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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은규 Jul 27. 2023

'공부의 위로'를 읽고

막학기를 앞두고 나의 대학 수업 돌아보기

“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은 아니라는 그런, 위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넘기다 마주한 문장이다. 문장이 마음에 들어 친구에게 책 제목을 물어봐 냉큼 사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쓴 ‘곽아람’ 작가님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으며 졸업했고, 공부를 진심으로 하신 분이라는 걸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주로 대학생 때 들었던 수업에 관한 내용이다. 그때 들은 교양 수업들이 쓸모없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우리에게 밑거름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의 대학생활이 스쳐 지나가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와 이 사람은 어떻게 아직도 대학생 때 배웠던 걸 기억하지?’가 첫 번째, ‘나도 똑같이 대학교 4년을 다녔는데 나한테 남은 건 무엇이지?’가 두 번째였다. 대학 수업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대학 수업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우리 학교는 인문계열, 사회계열과 같이 계열제로 입학하여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한다. 원래 미디어를 전공으로 하고 싶었지만 대학 입학을 위해 인문계열로 들어왔기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를 선택할 수 없었다.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같은 언어들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자신 있었던 영어를 쓰는 고른 데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영어영문학과에서의 수업들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학점을 잘 따서 졸업을 위한 하나의 단계 정도로 여겼다. 수업을 열심히 들었지만 엄청난 흥미를 느낀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한, 복수전공으로 미디어 관련 전공을 하면서 영문학과에서의 수업은 점점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공부의 위로’를 읽고 나의 대학수업을 돌아보려고 하자,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들이 영문학 수업이었다. 이 점이 스스로도 의아했다. 별로 흥미도 없던 영문학 수업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지금까지 8개의 영문학 과목, 6개의 영어학 강의를 수강했다. 여기서 신기했던 건 영문학에서 극 수업을 4개나 들은 것이다. 심지어 같은 교수님으로 말이다. 그 시작은 ‘영미드라마입문'이라는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이름처럼 입문인 만큼 길이가 짧지만 꼭 배워야 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Macbeth’, 윌리엄의 ‘A Streetcar Named Desire’, 핀터의 작품들까지 한 학기에 6개 작품을 배웠다.


   그중 극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작품은 핀터의 ‘Dumb waiter’다. 이 작품은 핀터의 대표작으로, 지하 어느 방에서 남자 2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엔 글자를 읽고 있어도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소리 내서 신문을 읽고, 별거 아닌 듯이 보이는 문장으로 싸우고, 송수화기에 대고 아무리 말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까지 말이다.




  처음엔 이게 무슨 내용인지 답답했지만,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자세히 보면 Ben만이 신문을 읽고,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골라서 Gus에게 읽어준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의 힘은 언어, 정보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또한 “Light the kettle/ Light the gas” 표현으로 두 인물이 논쟁을 벌이는 부분이 나온다. 서로 어떤 표현이 맞는지 싸우다가 Ben이 “ Who’s the senior partner here, me or you?”라고 말하며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상대방의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Put on the bloody kettle, for Christ’s sake.” 로 표현을 결국 점령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이 언어가 상대방을 제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한정된 인물, 공간에서 긴장감 있게 위계질서와 권력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아 이게 문학의 힘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물들의 대사 한 줄, 행동 하나, 심지어 침묵인 그 순간에도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극 속 세계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 이 수업은 문학 작품의 영상 개작이 지니는 의미와 효과를 탐구하는 수업이었기에, 영상으로 어떻게 개작되었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수업을 계기로 나는 같은 교수님의 수업을 4개나 듣게 되었다. 단편극이면 6개의 작품부터, 장편극은 4개 정도 한 학기에 배우면서 대략 25개의 극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 마지막 극 수업은 ‘영문학과 영상예술’ 수업이었다. 주로 아시아계 영미 극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수업이었다.  그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 바로 “M.Butterfly”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결말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극은 서구가 동양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특히 동양인 여성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재현하고 비판하고 있다. Song은 백인 남성인 Gallimard 가 그동안 순종적이고 지배당하길 원하는 동양 여성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 주며 그를 유혹한다. 충격적인 결말은 Song은 남성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Gallimard는 옷을 벗지 말라며 환상을 유지해나가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동양에 대한 환상은 얼마나 편견이고 부질없는 것이며, 여성/남성, 동양/서양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충격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다.


 이렇게 나의 영문학 수업은 끝이 났다. 처음 극 수업을 들을 때보다 극에 대한 이해, 대사를 해석하고 생각하는 힘이 길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극을 읽어가며 “이 대사가 중요한 것 같은데…이런 뜻인가?”라고 생각해 보았던 부분을 교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극 수업에 진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젠 필수 학점도 다 채워 막학기엔 영문과 수업은 듣지 않아도 된다. 이제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되고, 작가들을 외우지 않아도 되지만 어딘가 모르게 시원섭섭하다. 극을 읽으면서 이민자, 여성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고, 영상과 비교하면서 연출에 대한 부분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식적인 측면보다도 영문학 수업들은 지금 나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힘들을 키워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허투루 읽지 않는 태도, 대사 하나, 문장 하나도 고민해 볼 수 있는 힘을 키워주었다. 아직도 여러 문학 작품들을 읽으며 살고 있으니, 효과는 확실히 있었던 셈이다.


  대학시절을 돌아보는 경험은 많이 했지만, 대학 수업들을 돌아보는 것은 처음이다. 새내기 때 논리에 스스로 자신 있다는 생각에 들었던 ‘기호논리학’에서 C+을 맞고, 재수강했는데 C를 맞은 경험… 패션 수업 교수님이 열어준 강연을 듣고 감명받아 일기장에 적어 놓은 기억, 나이가 들어도 본질을 꿰뚫어 보는 교수님의 통찰력과 그럼에도 항상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 교수님을 보며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 생각보다 대학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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