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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댁 Mar 19. 2022

운명의 해외 살이

인생의 아이러니 

 어떤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닌데 막연한 느낌으로 늘 나는 해외에 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냥 당연한 것처럼, 마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해외살이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유난히 외국어를 좋아했던 성향 탓도 있었을 거고, 어쩌다 한번 엄마가 어디 가서 보고 오시는 점사위나 사주팔자 등에 꼭 여러 나라 말을 쓰며 살 거라던지, 비행기 타고 나가 살 팔자라던지 하는 등의 찌라시 같은 말들을 어린 마음에 새기고 살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1학년에 부모님을 졸라 다녀온 한 달짜리 짧은 미국 어학연수도 큰 계기가 되었다. 후에 아빠가 지금으로 따지면 천만 원에 달하는 돈을 대출받으셔서 보내주셨다는 걸 알았다. 월급쟁이 가정에 그렇게 큰 목돈은 큰 부담이었을 텐데,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중학생 딸내미의 경험을 위해 그렇게 투자를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의 성향과 가르침이 나를 지금의 삶의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계획했던 인생과 전혀 다르게 외국어 특성화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또 학교 생활이 기대 이상으로 내게 잘 맞아떨어졌다. 후에야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런 일들을 보면, 어쩌면 인생은 어느 정도의 길이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대학을 진학한 이후에는, 부모님을 졸라 서든, 내 돈을 모아 서든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유럽을 가게 되었다. 그저 믿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의 덕으로 1년간의 피렌체 유학을 계기로 해외살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막연함에서 확실함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던 캥거루 족인 나는 부모님의 지원해주시는 유학생활 이외의 해외 살이를 계획하지도, 그려보지도 못했었다. 나이로만 성인의 이름표를 단 내가 보기에 세상은 너무나 험난했고, 더군다나 알지 못하는 외국에서의 혼자의 삶은 감히 그려볼 수도 없었던 빈 껍데기 어른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막연하게, 난 외국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확신을 했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도 없고 대책도 없는데, 그때는 막무가내로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 친구들이 지금 내가 보기에 대책 없어 보여도, 그때는 그런 시기인 걸 나도 잊고 살았나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는 취업이 하기 싫고, 해외에 나가기엔 용기가 없었는데 마침 조교 장학제도로 대학원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대학원을 입학했다. 전공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공부를 좀 더 하고 학위를 따서 몸값을 올리고 싶은 마음 30프로 정도, 나머지는 학생이라는 신분을 좀 더 유지하고픈 회피의 마음 70프로 정도로 결정했던 거 같다. 물론 그런 마음은 못다 한 공부에 대한 의욕이라는 포장으로 꽁꽁 숨긴 채, 나는 학교에 남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탈리아로 박사를 하러 가려든 결혼을 하고 가라는 늘 예스맨이었던 아빠의 반대에 부딪힌 내게, 내가 너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 박사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눈먼 남자를 만난 것이다. 장난 반 의심 반으로 그럼 그곳에 직장을 잡아오라는 말에 그는 떡하니 번듯한 직장에 취업했고, 나는 약속대로 그와 결혼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대학에서 공부할 거라는 나를 위해 차로 5시간 걸리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취업한 그를 따라, 나는 이곳 크로아티아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여느 이야기가 그러하듯, 나는 물론 박사 공부를 시작도 못했지만 말이다. 입학시험을 보러 다니던 내게 아기천사가 찾아왔다. 


                                    통역차 따라갔던 이탈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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