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한민국 장녀이다. 우리나라에만 특별하게 맏이라는 무게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다를 바 없이 그렇게 컸다.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자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받는 용돈은 자연스럽게 꿀꿀이 통에 모아서 엄마에게 이자를 갚을 때 쓰라고 드렸고 공병을 모아서 슈퍼에 가져가서 가장 비싼 값으로 쳐주는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서는 동생과 함께 그날은 과자를 바꿔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름 어렵게 살았고 또 한 편으로는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쳤었나 보다. 대학을 가서도 달라질 것 없이 살았다. 혼자 벌어서 대학을 다니면서 친구들을 구경을 하고 그런 친구들이 부러운 적은 있었지만 결코 내 생활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러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일기에 적어가면서 살면 언젠가는 내 삶이 꽃이 필 때 이 생활이 밑거름이 되겠지 했다. 매일매일 적는 일기에는 '최선'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았고 다이어트가 일상이듯이 최선을 대하는 내 모습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거리를 두려고 둔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을 다니고 회사를 다니면서 바쁘게 지내면서 엄마는 엄마 나름 바쁘게 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집으로 오라고 하셨지만 간다고 했지만 마음처럼 안 됐고 어쩌다 가면 한솥을 하는 엄마에게 "이제는 그냥 먹을 만큼만"이라는 말로 엄마의 큰손을 접으려고 했지만 엄마는 그럴 때마다 예전 생각에 더 오기가 난다시며 밥을 정말 많이 하셨다.
얼마 전 엄마는 가벼운 우울증 판명을 받으셨다.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그냥 정신과라고 하면 이상하다고 미루시다가 내가 가라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 내가 가서 엄마를 모시고 갔다. 간단한 검사와 상담으로 엄마는 외로움을 겪는 것이라고 하셨고 엄마 나이에 다들 있을법한 우울증이라고 의사는 매우 가볍게 이야기했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 너무 슬퍼하지 마, 그냥 살아가는 게 그렇지"라는 매우 건조한 의미로 이야기를 넘기며 엄마와 시장에서 국밥을 먹으며 약을 챙기며 다음 병원행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잠시 잊었다. 그리고 서류가 쌓여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하고서 커피를 내리고 잠시 잊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했다. 엄마의 우울증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공유하는데 시간이 답이라는 원론적인 답을 듣고서 헛웃음이 났다. 알고 있지만 그냥 내가 뭣하나 해드린 게 없어서 편찮으신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늘 잘 지내시는지 안부전화 한 번 더 할걸 아니면 식사는 뭐 드셨는지 좀 더 살뜰하게 챙길 것을, 수많은 생각이 드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자식이 우울증이라면 부모는 어떤 생각을 제일 먼저 할까? 나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하는데 그 심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관계라는 게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라는데 나는 내가 그렇게 나쁜 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착한 딸은 아니었나 보다는 생각에 괜히 눈물을 훔치는 까닭은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한다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우셨을까 싶어서 마음이 아프다.
착한 딸이고 싶었다. 그래서 말도 많이 하고 표현도 많이 하는 딸이고 싶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게 더 줄어들었다.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착한 딸은 아니었던 것이다. 괜히 죄송하다.
자식이 이렇다. 부모도 힘들지만 자식도 제대로 하기에는 참 어렵다. 아니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조금만 따라간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엄마 죄송해요, 착한 딸이 아니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