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 아이폰, 6년 된 DSLR로 풀어가는 이야기
17년 12월 10일 일요일. 한국의 좋은 점은 24시. 편의점, 마트, 음식점, 가게 모두 주말 상관없이 24시간 연다는 점이다. 나는 유럽 또한 어느 국가처럼 같을 줄 알았다. 아침에 물병에 조금 남은 물을 마시고 식량을 챙겨둘 요량으로 마트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24시 편의점도 문을 닫고 구제 샵도 모두 문을 닫았다. 다급하게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카톡을 하니 유럽의 일요일은 거의 모든 마트나 음식점들이 문을 닫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너무 춥고 약속시간도 조금 남아서 숙소에 들어가 히트택을 주워 입었다. 로비 옆에 있는 카페도 문을 닫아서 석회 가득한 수돗물을 마셔야 하나 엄청난 고민을 하다가 지하철에 있던 자판기가 기억이 나서 눈물을 머금고 500ml 생수를 2유로에 구입했다. 그리고 트램을 타고 베를린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역내에 맥도날드에서 기다리면 유이가 친구와 함께 나를 찾아온다고 했다. 넓은 역내를 헤매느라 시간이 다소 늦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유럽의 시간을 사는 만큼 여유 있게 움직였다. 유이의 친구는 신노스케씨로 유이와 동갑이었다. 유이와 같은 교토 출신이라고 했는데 아메카지 보다 더 힙한 그런 룩에 포스가 느껴졌다. 폴란드 언어는 독일어보다 배우기 어렵고 학원도 별로 없다고 했다. 신노스케씨는 영어보다 폴란드 언어가 배우고 싶어서 언어 학교를 등록하고 폴란드에서 1년째 거주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나가는 진도는 1년째인 지금도 책 반권밖에 안 나갔다고 했다. 서른이 넘는 나이에 두 사람은 모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냈다. 내가 처음 상해에서 외국 친구들을 만나고 알아가고 시야가 넓어진 걸 확실히 체감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서른 또한 늦지 않은 나이라는 걸 그들의 경험으로 확인받을 때 내 버킷리스트는 한 줄 한 줄 늘어가고 내 서른이 궁금해졌다.
그의 범상치 않은 아웃핏처럼 신노스케씨는 독일의 플리마켓 투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여행에 별 계획이 없던 유이와 나는 흔쾌히 그를 따라나섰다. 중앙역에서 트램을 타고 조금 더 이동하면 ‘Mauerpark’라고 불리는 베를린 장벽 공원 옆에 주말 플리 마켓이 열린다. 주말에 마트와 식당, 가게들이 문을 닫으니 많은 사람들이 플리마켓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저녁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닥이 포장되지 않은 진흙밭이었는데 겨울에 영하로 온도가 내려가다 보니 유럽 오기 전에 새로 산 반스 밑창으로 냉기가 올라왔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습도가 높다 보니 한국 영하 10도에 맞먹는 체감 온도였다. 발가락이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부스에서는 중고품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한국의 플리마켓처럼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제품들도 팔았다. 독일의 물가에 비해 생각보다 가격대가 높아서 잠시나마 추위를 잊고자 카레 부어스트를 시켰다. 4유로도 안 되는 가격이었지만 역시 독일에서 소시지는 실패하지 않았다. 독일에 산다면 나는 알코올 중동자가 될게 훤하다. 맛있는 소시지와 많은 종류의 밀맥주라니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하지만 우선의 추위가 급급해서 맥주 생각은 잠시 잊어버렸다. 구경을 마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다음 플리마켓 장소로 향했다.
장벽 공원에서 조금 더 주택단지로 들어서면 ‘Arkonaplatz’ 공원이 나온다. 여기는 좀 더 주민들로 이루어진 플리마켓 같았다. 규모는 작았지만 매우 알찼다. 가격 흥정도 흔쾌히 해주는 분위기여서 나는 옛날 만화잡지 코너에서 심슨 만화와 도날드덕 만화책을 샀고 신노스케씨는 오래된 시계 2개를 구매했다. 그리고 애기들 동화책을 파는 곳에서 카메라 장난감으로 쓰면 좋아 보이는 파리 렌즈 같은 게 있어서 물어보니 3센트를 부르셨다. 구매하고 정말 이동하려고 돌아섰는데 박스체로 보존이 잘 되어있는 필름 카메라가 있어서 작동 여부를 떠나서 10유로의 금액이라 얼른 구매했다. 유럽에 온 지 딱 7일째 된 날이었는데 가장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독일은 흔히 말하는 ‘아나바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마인드가 다른 국가보다 강한 것 같다. 구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 어느 쇼핑보다 만족스러워서 이날 나는 플리마켓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Boxhagener Platz’라는 공원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으로 향했는데 6시가 거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정리를 하는 가게들도 많았고 외국인은 우리가 전부여서 경계하는 느낌이 강했다. 조금 맘에 드는 물건이 있어 영어로 물어보면 작은 물건도 10유로를 부르고 같은 베를린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짧은 시간 극강의 추위에서 계속 걷다 보니 이른 저녁에도 힘이 들었다. 겨울의 해는 일찍 져서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두웠다. 유이의 추천으로 근처에 연 ‘Hops & Barley’ 펍을 갔는데 애플 사이다 맥주가 유명하다고 해서 주문을 했다. 애플 사이다라고 하면 써머스비 밖에 모르던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애플 사이다가 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알콜 쓰레기가 아닌 나도 독일 맥주는 2잔에도 취기가 올라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던 나와 유이는 건너편 ‘Schiller Burger’라는 수제 버거집에서 거하게 저녁을 먹고 맥주를 먹을 때 소시지를 시켰던 신노스케씨는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다음날 우리는 베를린 장벽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트램을 타고 가는데 눈이 펑펑 왔다. 가방에 든 플리마켓 투어의 산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데 한국반 아이폰의 셔터 소리는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