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란 그 곳
처음 신랑이 크로아티아로 가서 살자고 했을 때는 내 로망이었던 바닷가 도시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도를 찾아보니 아드리아해를 길게 끼고 좁고 길게 위치한 다소 기이한 형상의 나라이고, 인터넷을 조금 찾아보니 크로아티아 바다를 극찬하는 내용들 뿐이라서 철없던 20대인 나는 수도인 자그레브를 찾아보지도 않고 햇살 부서지는 아침바다를 볼 생각에 설렜었다.
웬걸. 내가 살게 될 자그레브는 내륙 한가운데 위치한 칙칙한 회색 도시였다. 건물들은 유럽의 여느 건물들처럼 바로크, 고딕 양식 등을 딴 유럽식 건물들이 맞는데, 유난히 칙칙한 회백색 건물들이 많고, 특히나 오래된 페인트가 벗겨진 채 방치된 곳들이 많았다. 더구나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젊은 청년들이 자유의 상징이라며 이벽 저 벽에 멋지게 갈겨놓은 그라피티들이 우울한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게다가 내가 자그레브에 도착한 3월은 겨울의 칙칙하고 습한 우중충한 날씨가 채 가시지 않아 거리에 인적도 드문 쓸쓸한 회색빛의 도시로 첫인상을 남겼다.
그래서였을까, 다가오는 봄의 날씨에 여기저기 꽃이 만개하는 알록달록 초록 초록한 자그레브의 모습은 설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햇살 강력하고 하늘 높은 지중해 날씨가 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여름이 되자, 나는 자그레브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자그레브도 크로아티아 바닷가를 가게 되면 돌아오기 싫은 장소로 변해버린다.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는, 그 특유의 바닷가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특별함이 있다.
우선 에메랄드 색으로 신비하게 빛나는 쪽빛 바다의 색감에 홀리고, 홀린 듯 가까이 다가서면 바다 저 깊은 바닥까지 다 보이는 투명함에 놀란다. 햇살 부서지는 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드문드문 떠 있는 새하얀 요트들과 더러움 하나 없아 깨끗한 부두, 혹은 멋들어지게 감싼 해송들이 그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바람이라도 불면 비릿한 내음 하나 섞이지 않은 바다 특유의 짠내음이 코를 부드럽게 지나간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태양을 피해 그늘로 들어서면, 30도를 훌쩍 웃도는 날씨가 무색하게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만 들어서면 선선하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고온 건조한 크로아티아 기후의 매력이다. 수없이 늘어 선 카페 중 한 곳으로 들어가 시원한 맥주나 화이트 와인 한잔을 들이켜면 그곳이 천국이다. 크로아티아 특유의 여름 음료인 스파클링 워터와 화이트 와인을 반반 섞은 게미쉬를 마셔도 좋다. 청량하고 시원해서 꿀꺽꿀꺽 들어가지만 조심해서 마셔야지 금방 취기가 오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한기가 들기도 한다. 그럴 땐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셔주면 정신이 번쩍 난다. 누구나 친절하고 누구나 느긋하고 누구나 행복한 크로아티아 바닷가의 무드는 문득문득 자꾸 생각나는 마법 같은 인생의 장면을 선사해준다.
지나가던 바닷가 마음에 드는 아무 곳에나 타월 하나 깔면 나만의 해변이 되는 크로아티아지만 그 바다의 특별함을 느끼려면 요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봐야 한다. 파아란 바다와 파아란 하늘을 가르며 뜨거운 햇살 사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뺨으로 맞는 그 기분은 느껴봐야 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먼바다로 나가 배 안에서 뛰어내려 수영하는 기분이란!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랗다 못해 까만 바닷물로 뛰어드는 순간은 무섭지만, 망망대해 한복판에 둥둥 떠있는 기분이란 이루말할 수 없이 자유롭다. 올려봐도 내려다봐도 그저 파란빛만 가득한 신비의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을 어찌 설명할까. 깊은 바다라서 부력이 높아 별 애를 쓰지 않아도 몸이 둥둥 뜬다. 새파란 곳에 하얀 요트 하나. 그야말로 힐링이다.
크로아티아에 산지 십수 년이지만, 난 늘 여름휴가는 크로아티아 한적한 바다로 간다. 종종 가까운 다른 유럽 도시들로 왜 안 가냐고 물어보는데, 다른 곳은 여름이 아닌 계절에 간다. 나의 여름휴가는 언제나 늘 크로아티아 어느 해안이다. 여름이 다가오면 나는 크로아티아 어느 바닷가에 누워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바닷가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