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 의욕 넘치는 시작
이른바 펜데믹 Penddemic으로 사람들이 집 안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자, 처음에는 답답해하며 울적해하던 사람들이 적응의 동물인 인간답게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에만 가둬두니까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초 가꾸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건 인간의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자연에서 멀어지자 자연 곁에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저 밑바닥 삶의 욕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녹색과 떨어져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니, 내 손으로 작게나마 곁에 두고 싶어 한 마음들. 그러면서도 취미 생활을 하며 생산성을 높여볼까 하는 현대인의 실용적 마인드로, 또는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어린 자녀들을 위한 체험학습의 일종으로 식용이 가능한 쌈채소부터 토마토 등의 일 년생 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가 농업(?) 활동을 시도하는 가족들이 많아졌다. 각종 SNS에는 관련 포스팅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그렇게 초반에는 할 일 없이 집에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4000번을 저어야 맛볼 수 있다는 '달고나 커피'부터 각종 베이킹까지 주로 갑자기 주어진 고립된 공간에서의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는 '작업'들에 초점을 둔 것들이 유행을 했었다.
하지만 길어야 몇 개월이겠지, 하던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갔고, 그러는 와중에도 점차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거 공간이었던 곳이 작업 공간이 되고 놀이 공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주목하게 되었다. 집은 이전에 잠자고 쉬던 곳에서 나의 모든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만능 공간으로 기능했다. 집이란 일터는 물론이거니와 식당이었고 파티장이었으며 때론 캠핑장도 되었다. 그에 따른 모든 물건이 갖추어져 갔다. 집에만 있는데, 아무것도 못하는데 이것 정도는 필요하지, 라며 사들이는 각종 물품들이 쌓여갔다. 밖에서 쇼핑할 수 없지만 그에 따라 발전한 배달 서비스는 필요한 모든 물건을 손가락 하나로 해결해 주었다. 식당에 갈 수 없는데 배달 음식만 먹을 수 없으니 그럴듯한 에어프라이어가, 텃밭을 위한 화분들이, 아이들을 위한 캠핑 의자가 하나씩 늘어났다. 그렇게 물건에 쌓이고 치이다 보니 어느 순간 숨이 막혀왔다. 안에 가두어놓아서? 아니었다. 내가 들인 물건들에 치이고 지쳐서였다. 그런 피로도가 높아지자, 이젠 반대적 움직임이 급부상했다. 나의 공간을 쓸데없는 물건으로 채우지 말자는, 비우자는 미니멀리즘. 내가 사들이고 모아둔 모든 물건은 한순간에 쓰레기로 전락했다. 미니멀리즘에 따르면 모두 다, 전부 '비워야'하는 물건들이었다. 아니, 비우라는 살짝 비틀린 말속에는 다 '버리라'는 지시사항이 들어있었다. 우선은, 다 버려야 한다!
지리한 2년의 시간을 보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육아하는 집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늘어나는 색색깔의 장난감과 육아용품은 아무리 멀리하려 해도 어느샌가 우리 집에도 떡하니 들어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걸 뭐하러 사, 라는 굳건한 마음도 잠시, 애가 혼을 쏙 빼놓고 잠을 이틀 정도 못 자게 되면 아기가 잘 가지고 논다는 그 국민 템을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된다. 잘 가지고 놀지 않아도 되니, 단 5분만이라도 나에게 시간을 좀 다오.라는 간절한 마음이랄까. 아기를 재워준다는 모빌이나 쏘써도 처음엔 흥, 상술이지 하는 똑똑하고 야무진 엄마이자 주부로써 외면할 수 있지만,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거라도, 누구라도, 단 5분만이라도 우리 아이의 주목을 끌 수 있다면야, 무엇을 못 사리 하는 처절한 마음이 드는 건 한순간이다. 아들만 둘인 나의 경우에는 특히나 레고가 계륵 같은 물건이었는데, 똑같은 블록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립해 각기 다른 박스에 넣어 둔 똑같은 비싼 플라스틱 쪼가리들을 다시는 사주지 않겠다고 마음 먹지만 그런 굳건한 마음은 어느 순간 무너지고 그 비싼 '똑같은' 플라스틱 블록들을 또 사주고 마는 것이다. 그냥 며칠만 이걸로 조용히 놀기만을 바라면서. 싸우면 다시는 안 사주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그러나 나는 늘 며칠 뒤 굴러다니는 레고 블록을 하나 밟고 포효하며 후회한다. 그놈의 레고는 밟으면 아프긴 왜 이리 아프고 치워도 치워도 끊임없이 나오는지. 레고를 만들 때는 없다고 징징대는 그 피스들은 어쩜 이렇게 온 집안에 깔렸는지. 그렇게 레고부터 맥도널드를 먹고 받아오는 조잡한 해피밀 부록 장난감들까지 널려져 있는 집안을 보자면, 늘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내가 얘네들 레고 치우는 시기만 와봐라, 아주 싹 다 버려버릴 거야!
그리고 팬데믹은 딱 그런 시기에 찾아왔다.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레고나 너프 건으로 종일 놀지 않았다. 이제는 컴퓨터, 아이패드, X BOX 등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다른 의미의 전쟁의 서막이긴 해도, 적어도 이 모든 알록달록 모드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충족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시작된 장난감 퇴출은 나를 미니멀리즘의 헛된 꿈을 갖게 하는 시작이 되었다.
자그마치 공간박스 두 상자를 채운 레고 더미들과 각종 미니카와 공룡 피겨들, 너프 건들을 나눔 하고 버리고 나니 갑자기 의욕이 불끈 올랐었다. 이삿짐 박스 몇 상자는 되는 물건들을 들어내고 나니, 마치 내가 버리고 정리하는 달인이 된 기분이랄까. 이참에 아예 미니멀리스트로써 간결하고 산뜻한 삶을 시작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 한순간에 깨끗해진 아이들의 방을 보고 있노라니 어찌나 나 자신이 뿌듯하던지. 잠시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잊었던 거였다.
대학생일 적, 나는 여동생과 같이 살았었다. 야행성인 나와 새벽형 인간인 동생은 생활 패턴 자체가 맞지 않아서 부딪힐 일도 별로 없었다. 밤새 놀거나 공부하고 새벽 4시나 돼서야 자볼까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부스스 귀신처럼 일어나 나오던 동생과 나는 극과 극의 인간이었다. 그런 우리가 유일하게 다투는 일은 바로 정리정돈, 청소의 영역이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어야 하는 동생과 내가 놓은 자리가 그 물건의 자리가 되어 버리는 나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래도 요리를 좋아하는 나와 설거지와 뒷정리를 좋아하는 동생은 생각보다 잘 맞는 동거인이어서, 속 편한 나는 요리처럼 정리정돈도 타고나는 능력인 거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던 내가 미니멀리스트라니.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혹독한 삶 속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 그 조차도 망각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터무니없는 계획을 수립한 후, 나는 그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버리기 시작했다. 정리정돈은 자신이 없어도 사실 갖다 버리는 것만큼은 참 잘하던 나이기에 생각보다 미니멀리스트가 나에게 맞는 것 같다며 깨방정을 떨었더랬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누구 주고. 애들 작아진 내복도 걸레로라도 한 번 쓴다고 못 버리게 하는 신랑과 매일 실랑이하던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꽤 많은 물건을 비워내고, 더 이상 버릴만한 게 없자 정말 집이 정돈된 것처럼 보였다. 쌓여있던 물건들이 나간 자리는 휑하다기보다 깔끔하고 정리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삶의 시작은 순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