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작년 늦은 가을,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함께 많은 변화가 몰아쳤다. 사업하면서 가장 중요하지만 힘든 일은 사람을 쓰는 일이라더니, 그 말을 증명하듯 매 해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이 벌어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누구도 믿지 않고 비즈니스적 관계를 맺겠다고 다짐해도,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감정이 스며들어가기 마련이다. 물론 나의 경우에 한해서. 그래서 늘 후회하며 반성한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을 다루지 못하는 건가. 이게 바로 능력 부족, 자질 부족이라는 건가. 사람을 잘 다루고 내 사람을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던데, 나에게는 마냥 어렵기만 한 일이다. 일의 특성상 평생 직업으로 할 수 없는 직종의 사람을 다룬다지만, 때론 참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다.
작년에 마음 앓이를 심하게 했다.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지인이 교묘하게 직원 사이까지 갈라놓으며 뒤통수를 세게 쳤다. 두 배, 아니 열 배쯤 되는 배신감과 분함에 몇 달을 분을 삭이느라 고생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달려가서 따지고 들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르느라 고생을 했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언젠가 그 업보 돌려받을 거라는 생각과 이미 힘든 마음을 말로 서로 생채기 내가며 헐뜯고 큰 소리 내기 싫었다. 생각해 보면 도덕적으로 질타받을 문제이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발뺌하고 말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어쩜 그 긴 세월 동안 가족처럼 잘 지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있지 하는 마음이 들어 더 속앓이를 했다. 1년도 더 시간이 흐른 지금은 내가 모르는 그들만이 느끼던 감정들이 있었겠지 하는 이해의 마음까지 들 정도로 많이 나아졌다.
2019년 9월 중순에 새로운 직원을 한국에서 데려왔었다. 팬데믹이 일어날 줄 몰랐었으니까. 날로 성장하는 사업에 부푼 마음으로 새 인재를 영입했다. 그리고 딱 4개월 만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여기는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는 락다운 상황까지 치닫았다. 그래도 초반에는 몇 개월이면 끝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때 진짜 그랬었나? 하는 비현실적인 기분까지 드는 당시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다. 생필품과 식재료를 위한 마트와 약국만이 문을 열었고, 가족 중 한 사람만의 외출이 허용되었다. 국경은 물론 도시 간 이동까지 금지되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락다운 며칠 후 자그레브에 진도 5.9의 지진이 나면서 도시는 정말 폐허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 들어온 직원을 우리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업은 강제로 중단하게 했지만, 월세와 직원 월급 등은 감면해 준다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초반 몇 개월은 그야말로 몇천만 원씩 생으로 돈을 들이부어야 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에 함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정말 빛 한 줄기 없는 깜깜한 터널을 기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몇 개월 뒤 정부 지원이 일부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은 금액이었다. 세입자와 사업자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직원들의 최저임금이 정부에서 지원되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직원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5명의 크로아티아 직원들은 3개월에서 1년 2개월까지 각자 버티다 그만두었다. 가게 문을 열지 못하니 어차피 출근도 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서로를 안쓰러워했다. 기가 막힌 상황에 기 막혀하며. 그 상황에서 큰돈을 주던 한국 직원에게도 똑같이 최저임금을 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달이 100만 원이 넘던 월세와 세금을 내주었다. 내칠 수는 없었다. 가끔 화가 나서 신랑에게 그냥 그때 다른 사람들처럼 미안하다고 하고 잘랐어야 한다며 하소연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우리 부부는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수입이 제로였던 상황에서 100만 원에 달하는 월세는 정말 큰 부담이었다. 주변 지인들은 다들 우리에게 바보 같은 일을 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아는 유럽의 모든 사업자 분들은 직원들을 무급 휴직으로 전환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해고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갑작스럽게 닥친 이 불행이, 나에게만 갑작스러운 불행이 아닌데, 나를 믿고 와서 일하기로 한 직원을 바로 내칠 수는 없다는 게 우리 부부의 생각이었다. 이 상황이 막막한 건 그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어쩌면 사업가의 생각은 아니겠다. 하지만 모든 일은 사람을 위한 일이니까.
그렇게 2020년을 보내고 2021년 6월에 가게 문을 제대로 열 수 있었다. 장장 1년 반, 18개월의 시간이었다. 정부에서는 중간에 배달과 테라스 영업은 허용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테라스 좌석은 없었고, 자그레브 최고 중심가에 위치한 탓에 주거 지역이 근처에 있지 않아 배달 주문은 미미했다. 거의 1년 반의 시간을 날렸다. 2020년 여름 잠시 문을 열기도 했었는데 그 해 여름이 지나고 다시 급속하게 심해지는 코로나 확산에 금방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신랑은 이럴 때 바닷가나 놀러 가자며 일주일, 열흘 여기저기로 많이 돌아다녔다. 끝없이 우울해지는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바다로 데리고 다니며 바람을 쏘여 주었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보상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라며. 다행히 숙소들이 굉장히 저렴했고 바다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여행에 한국인 직원을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을 버티고 2021년 6월에 영업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팬데믹 전에 비하면 매출이 4분의 1로 줄었다. 그래도 가게 문을 열다니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희망에 들떴었다. 하지만 2021년 역시 코로나 델타를 출발로 오미크론까지 확산되며 다시 끝도 없는 불황이 시작되었다. 정부도 세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지원금을 준다는 소리도 못하니, 다시 강제로 문을 닫으라는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 초반보다 더 지독한 오미크론 열풍이었다. 다시 어두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2022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022년 초반이 가장 금전적으로 힘들었다. 정부 지원도 없고, 경기는 꽁꽁 얼고, 작은 아들이 수술을 꼭 받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 자가격리를 무릅쓰고 두 달 한국에서 수술과 재활을 하고 왔다. 이곳저곳 돈이 많이 들어가고 심적으로도 힘들어서 정말 암흑 같은 날들이었다. 팬데믹 초반에는 그래도 벌던 끝에 갑자기 닥친 일이라 어찌 막아볼 수나 있었는데, 오미크론 때는 이미 바닥나다 못해 구멍 난 재정에 닥친 일이라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꾸려나갔나 보다. 지금 여기에 서있는 걸 보면. 그렇게 버티다 보면 2022년이 왔고, 여름을 기점으로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양상이 달라졌다. 팬데믹 이전에는 한국 관광객으로 바빴다면, 지금은 찾아주는 현지인들 덕분에 매우 바빠졌다. 한류에 힘입어,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버텨 온 시간의 힘이 더해져 가게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제 숨 좀 돌리나 했다. 2020년, 2021년, 그리고 2022년의 6개월 만에 가게가 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2년 반의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어찌 지나왔지? 하는 생각이 드는. 하지만 늘 그렇다. 이제 좀 쉬어갈까. 하면 무언가 툭 튀어나온다. 바빠진 지 3개월 만에 한국 직원이 그만두겠다며 연락을 해왔다. 그때의 배신감이란. 펑펑 놀며 2년 반 동안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이제 일 할만하니 다른 곳으로 간다고?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2년 반 동안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엔 팬데믹 동안 원래 월급으로 계산해 달라며 억지를 썼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기가 억지를 썼다며 사과를 해왔지만 당시에 나는 정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분했다. 요는, 자기는 일을 하긴 했다는 것이다. 팬데믹 기간 가끔 배달이나 주문 도시락을 했었다. 그런데 사실, 그건 직원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직원이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하여 사장이 고용하여 쓰는 인력 아니던가. 그때는 한국은 가지 않겠다고 해서, 그만두지 않겠다고 해서 우리도 힘들지만 데리고 있었던 건데 그때 드문드문 나와했던 일을 들먹였다. 신랑이 그랬다. 내가 너를 직원으로 데리고 있을 거면 그 많은 여행에 왜 데리고 다녔겠냐고. 우리는 놀러 다니고 너는 가게 문 열고 일하라고 하지. 정말 당시에는 팬데믹이 나에게 닥친 어마어마한 불행인 것처럼, 너에게도 그럴 거라고. 근데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너의 잘못도 아니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월세 다 받아먹는 악랄한 우리 집주인 처럼 되지 말자고. 나도 힘들지만 너도 힘든 상황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끝까지 책임져 보자는 마음이었다. 나에게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한국 가는 비행기 표는 구할 수가 없고, 옆 나라는 커녕 옆 도시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너를 모른 척하면 진짜 너는 국제 미아가 되겠구나 하는 마음에 그 시간을 버티어 내었다. 가게를 열지 못하는 2021년에도 비자 발급 또한 해주었다. 최선을 다해 보호해 주었다. 우리를 믿고 일하러 온 이상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상황이 나아지니 딴생각이 들기도 하겠지. 가게가 바빠지고 잘된다고 해서 갑자기 금전적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업자라면 공감하겠지만, 그동안의 마이너스를 메꾸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당장에 보이는 벌이가 나아졌는데 내 월급이 올라가지 않으니 화가 난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은 천 길 물속보다 알기 힘들다는 걸 다시 배웠다.
수많은 직원을 만났다. 웨이터나 요리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길게는 3년에서 짧게는 3일 만에 그만두기도 하고, 돈이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연락하며 살갑게 지내는 직원도 있다. 한국인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는 친구들도 있고, 기분 나쁘게 헤어진 사람도 있다. 늘 생각이 많아진다.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일까?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업무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는 것? 특히나 한국인 직원을 데려 올 경우, 해외 살이를 하는 특성상 그렇게 지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늘 고민이 된다. 사람과의 관계.
몇 개월의 마음 앓이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분노도 해보고 자책도 해보고 후회도 해 보며 내린 결론은 이거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냉정하게 한국으로 돌려보냈을까? 아니, 나는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아니, 못 한다. 그래서, 결국 결론은 생긴 대로 사는 거라는 거다. 어쩌면 그 힘든 시간 동안 그 직원을 데리고 있었던 건, 그 직원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맘 편하자고 내린 결정이라고. 남 탓할 것 없다고. 내 결정에 내가 책임지고,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으면 되었다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을 책일 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커 나가자고. 앞으로도 수많은 불신과 배신이 있겠지만, 이왕이면 멋있게 당해주는 쪽으로, 베풀어주는 편에 서서 살아가자고 다짐해 본다. 어쩌면 내가 참 사람 다루는 것에 미숙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인간관계라는 것에 중심에는 결국 '나' 자신이 서 있지 않은가? 뭐든 3자의 입장에서는 냉철할 수 있다. 사업도 일도, 결국은 나를 빼고 일로만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인간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이상, 나 또한 그 관계의 일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소용돌이 밖에서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 소용돌이 안에서 애를 쓰니 힘들 수밖에. 소용돌이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여유로움이든, 쉬이 휩쓸리지 않는 하체의 단단한 힘이든 뭐가 되든 길러보는 걸로, 미래의 나에게.