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보가 맺어 준 인연
한식당을 열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 마음에 드는 가게터를 찾는 데 장장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다잡은 마음인데 시작도 할 수 없으니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짜증도 나고 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솟구쳐 오르길 반복했다. 2014년 2월에 마음의 결정을 하고 법인을 세웠다. 그 해 봄부터 찾아 나선 가게터를 그다음 해 4월에나 계약할 수 있었다. 아 진짜 올해 안 찾아지면 접어야겠다, 라며 뚝심 있게 기다리던 신랑도 지쳐했다. 까다로운 신랑의 입맛에 맞는 장소는 정말 구하기 힘들었다. 수많은 장소를 보면서도, 이런 데다 차릴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는 단호한 신랑의 결정에 1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인연이었는지 지금의 가게터를 지인을 통해 소개받게 되었고 우린 법인을 설립한 지 1년 만에 드디어 뭔가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가게 인테리어 공사 중에도 월세는 지불해야 해서 빠른 공사 진행이 절실했지만, 인터넷 하나 설치하는데도 한 달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이곳에서 뭐 하나 쉽게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버텨온 시간이 재산이라고, 그나마 오랜 세월 이곳에서 지내며 맺었던 인연들의 도움이 있어 우리는 어찌어찌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전기 공사, 주방 공사, 엘리베이터 설치 같은 굵직한 일들은 신랑이 처리를 하고 나에게는 인테리어와 그릇 주문 등의 일이 맡겨졌다. 일이라곤 애들 과외나 통/번역 일 말고는 카페 알바 한번 못해 본 내가 큰 규모의 일을 떠안으니 겁이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 붕 뜬 기분이었다. 마치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인 듯 느껴지는 이질감이 이랄까? 인테리어는 무슨, 신혼집 한번 못 꾸며보고 그냥 되어 있는 대로 살던 생활인데 가게 콘셉트를 잡으라니 막막할 따름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막막한 상황에 놓이자 내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책상 앞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던 나는 결국 또 책상 앞에 않았다. 그리고 브레인스토밍부터 하기 시작했다. 노트 한 권을 두고 크로케이의 콘셉트와 방향성 인테리어 메인 색상과 받침이 되는 색상, 그리고 메뉴 구성에 이르기까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의 방향성 정리였다. 사람은 참 배운 대로 행동한다는 말이 맞다. 막막한 상황 앞에서는 자기가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살아가며 점점 더 많이 느낀다. 다양한 경험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해외에서 한국적 분위기를 표현하려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운송 비용이었다. 소품이 부피가 크거나 너무 무거우면 운반 비용이 너무 비싸졌다. 수많은 고민 끝에 배송 비용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보자기 또는 조각보를 이용한 데코레이션이라고 결론 내렸고 그때부터 인터넷으로 서칭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조각보 공예를 찾아 헤맸다. 근래에는 조각보 공방이나 작품들을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은데,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조각보 공예를 인터넷에서 찾기 힘들었다. 게다가 바다 건너에서 인터넷으로만 찾으려니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중, 보물처럼 한 블로그 포스팅을 발견했다. 그곳에 올라와 있는 초록 잔디 위의 조각보 방석 하나가 내 맘에 들어와 꽂혔다. 아, 나 이분이랑 꼭 일하고 싶다. 이 분한테 우리 가게 콘셉트 의논하고 싶다는 강력한 느낌이 왔다. 나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친 인간형인데, 나의 촉이 발동을 했다. 이 분이다. 나는 무작정 블로그 주인에게 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인연은 참 신기하다. 바다 건너 생판 모르는 사람이 터무니없고 정리되지 않은 엉뚱한 요청을 보내왔는데, 또 이 분은 내 작품을 좋아해 줘서 감사하다며,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며 흔쾌히 응해주셨다. 조각보나 보자기 공예 하면 나이 지극한 분이 연상되기 마련인데, 정말 우연인지 나와 같은 또래의 언니였다. 어머니가 한복 전공자이시셔 그 재능과 피를 이어받아 가회 규방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대기업 의류회사에 다니는 인재 었다. 신기하리만큼 이야기가 잘 통했고, 다소 터무니없다고 여겨질 법한 꿈같은 계획들도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모두 진심으로 들어주셨다. 당시의 우린 모두 젊고, 열정이 있었고, 순수했다. 한번 직접 만나 얼굴 맞대고 의논해 보지도 못하고 모든 프로젝트를 이메일을 통해 진행했다. 단순히 조각보 작품을 부탁드린 게 아니라, 식당 공간 자체를 모두 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해서 공간의 전체적 콘셉트를 상담받고 진행했다. 감사하게도 이 모든 의견을 PPT 자료로 만들어 정리해 주실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정말 큰 내 복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공간 컨설팅을 받았던 건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전문가를 신뢰하고 일을 진행하는 편인데, 같은 일을 반복한 사람들은 분명 그만큼의 노하우가 축적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일은 믿고 진행해야 잘 될 거라는 나의 신념이 있기도 하고. 그렇게 나의 역량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을 큰 프로젝트를 좋은 인연을 만나 잘 채워나갈 수 있었다.
사실 현지 건설사에 공간 디자인까지 맡긴 터라 양쪽으로 일을 진행했었다. 아무래도 공사를 진행하려면 그 편이 훨씬 수월했기에 현지 팀과 굵은 틀의 가닥을 잡고 가회규방과 디테일한 부분을 채워나가려는 요량이었는데, 내 야무진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기본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같은 느낌의 깨끗한 인테리어를 원했는데, 현지 디자이너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극심하게 반대했다. 그건 절대 레스토랑에서 가져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며, 레스토랑은 기본적으로 '따뜻한' 느낌으로 꾸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원했던 하얀 벽은 네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며 디자이너로서 승인할 수 없다면서. 인터넷에서 다양한 예시의 사진을 가져다 보여줘도 소용없었다. 컬러가 다양하게 들어가는 화려한 조각보 작품과 동양화 족자를 걸기 위해선 깨끗한 벽이 필요하다고 해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고객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 거만함에서 살짝 비치는 인종 차별적 우월감을 느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 의견을 들을 의향이 없구나. 하지만 건설사에서 받아주는 허가서가 꼭 필요했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5천 유로를 공간 디자인 비용으로 지불했다. 그리고 의자부터 페인트, 벽지 그리고 조명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사항을 나 혼자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결정했다.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한 가지를 고르고 결정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내 결정 하나에 몇 천만 원이 오가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고스란히 지어야 한다고 하니 쉽사리 선택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 타일도 보는 것과 공간에 설치한 후 보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고,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처음 만난 인연인 가회 언니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내가 결정을 힘들어할 때마다 현실적 조언으로 도움을 주고 동시에 잘하고 있다고 끝없이 칭찬해 주었다.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사이버 인연의 끈끈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돌아보아도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다.
그 후로도 언니가 크로아티아에 가족과 함께 오고, 신혼여행으로도 오고, 내가 한국에 가게 되면 시간을 꼭 내어 만나는 소중한 친구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 한동안 가게에 개량 한복을 입고 출근했었는데 그 옷들도 모두 언니가 만들어 주었다. 사실 옷뿐 아니라 크게는 아트 월 작품부터 컵 코스터에 이르기까지 자잘한 모든 것들을 같이 했다. 당시엔 모든 게 너무 벅차고 힘들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걸 잘 몰랐기에 내가 받는 도움의 손길들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도 잘 몰랐다. 시간이 이만큼 흐르고 나서, 내가 이제 좀 여유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에서 돌이켜 보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당시에는 마냥 힘들고 운 나쁜 일들만 일어난다고 버거워했었는데, 나의 무지함이 감사함을 놓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감사한 마음이 드는 인생이라니, 너무 멋지다. 새삼 그럴 수 있음에 또다시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해외 살이를 한 지, 올해로 15년 차에 들어선다. 좋은 인연을 만난다는 게, 그리고 그 인연을 잘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해가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소중한 인연들이 참 귀하고 감사하다.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누군가의 도움이 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어려운 순간들이 올 때, 내 곁에 있어주는 이들을 떠올리자고.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