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흔 살
올해 마흔이 되었다.
다섯 살 많은 신랑과 살고 있어서 마흔이라는 숫자가 낯설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나에게는 먼 일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남자의 숫자 사십과 여자의 나이 사십은 같지만 다른 느낌이다. 아니면, 내 일이 아니라서였나?
신랑은 서른여덟 살에 이렇게 말했었다.
"마흔 살이 되면 두려워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없대. 나이 마흔 줄에 망하면 다시 일어날 엄두가 안 난다고. 지금 저지르지 않으면 평생 못할 거 같아. 단순히 직장생활만 하는 삶은 내가 그리던 삶의 모습이 아니야. 나 믿고 도와줄 거지?"
그렇게 직장을 다니면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한복판에 한식당을 열었다. 평생 연구원으로 살아오신 아빠 밑에서, 더군다나 주로 사택단지에서 자라온 터라 주변에 사업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한 달에 한번 몇백의 돈을 갖고 안정적이지만 소박하게 사는 게 일반적이고 일상적이라고 믿고 살던 나에게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굴러가는 돈은 손이 떨리게 무서웠다. 월세부터 직원 월급, 세금 등 이익이 나든 안 나든 한 달에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이천만 원 가까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연봉일 돈이었다. 배포가 크고 강단이 있는 신랑은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 한복판에 60평이 넘는 곳을 빌려 첫 사업을 시작했다. 내 명의의 사업자로.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삶의 방향이 조금씩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저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내가 우리나라도 아닌 외국 한복판에 식당을 차렸다는 사실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내 명의로 되어 있는 내 사업장인데도, 나는 이 사업을 끌고 가는 리더는커녕, 벌어진 일도 수습하지 못해 쩔쩔매는 애송이였다. 언어도 낯설고, 시스템도 낯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해야 할 수장이, 이제 갓 졸업을 마친 어린 직원들 뒤로 숨어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렇게 해결 가능한 일이면 나은 편이었다. 정전이 되거나 진상 손님이라도 올 때엔 엉엉 울며 회사에 있는 신랑한테 전화를 해댔다. 해결을 해달라고 징징 거렸으면 나았을 텐데, 나는 울면서 원망을 해댔다. 왜 이런 걸 시작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한심하기 그지없어 웃음만 난다. 그 지난한 세월을 잘 견디고 이끌어 온 신랑에게 매 순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제 와서야.
크로아티아는 차이나타운이 존재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그만큼 외국인이 자리잡기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민권은 외국인이 취득할 수 없으며 크로아티아인과 국제결혼한 경우라 할지라도 매년 비자를 갱신받아야 하는 아주 빡빡한 국가이다. 그 흔한 스타벅스나 던킨도넛 같은 국제기업들을 이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데, 그 기준이 아주 까다롭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유일하게 있던 해외 요식 브랜드가 맥도널드였는데, 그마저도 자그레브에 두 곳이 전부였다. 그래서 2011년 KFC가 처음 오픈했을 때, 한인들이 모여서 만세를 불렀었다. 이루어진 치맥의 꿈을 찾으며. 그런 KFC 매장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자그레브에 딱 6곳뿐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내가 하필 고른 곳이 그런 곳이었으니, 어쭙잖은 사회 쪼렙 나와 유난스럽게 빡빡한 이곳이 만나 내뿜는 시너지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어마어마한 폭탄 덩어리랄까.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버텼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당시에는 또 어찌어찌 하루하루 버텨내었다. 이럴 때 보면 시간이 약이라는 말, 망각이 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식당은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는데, 지하에 주방이 있어서 내가 수시로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얼마 안 가서 오른쪽 엄지발톱이 까맣게 죽더니 빠져버렸다. 밤 10시 즈음 하루 장사가 끝나고 한가한 시간이 오면 구석의 냉장고 앞 박스에 쭈구려 앉아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숨쉬기 운동 말고는 운동이라고는 안 하던 내가 육체노동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던지 누가 보거나 말거나 울기도 잘 울었다. 그러면 현지 직원들이 슬그머니 내게 차가운 비락 식혜 캔을 가져다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추억인데 그 당시에는 정말 다 너무 힘들었다. 더군다나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아닌가. 육아도, 가게도, 회사도, 집안일도 우리 부부 둘이서 해내려니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래도 조금 젊었을 때라서 버텼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흔이 된 지금은 다시 하래도 절대 못 할 것 같다. 그래서 젊음이 좋고, 모르니까 하는 거라는 말이 맞다. 그 모든 고생을 알았더라면 시작도 못했을 거다.
그래도 나는 신랑의 마흔 살에 그와 함께 새로운 인생의 서막에 서 있었다. 부부는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의 나이에 맞추어 같이 그 나이로 살아간다는데, 그이의 마흔 전 인생 터닝 포인트에서 나도 같이 크게 회전했다. 그렇게 7년이 흘렀고, 이제 나는 나의 마흔 살을 지나고 있다. 이번에는 신랑이 나와 맞춰 같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해야 할, 우리 부부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 그리고 마흔을 앞두고 하고 싶었던 일을 실행에 옮긴 신랑이 대단하는 생각이 든다. 마흔을 맞은 나는 생각은 많은데 아직 이렇다 할 결심을 못 내린 기분이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슬쩍 펜데믹 핑계를 대볼까 하는 패자의 생각이 자꾸 들어 정신을 다잡는 중이다.
평균 수명을 80으로 잡으면 딱 반을 산 인생, 스무 살까지는 부모의 그늘 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오니, 내 의지대로 사는 60년 인생의 3분의 1을 보낸 시기, 큰 비율로 따지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과 육아로 시간을 보내다 아이들이 얼추 커서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는 나이가 마흔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다들 유난히 나이 40이라는 숫자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닐까? 나 역시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은 지점. 그곳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