

그리고 나중에 대학을 가서 다시 보자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서로가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그 친구와 연결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친구가 혼자서 보러 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50명이었던 초등학교를 지냈던 터라 부딪히면서 생기던 에피소드가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서

동창회를 하면 복작이는 아이들 틈으로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다른 시대를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무조건 많이 낳으라 할 수도 없다. 환경과 각자의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 좁아진 반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더는 좁아지지 않았으면 하는 내 욕심이 꿈틀거렸다.


이제는 전설이 되었다.

한 반에 50명이었다,라고 하면 그때는 그랬지.

그리고 우리 때는 오전 반 오후 반이 있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은 저학년 반 청소를 담당했지,라고 하면

그랬지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 너무 늙었다,라고 웃는다.

그 웃음에 눈물이 난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지 어쩌겠니 하는 친구에 말에 나도 같이 손수건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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