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마라톤 1
별 일 없는 내 인생에서 2025년,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면 달리기 였을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달리기 시작했고, 꽤 좋은 버릇이 되었다. 건강과 평온함은 덤이다. 무모하지만 목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큰 욕심없이 마라톤 대회들을 알아보았다. 10KM와 하프마라톤은 어떻게든 뛰었다. 이제 남은건 풀 마라톤이다.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러닝 시장에는 각종 낭설이 난무했다. '킬로미터당 6분 아래로 페이스가 나오지 않으면 풀 마라톤은 힘들대.', '안정화 신고 풀마라톤은 불가능하던데.' 등등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킬로미터당 6분을 20초를 넘겼고, 안정화로 연습했다. 겁이 나서 도저히 '신청' 버튼에 손이 가지 않더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출발선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되었고, 숨을 헥헥대며 뛰고 있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끝은 모르겠지만 후쿠오카에서 마지막 20대를 불태울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첫 풀 마라톤 (42.195KM)이 시작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대회날 아침.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설레면서도 정신이 없었다. 준비할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 먹어야지, 외투 챙겨야지, 몸 풀어야지, 에너지젤 먹어야지, 일기예보 체크해야지, 선크림 발라야지, 모자 써야지, 택시 잡아야지, 배번 붙여야지, 갈아입을 옷 챙겨야지. (놀랍게도 이 중에 제대로 한 게 별로 없다;;) 인파에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스타팅 라인에 서 있었고, "펑" 소리와 함께 곧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마라톤 스타트 때에는 그렇게 긴장되지 않는다. 후루룩 정신없이 시작되어서 그런가. 앞으로 겪을 지난한 고통이 예상되어서 그런가. 축구와는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축구대회에 출전했다. 전문 선수는 아니고, 반 대표/학교 대표/구 대회 뭐 이런 대회 나갈 정도의 애매한 실력을 가졌다. 주로 윙 포워드로 뛰었다. 축구대회를 나가서는 내가 타고난 약심장이구나 새삼 느꼈다.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벌써 다리가 떨리고, 긴장이 가득하다. 휘슬이 울리고 킥오프가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다리가 후덜거리기 시작한다. 숨은 턱끝까지 아니, 코 넘어 눈까지 찬다. 괜히 상대 수비수에게 거친 파울을 해서 내가 두렵지 않다는걸 보여주려고 한다. 원래도 잘 되지 않던 슛은 더 살살 나간다. 연습 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런데 마라톤 대회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만만하고, 조깅하는 기분이다. 기록경신이 아닌 생존과 완주가 목표여서 그런듯 하다. 그래도 나름 전략은 있었는데, 30KM까지만 어떻게든 뛰어가면 그 이후는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줄거라는게 그 계획이었다. 처맞기전까지는 말이다.
총성이 울리고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벌써부터 사방에서 “간바레!! 화이토!!” 응원열기가 대단했다. 악대가 나와서 음악을 연주했다. 응원받으며 뛰는 기분, 나쁘지 않을지도. 이번 대회에는 무려 13,000명이 넘는 러너가 참여했다고 한다. 실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참여했다는게 실감이 났다. 특히 60대 이상 고령자 분들도 꽤 많이 보였는데, 어딘가 뭉클하고 존경스러웠다. 러닝이 하나의 문화로 깊게 스며든 것 같아 인상깊었다. 여튼 그렇게 많은 러너들이 시작점에서 뛰다보니 계획은 바로 어그러져버렸다. 10km 구간을 1시간 20분, 거의 8분대 페이스로 뛰어버린 것이다. 병목현상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날씨도 점점 개고, 따뜻해서 아주 상쾌했다. 어라, 따뜻하다. 긴팔 바람막이를 입고 뛰고 있었는데, 체온이 금방 올라왔다. 5km 급수대에서였던가, 바로 벗어서 조끼에 넣었다. 훨씬 시원하고 좋았다. 한 아저씨도 급수대에서 재정비를 하고 계셨는데, “다이조부?” 하면서 물어봐주셨다. 이게 러너의 정인가. 좀 느리게 뛰다보니 체력소모도 은근히 있고, 숨이 금방 차는 느낌이었다. (벌써 지쳤다는 뜻) 슬슬 후쿠오카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플라잉 구간. 내가 이름 붙였다. F1 중계를 보면 'He is flying.'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날듯이, 유영하듯이, 마치 다른 세계에 가있는 사람처럼 레이스에 몰두해 있는 어떤 상태에서 사용한다. 가끔 뛸 때 이런 기분을 느낀다. 몸은 풀렸고, 숨이 한 번 틔여서 상쾌하다. 속도를 높여도 힘들지가 않다. 내 다리가 아닌것 같다.(좋은 의미로) 스스로가 그냥 뛰는 존재인게 당연한듯한 느낌을 받는다. 체온은 적절하고, 흔드는 팔이 가볍다. 하늘은 높고, 발걸음은 깃털같은데 주위에서 응원까지 해준다. 무빙워크에 탄것 처럼 러너들은 내 뒤로 사라졌다.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박수로 호응하며 세계대회 마라토너처럼 군다. 20km 푯말이 앞에 보인다. 하프마라톤까지는 뛰어본 적이 있기에 우선 20km 까지만 뛰고, 잠시 정비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이 슬슬 잠긴다. 어어어, 아직 이러면 안되는데,, 이미 2시간 30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이거 끝나기는 하는거야. 20km가 지나고 정비를 시작했다. 뭉친 발바닥 안쪽을 풀고, 다리를 스트레칭했다. 젤도 하나 먹고, 수분보충도 마쳤다. 자 이제 뛰자. 어 그래 걷자. 뛰어보려고 해도, 금세 걷고있었다. 태엽감은 장난감처럼 태엽이 감겨있을때에는 왁 뛸 수 있었지만, 좀 풀리고 나면 자연스럽게 걷고있었다. 그냥 뛰면 되는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배가고픈것도, 목이 마른것도 아닌데 잘 안뛰어진다. 이때부터는 도심을 벗어나 바닷길로 향했다. 중간중간 생명의 은인들도 등장했다. 내가 가져오지 않은 파스를 무료로 러너들에게 뿌려주는 시민이었다. 이 사람들,,, 진심이잖아. 그들의 응원문화에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들에게는 마라톤이 어떻게 보면 큰 행사이자 출정식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녀노소 시간을 내서 러너들을 응원한다. 어떤 아저씨들은 크게 스피커를 틀고 맥주한잔 하며 우리들을 응원한다. 낚시하러 오는것 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 코스프레를 하고 응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조마조마해한다.
드디어 30KM! 내 계획에서 미래의 '내'가 등장할 시점이다. 그러던 30키로 초반대가 지났을 때였을까, 슬슬 배가 아팠다. 기록은 이미 포기했다. 뛰기는 계속 뛰었다. 배는 여전히 요동쳤다. 화장실에 가야겠다. 시원하게 변을 봤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술술. 계속 찬 물들을 먹어서였을까. 상쾌했다. (장트러블러 기믹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뛰는 내내 화장실이 있을정도로 러너친화적이여서 부담없이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제 내 앞으로 5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가 지나갔다. 5 시간 30분 안에는 들어가고 싶은데. 이거 끝나기는 하는거야. 발목은 아프고, 다리는 잠겼다. 정신은 반쯤 나갔다. 이제 오르막은 걷는다. 어차피 뛰는거나 매한가지이다. 이거 살아돌아갈수는 있는거야.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