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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피 Jul 09. 2019

2. 함부르크의 하루

필름 카메라, 아이폰, 6년 된 DSLR로 풀어가는 이야기

여행 중에 함부르크는 사실 베를린의 가기 위한 거점이기도 하고 관광을 하기보단 독일을 알아가기 위해서 들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된 곳이고 독일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겨준 도시이기도 하다.

함부르크 센트럴 스테이션 (아이폰)

브뤼셀에서 함부르크로 넘어가는 항공편은 브뤼셀 에어라인을 이용했는데 35유로 밖에 하지 않았다. 역시나 혹시나 위탁 수화물이 없는 상품이었다. 파리의 친구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눈물을 머금고 추가 위탁 수화물 25유로를 결제했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내 캐리어는 15Kg을 초과해서 셀프 체크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이 있는 곳에서 체크인을 했는데 몇 주 후에 파리에 돌아갈 때도 수화물이 17Kg 정도였는데 왜 여행 초반에도 17Kg였는지 의문이다.

12월 8일 11시 20분쯤 함부르크 시내로 가는 열차 티켓을 끊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향하는데 눈인지 모를 비가 내렸다. 모두 우산을 쓰지 않았지만 나는 우산을 썼다. 우산은 사실 브뤼셀에서 강풍으로 부서졌는데 내가 묶었던 호스텔은 입구 로비에 우산을 놓아야 하는 룰이 있어서 놔뒀더니 누가 가져가 버렸다. 아침에 비가 오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 남아 있던 우산을 집어 올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프랑스 브랜드인 가볍고 튼튼한 우산이었는데 Made in Korea가 적혀있었다. 이유 모를 뿌듯함이었다.

프라이탁 함부루크 매장 앞 (아이폰)

내가 볼 거 없는 함부르크에 들린 이유는 상해에서 6개월간 유학을 했을 때 처음 중국 어학연수를 갔던 시절 룸메이트였던 친구가 네덜란드에서 1년간 유학을 했는데 함부르크의 프라이탁 매장이 아울렛처럼 저렴하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자신의 옷 스타일을 모르고 힙한 모든 걸 수용하는 그런 상태 여서 프라이탁 매장 하나만 보고 브뤼셀에서 함부르크행 비행기를 결제했다. 사실상 함부르크 프라이탁 매장행이었다. 그런데 리뉴얼이 끝났는지 지하에 있다던 아울렛 코너는 보이지도 않고 가격은 배낭여행이나 다름없던 나에게 너무 큰 금액이라 팸플릿만 들고 매장을 나와야만 했다. 추후에 생각해 보면 파우치나 뭐나 하나 사 가야 하나 이런 마음을 누르고 그냥 돌아온 게 정말 잘한 일인 거 같다. 그렇게 매장을 나와서 보니 건너편 DM, 데엠이라고도 하는 드럭스토어 매장이 보였다. 거기서 바디로션과 바디워시 몇 개를 샀는데 600Ml의 용량에 코코넛 향인데 1유로, 1300원 밖에 하지 않는 금액이라 이민을 고려해야 할 시기가 온다면 연금의 4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더라도 독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독일 친구 중에 친자매처럼 지냈던 멜리나, 중국어로 메일링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항상 나에게 독일에 와서 살라고 입이 닳도록 말을 했었다. 내 마음의 고향은 상해라고 생각했는데 마트와 드럭스토어에서 맘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17년 12월 8일 눈이 내리는 함부르크 (아이폰)

함부르크는 백화점의 도시라던 친구의 말처럼 쇼핑몰에 들어가서 반대편으로 나오면 또 쇼핑몰이 있고 백화점이 있고 끝이 없었다. 거대한 쇼핑몰들 사이로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열렸는데 배가 애매하게 고파서 파르페를 하나 사 먹고 싶었다. 그런데 메뉴판에서 읽을 수 있는 게 바닐라와 누텔라밖에 없어서 누텔라로 주문을 했다. 독일 친구가 우스운 소리로 독일은 북쪽으로 갈수록 사람들 키가 크고 잘 사는 동네라서 사람들이 차갑다고 했는데 맞는 거 같았다. 도시도 춥고 건물들 사이로 다리들이 많았는데 갈매기들만 울어댈 뿐 사람은 많지만 고요했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져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니 엄마는 또 나에게 안전을 당부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본인이 가보지 못한 곳을 혼자 다니는 딸의 대견스러움과 반가움이 존재했다. 그래서 마음이 다시 평온해졌다.

엄마와 통화를 했던 함부르크 시청 옆 대교 (필름 카메라)

눈이 내리는 듯하더니 비가 다시 내렸다. 슬슬 발가락도 시리고 프라이탁 매장의 실망스러움과 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이른 시간이지만 마트에 들렀다 숙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젤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독일은 하리보와 밀카의 나라여서 안 사볼 수가 없었다. 마트의 한 파트 진열대 전체가 하리보로 가득 차있었다. 처음 보는 하리보들과 커리부어스트, 맥주 한 병, 탄산수 한 병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같은 방에 일본인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는데 선 듯 나에게 하리보 작은 봉지를 나눠줬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챙겨 온 전통 무늬의 자석을 나눠줬다. 그때 당시 나는 상해에 살 때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 기초와 토익시험 준비로 학원을 다니다 주로 회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맞지 않음을 느끼고 오픽으로 갈아타고 공부를 하다가 시험을 보지 않고 유럽여행에 오른 상태였다. 상해 유학시절만 해도 대부분의 친구들이 유럽인에 중국어를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영어를 사용했는데 영어를 못하는 나는 샤이한 아시아 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3개월의 빡쎈 영어 공부를 하고 난 후 자신감이 가득 찬 상태여서 일본인에게 대화를 건넸다. 마침 유이라는 일본인은 캐나다에서 워홀을 마치고 혼자 여행 중이었고 다음날 베를린으로 떠난다고 했다. 나도 다음날 아침 플릭스 버스로 떠나기로 해서 베를린에서의 만남을 기약하고 라인 아이디를 교환했다.

베를린의 펍과 클럽을 추천 해 주고 있는 독일 친구의 메세지

앞서 말한 가장 친한 친구인 멜리나는 독일 남동쪽에 위치하는 파사우라는 곳에서 대학교를 다녔는데 상해에서 한 학기가 끝나고 돌아갈 무렵에 나에게 파사우에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텃세에 치이고 가장 친했던 친구들이 각자 본인 나라로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이라 미세한 우울함을 가지고 다녔다. 마치 상해에서 처음 기숙사를 배정받고 룸메이트가 말이 안 통하는 유럽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과 같았다. 그래서 거절을 하고 다음을 기약했었는데 그 약속이 1년이 지나기 전에 내가 유럽에 왔다. 게다가 함부르크, 베를린, 뮌헨 2주가 넘는 기간을 있는 다고 하니 멜리나는 무척 기뻐했다. 사실 멜리나의 부모님은 그리스에 계셔서 뮌헨에서 인턴을 하는 동안 쉐어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그래서 멜리나는 뮌헨에서 만나기로 하고 상해에서 그랬던 것처럼 클럽메이트인 친구는 베를린에 7일간 머물 나에게 바와 클럽을 추천해 줬다. 다음날 10시 플릭스 버스를 타기 위해 친구가 알려준 곳들을 구글 지도에 표시하고 노트에 일기를 끄적이다가 잠이 들었다. 함부르크는 이렇게 스쳐 지나갔다.


브뤼셀에서 가져온 팜플렛들 꼴라주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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